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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회사이 Feb 09. 2023

따라나설 것인가, 말 것인가?

마태복음서, 길 위에서 길을 가르치는 예수 (7-2)

함께 읽고 걷는 더 드라마, 예수의 길 떠난 가족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다고 하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그는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 바닷가에 있는 가버나움으로 가서 사셨다. 이것은 예언자 이사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이었다. “스불론과 납달리 땅, 요단 강 건너편, 바다로 가는 길목, 이방 사람들의 갈릴리, 어둠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그늘진 죽음의 땅에 앉은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었다.”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마태복음서 4:12-17)


photo by noneunshinboo 


1.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그러니,  

“그만 내려 놓아라, 그만 버려 두어라. 그리고 나를 따라 길을 떠나자. 하늘 나라의 배로 나와 함께 옮겨 타자. 엉거주춤한 채로 있지 말고, 이럴까 저럴까 머뭇거리지 말고, 여기 계속 머물러 안주하려 말아라. 이제 그만 나와 함께 길을 떠나자. 나와 함께 나의 아버지의 배로 옮겨 타자. 더 이상 우물쭈물하지 말아라. 배 곧 떠난다.” 


‘회개’는 배를 옮겨 타는 것입니다. ‘회개’는 내가 타고 있던 배를 조금 고쳐 타는 것이 아닙니다. 가던 길 잠깐 멈추었다가 다시 가는 것도 아닙니다. 아닌가 싶어 왔던 길 되돌아서 가는 것도 아닙니다. 유턴이 아닙니다. ‘회개’는 내 배를 버리고 새 배로, 하나님의 배로 옮겨 타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길로, 새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는 단지 윤리적, 도덕적, 사법적 잘못을 뉘우치고 반성하고 죄송합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올바로 살겠습니다, 똑바로 살겠습니다, 고개 숙이고 눈물 조금 흘리는 것으로 되었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호등에 빨간 불이 들어왔는데 멈추지 않고 달린 죄, 빨간 불이 들어온 것을 보지 못한 죄, 빨간 불을 일부러 보지 않은 죄, 그래서 앞으로는 빨간 불에 서고, 파란 불에 달리겠다 다짐하고 약속하는 것, 그것이 ‘회개’가 아닙니다. 회개는 이제부터는 신호등에 빨간 불이 들어오면 멈추고, 파란 불이 들어오면 그때 가고, 좌회전 차선에 서 있어 좌회전 신호에 어쩔 수 없이 죄회전을 하겠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길, 새로운 길로 가는 것입니다. 갓길에 내 차를 버려두고, 내가 새로 가야할 길을 가는 것입니다. 한동안은 차 없이 걷기도 하고, 새 목적지, 새 행선지로 가는 차로 옮겨 타는 것입니다.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이 고백이 ‘회개’입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 말씀을 듣는 것이 ‘회개’입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나는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삼겠다.”

이 말씀을 따르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배로 옮겨 타는 것이 ‘회개’입니다. 이제는 물고기를 낚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겠다, 새 배로 옮겨 타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다른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기 전에 내가 그리스도 예수님의 그물, 사랑과 구원의 그물에 내가 먼저 잡혀 있는 것입니다. 그 그물에 걸려 주님의 배에 내가 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어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회개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2.        

“두려워하지 말고 나를 따라오너라. 이제 너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그러나 어렵습니다. 두렵습니다. 그러니 쉽게 따라나서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적거리며 연신 난 지금 바쁘다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는 정말 바쁩니다. 손질할 그물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배에는 수리하고 손 봐야할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닙니다. 물 때도 봐야 하고 바람의 방향과 세기도 봐야 합니다. 어디에 고기가 많은 지, 암초가 어디에 있는지 미리미리 확인해야 합니다. 그러니 시간이 없습니다.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주님, 준비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조금 기다려 주십시오. 아직 저에게는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조금만 더 참아 주십시오. 나중에, 나중에 따라가겠습니다. 지금은 시간도 없고, 할 일도 많고, 준비할 것도 정말 많습니다. 그러니 . . .”  




다시 장자의 소요유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매미와 비둘기가 그 큰 새를 보고 비웃습니다.

“우리는 한껏 날아올라도 기껏 느릅나무나 다목나무에 미치거나, 그것도 실패하는 때가 있는데, 어찌 9만 리를 솟구쳐올라 남녘으로 간다는 말인가!” 


장자가 말합니다. 

“가까운 들에 가는 사람은 하루 식량으로 넉넉하지만, 백 리 길을 가는 사람은 전날 밤에 곡식을 찧어야 하고, 천 리 길을 가는 사람은 석 달 전부터 식량을 준비해야 한다. 매미나 비둘기가 어찌 알겠는가! 작은 지혜에 안주하는 자는 큰 지혜를 추구하는 자를 알지 못하고, 짧게 사는 생명은 오래 사는 생명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라나서는 길은 하룻길도, 백 리 길도, 천 리 길도 아닙니다. 단지 큰 지혜와 오래 사는 생명을 바라고 가는 길이 아닙니다. ‘지혜’이신 주님,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을 따라가는 길입니다. 하늘 나라의 배로 옮겨 타고 하나님 나라로 가는 그 길은 하루 식량이면 되는 하룻길이 아닙니다. 전날 밤에 준비한 것으로 충분한 백 리 길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석 달 전부터 식량을 준비한다고 해서 갈 수 있는 천 리 길도 아닙니다. 우리의 온 생(生)이 걸리는 길입니다. 미리미리 계획하고 준비하고 그래서 모든 준비를 다 마친다고 해서 걸을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 이름을 거룩하게 하여 주시며, 그 나라를 오게 하여 주시며, 그 뜻을 하늘에서 이루심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주소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 . .”


주님을 따라나서는 그 길은 매일을 그 하루의 양식을 갖고, 그 하루의 길을 가는 길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룻길 신앙이 아니고, 일주일길을 가는 신앙도 아니고, 한 달 혹은 일 년을 걷고 끝내는 신앙도 아닙니다. 그날 그날을 꾸준히 주님을 따라 길을 걷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루 하루를 주님을 의지하며,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것, 그 길을 꾸준히 부단히 걷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매일이 새롭습니다.  


photo by noneunshinboo 


3.        

그리스도인에게 한 주의 시작은 일요일, 즉 주일입니다. 주일은 작은 부활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의 날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일요일로 한 주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주일 그 하루로 한 주의 나머지 6일을 걷는데 충분할까요? 주일 하루 그 몇 시간으로 나머지 6일을 곧고 사는데 혹시 부족함은 없을까요? 하루 하루가 지날수록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방전된 배터리로 우리는 며칠을 버티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배터리가 방전된 채로 한 달을, 일 년을 버티는 것은 아닐까요? 


물이 깊어야 큰 배도 띄울 수 있고, 날개를 펼 공간이 넓어야 큰 날개도 펼 수 있습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려 아무리 애를 써도 혼자는 못 가는 길도 있습니다. 좁은 우물에 큰 배는 띄울 수 없고, 좁은 방 안에 날개를 펴 봐야 천장이 코 앞이고, 혼자서 간다 해도 길도 모르고 무섭기도 하니 가다 서다, 또 가다 서다 할 뿐입니다. 


그래서 쉽게 지쳐가는 우리에게, 충분히 저장할 능력이 없는 우리에게, 그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주님의 공동체에게 성령께서 우리가 날마다 필요한 것을, 버틸 능력, 살아갈 힘을 주십니다. 기도와 말씀과 예배를 통해서입니다. 그 세가지를 통해서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배를 옮겨 타고 그 배의 노를 저으며 갈 수 있는 힘, 비바람과 풍랑을 버틸 수 있는 힘, 거기 하나님 나라까지 갈 힘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말씀이 사람의 몸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주님을 담기에 우리의 몸과 맘과 생각은 얕고 좁습니다. 우리의 얕은 물로는 그 크신 주님을, 그 큰 배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내가 살아오던 방식, 내가 고집하던 생각의 틀, 내가 움켜쥔 마음과 뜻으로는 그 큰 배를, 그 큰 새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내가 머물던 그 좁은 우물 벽에 써 놓은 몇 자의 성경 구절로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태초부터 계셨던 하나님의 살아 계신 말씀이고, 이 땅에 오신 그 빛과 생명이신 그 말씀을 어둔 우물 속에 담긴 작은 물은, 우물 그 안에서 올려보는 그 작은 하늘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루 몇 문장의 말씀으로 내일을 살고 모레를 살고 한 주일을 살기엔 부족합니다. 하루 드리는 기도로도 부족합니다. 주일에 드리는 예배로도 부족합니다. 나머지 6일을, 한 달을, 그리고 일 년을 살기엔 부족합니다. 주님이 작아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작아 그렇습니다. 주님을 그리고 말씀을 담는 나의 그릇이 너무 작아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듭 주님께 기도하고, 거듭 주님의 말씀을 듣고, 거듭 주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나의 안을 조금 더 넓히고, 나의 날개를 조금 더 넓게 펴고, 내 안을 조금 더 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야 내 안에 주님의 배가 뜰 수 있고, 그래야 주님께서 내 안에서 날개를 펴실 수 있고, 그래야 주님께서 내 안을 성전 삼아 계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룻길도, 천 리 길도, 만 리 길도 아닌 하나님 나라로 가는 길을 방전된 배터리로는 끝까지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길은 하루 하루 충전하며 걷는 길입니다. 매일을 기도하며, 말씀을 읽고 듣고, 그리고 예배하며 걷는 길입니다. 


(7-3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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