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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회사이 Feb 17. 2023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서, 길 위에서 길을 가르치는 예수 (8-2)

함께 읽고 걷는 더 드라마, 예수의 길 떠난 가족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실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비롭게 대하실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복음서 5:3-10)


photo by noneunshinboo 


1.        

그 모든 여덟 가지의 복을 누렸고, 그 복을 살았던 그리스도 예수. 

그래서 . . . 


몸과 마음과 영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그것도 가장 낮고 비천하고 가난한 사람으로 오셨고, 또한 그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가난한 사람으로 가난한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통해 그 모든 가난한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떠나 있었습니다’ 죄인들이 고백 속에, 회개 속에 슬퍼할 때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그들과 함께 슬퍼하셨기 때문입니다. 고백이 없고 회개가 없는 죄인들을 또한 슬퍼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 슬퍼하시는 아들 예수님과 함께 또한 슬퍼하셨고, 예수님을,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위로하셨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으로, 이 땅의 낮고 낮은 곳으로, 낮고 낮은 자로, 우리 가운데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높이셨고, 그래서 우리가 이 땅뿐만 아니라 하늘 나라를 주님과 함께 차지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나님의 의를 위해,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 그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기 위해, 우리가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자녀로 아버지 하나님의 식탁에 앉아 함께 먹고 마시고 노는 그 배부른 관계가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 그 사랑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의 자비를 우리에게 베푸셨고, 우리에게 아버지의 용서를 하셨고, 또한 우리를 영원히 주님의 자비로 감싸 안으셨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우리를 찾아오셨고, 그래서 그 아들 예수님을 본 사람이면 그 아버지 하나님을 본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우리의 주님으로 믿는 사람이면 하나님의 성전에서 들어가 거기 사는 사람이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평화의 왕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주님의 날개, 그 그늘 아래에 평화롭고 자유롭게 머물러 있게 하셨고, 또한 우리를 하나님의 평화를 살고 그 평화를 일구고 그 평화를 지키는 평화의 자녀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을 믿는다고, 주님을 따른다고, 그리고 주님을 살아간다고 해서 우리가 받는 그 모든 고통과 고난과 박해를 이미 그 주님께서는 우리보다 앞서 다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그때 그 아들 예수님 안에, 곁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님뿐만 아니라 우리 역시 하늘 나라의 주인이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한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이 복이 있는 이유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바로 몸이 가난하고, 마음이 가난하고, 생각이 가난하고, 뜻과 의지가 가난하고, 그래서 삶이 가난하고, 그리고 영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는 이유가 되셨습니다. 주님을 보지 않고는 이 가르침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바로 그 여덟 가지 복의 근거이시고 복이 있는 사람의 이유이시기 때문입니다. 




2.        

그러나 우리에게는 여전히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남아 있습니다. 


“너희, 부요한 사람들은 화가 있다. . . .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은 화가 있다. . . . 너희, 지금 웃는 사람들은 화가 있다. . . .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할 때에, 너희는 화가 있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예언자들에게 이와 같이 행하였다.” (눅 6:24-26)


그리고 여기, 한 시인이 들려주는 행복을 주제로 한 또 다른 변주곡이 있습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고, 그래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다짐을 했던, 시인 윤동주가 들려주는 ‘팔복’입니다. 


팔복(八福)

 – 마태복음 5장 3~12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이보다 더 가난하고 아프고 슬픈 ‘팔복’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한 줄 한 줄을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며 얼마나 힘겹게 시인은 이 시를 썼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왜 윤동주 시인은 예수님의 그 여덟 가지 복, 그 행복을 이렇게 변주했을까요? 


사실 기독교 신앙을 어떤 누구보다 열심히 그리고 절절히 살았던 시인 윤동주입니다. 세상의 악과 죄, 그리고 그 속에 허덕이고 신음하는 사람들을 보고 아파하고 슬퍼했던 예수,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따랐고 순종했고,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았고, 그리고 부활해서 아버지의 품에 안겨 있는 ‘행복한 예수’, 그 예수를 꿈꾸었던 시인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시를 썼을까요? 그때 그 예수님처럼 나를 우리를 세상을 아파하고 슬퍼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너무 슬퍼서 그랬을까요? 


photo by noneunshinboo 


3.        

예수님의 ‘행복 변주곡’과 윤동주 시인 나름대로 변주한 ‘팔복’을 다시 변주해 봅니다. *


슬픈 시대, 이러저러한 이유로 슬플 수밖에 없는 사람들과 함께 슬퍼하지 못하는 나를 슬퍼하지 않으니 이것을 복이라 할 수 없고. . .


늑대처럼 사납고 뱀처럼 교활한 시대, 양처럼 온화하고 비둘기처럼 겸손한 사람으로 살지 못하는 나를 슬퍼하지 않으니 이것을 복이라 할 수 없고. . .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정의를 찾을 수 없는 시대, 그 말씀과 정의에 배고프고 목마른 사람이 되지 못한 나를 슬퍼하지 않으니 이것을 복이라 할 수 없고. . .


자비 없는 시대, 이리 치이고 저리 몰린 불쌍하고 가여운 사람들을 못 본 척 선행과 자비 없는 나를 슬퍼하지 않으니 이것을 복이라 할 수 없고. . .


정직함이 없고 진실이 외면 받는 시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끗한 마음을 품고 옳은 행실과 말을 하는 사람들 중의 한 명이 되지 못하는 나를 슬퍼하지 않으니 이것을 복이라 할 수 없고. . .


평화는 사전에나 있어, 여전히 전쟁 중인 시대, 사랑과 정의가 있는 그리스도의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지 못하는 나를 슬퍼하지 않으니 이것을 복이라 할 수 없고. . .


하나님의 의(義)는 나의 관심에서 멀고, 예수님과의 의리는 고사하고 사람과의 의리도 지키지 못하고, 의의 길에서 점점 멀어지는 나를 슬퍼하지 않으니 이것을 복이라 할 수 없고. . .


이래저래 가난한 시대, 몸과 마음과 정신과 생각과 영과 삶이 가난한 사람들의 곁이 싫고 부담스럽고 꺼려지는 나, 멀찍이 떨어져 있고 싶고 그래서 떨어져 있는 나, 그런데 사실은 내가 저들보다 어쩌면 더 가난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척하는 나를 도무지 슬퍼하지 않으니 이것을 복이라 할 수 없고. . .


그래서, 지금 그런 나를 너무 슬퍼하시는 예수님, 그 곁에서 나는 슬퍼하지 않는 채로 있고, 그러다 때가 너무 늦어버리면, 그때 너무 늦게 슬퍼지면 난 어쩌지 싶은 생각에, 이제야 비로소 조금 슬퍼지는 나는 그럼 복이 있는 사람일까? . . . 


(→ 8-3에서 계속)


* 2021년 노는(遊)신부의 대림절 묵상 ‘함께 걷는 기다림’ 중에서 마태복음서 5장 묵상 글, ‘슬픈 희망, 슬픈 예수’를 조금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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