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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회사이 Feb 16. 2023

‘행복’을 주제로 한
여덟 개의 변주곡(變奏曲)

마태복음서, 길 위에서 길을 가르치는 예수 (8-1)

함께 읽고 걷는 더 드라마, 예수의 길 떠난 가족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실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비롭게 대하실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너희보다 먼저 온 예언자들도 이와 같이 박해를 받았다.” (마태복음서 5:3-12)


The Ancient Theatre of Delphi


1.        

모짜르트의 ’반짝반짝 작은 별’을 주제로 한 변주곡이 있습니다. 보통 동요로 알고 있는 이 음악의 원래의 제목은, ‘아, 어머니께 고백합니다’ 혹은 ‘아, 어머니 들어 주세요’를 주제로 한 12개의 변주곡이라고 합니다. 한 소녀가 어머니에게 지금 난 어떤 남자에게 반했다고, 그래서 너무 아프다고 고백하는 내용의 프랑스 민요를 모짜르트가 12개의 변주를 붙여 작곡한 곡이라고 합니다. 


‘변주곡’은 ‘어떤 주제를 설정하고, 그것을 여러 가지로 변형하는 기법을 ‘변주(變奏)’라고 하며, 주제와 몇 개의 변주로 이루어지는 곡’을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변주곡’은 ‘짤막한 주제를 바탕으로 리듬, 멜로디, 화성 등을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정의하며, 그래서 ‘변주’의 본질은 곧 ‘변화’라 할 수 있다’ 라고 합니다. 즉 어떤 한 주제가 있고, 그 주제를 이렇게 저렇게 변화를 준 곡이 바로 변주곡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마태복음서 5:3-12, ‘여덟 가지 복’, 혹은 ‘복이 있는 사람’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산상 설교, 혹은 산상 수훈의 첫 시작입니다. 일종의 그리스도 예수께서 작곡하시고 직접 연주하여 들려주신 ‘행복’을 주제로 한 여덟 개의 변주곡, 행복의 변주, 즉 ‘예수 그리스도의 행복 변주곡’입니다. 


2.        

사실 팔복, 즉 여덟 가지의 복, 그리고 복이 있는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그리스도인들은 많이 듣고 읽어 익숙하고 그래서 오히려 감흥이 많이 사라진 말씀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진정한 복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말씀하신 복음의 진수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참 모습이다, 나는 이 말씀에 위로와 위안을 얻는다, 궁극적인 희망의 말씀이다, 약속된 미래 혹은 천국에 대한 약속의 말씀이다, . . .  


그런데 정말 이 여덟 가지의 복을 정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참 복이라고 믿을까요? 정말 이 여덟 가지의 상황과 처지에 있는 사람, 여기 일종의 행복의 조건 중에 하나라도 갖춘 사람을 우리는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여길까요? 그런데 만일 그게 ‘나’라면, 정말 나는 나를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정말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까요? 남 얘기하기 좋아하고, 남 얘기 쉽게 하는 우리입니다. 


그런데 지금 주님께서 가르치신 이 말씀이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 말씀을 사는 사람이 나의 제자,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다 하시는데. 그런데 남에게 하신 것이 아니라, 남 얘기가 아니라, 남 일이 아니라, 직접 나에게 하신 말씀이라면, 나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 여덟 가지를 복을 정말 나의 복이라고 고백할 수 있을까요? ‘나는 참으로 복이 있는 사람이다’ 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3.        

여덟 가지 복에 대한 주님의 말씀을 누가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너희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너희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너희가 배부르게 될 것이다. 너희 지금 슬피 우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고, 인자 때문에 너희를 배척하고, 욕하고, 너희의 이름을 악하다고 내칠 때에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아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다. 그들의 조상들이 예언자들에게 이와 같이 행하였다.’” (눅 6:20-23)


마음, 생각, 그리고 영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는 마태복음서의 말씀과는 다르게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을 빼고는 마태복음서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 불편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이러이러한 사람은 복이 있다.”

“‘아멘!”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그러나 너희, 부요한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너희의 위안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굶주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 지금 웃는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슬퍼하며 울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할 때에, 너희는 화가 있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예언자들에게 이와 같이 행하였다.” (눅 6:24-26)


“이러이러한 사람은 화가 있다.”

“아멘, . . . ?”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는 말씀은 좋았는데, 부요한 사람, 부자인 사람은 화가 있다 하시니, 사실 불편합니다. 지금 배가 부른데 조만간 굶주리게 될 것이고, 지금 너무 좋아 이렇게 웃고 있는데 머지않아 슬퍼 울게 될 것이고, 사람들이 다 나를 좋게 말하는데 그게 그리 좋아할 일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럼 도대체 무엇이 행이고 불행일까요? 누가 복이 있는 사람이고 누가 화가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일까요? 


photo by noneunshinboo 


4.        

“. . .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 . .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 . .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 .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 . .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 . .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 . .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 . .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 . .” (마태복음 5:1-12)


궁금합니다. 정말 어디에 이런 사람이 없을까요? ‘그래 이게 바로 복이야. 나는 정말 복이 있는 사람이야,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야’ 하며 정말 이 모든 것을 복으로 알고, 믿고, 그리고 그 모든 복을 실제로 충실히 살았던 사람 혹은 지금도 사는 사람이 어디 없을까요?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 복을 정말 사는 사람을 내 눈으로 직접 본다면 한결 이 말씀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텐데. 내가 직접 만날 수만 있다면 어렵지만 이 말씀을 따를 수도 있을 텐데. 


있습니다 그런 사람. 몸과 마음과 영이 가난했고, 너무 아팠고 슬펐고, 겸손했고 온유했으며,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말라 정말 죽을 것 같았고, 자비롭고 또 자비로웠으며, 마음이 정말 수정처럼 맑고 깨끗했으며, 평화를 이루느라 죽기까지 했고,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온갖 박해와 고난과 고통을 온 몸으로 다 받아야 했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비워 가장 낮은 자로, 가장 낮은 자리로 왔고, 그러나 그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섬기는 종으로 하인으로 살았으며, 죄인들과 어울렸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죄인들 사이에서 한 죄인으로 죽음을 맞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더 이상 가난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가야했던 그 한 사람, 십자가 위 거기에서 가시관을 쓰고서도 우리에게 위로를 건네셨던 그리스도 예수십니다. 


(→ 8-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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