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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회사이 Feb 18. 2023

무대에 선 복이 있는 사람

마태복음서, 길 위에서 길을 가르치는 예수 (8-3)

함께 읽고 걷는 더 드라마, 예수의 길 떠난 가족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실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비롭게 대하실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너희보다 먼저 온 예언자들도 이와 같이 박해를 받았다.” (마태복음서 5:3-12)


photo by noneunshinboo 


1.        

그러니, 너무 늦지 않게 나를, 우리를, 세상을 슬퍼할 수 있는 것이 주님께서 주신 복입니다. 나와 우리와 세상을 슬퍼하시고, 그 슬퍼하는 나와 우리와 세상, 그러나 그 밖이 아닌 그 안으로 오셔서, 나와 우리와 함께 슬퍼하시는 주님께서 계시니 그것이 복입니다. 


그러나, 그런 주님과 함께 있어, 함께 슬퍼하지 않는다면 그건 복이 아닙니다. 내가 아프다고 의사가 나를 찾아 먼 길을 왔는데, ‘나는 아프지 않아요, 당신이 필요 없어요’ 거부한다면 그건 복이 아닙니다. 아픈 것을 모른다면 그건 복이 될 수는 없습니다. 


분명 슬픈 일인데 슬퍼하지 않으면, 눈물을 닦아주겠다고 손수건 들고 내 곁에 앉으셨는데, ‘난 슬프지 않아요’ 손사래 친다면 분명 그건 복이 아닙니다. ‘나에겐 흘릴 눈물이 없습니다’ 맨 얼굴로 있다면 그건 복이 될 수 없습니다. 


2.        

하루에도 열두 번 ‘행과 불행’의 롤러코스터를 탑니다. 그만 롤러코스터에서 내릴 때도 되었는데, 어느새 그것도 타는 맛이라면 맛인지라, 그만 그 맛이 들려 도무지 내릴 생각을 못합니다. 


꽃잎을 한 장씩 따면서 중얼거립니다. 

‘그는 나를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 . . ‘그녀는 나에게 온다, 오지 않는다’, . . . ‘나는 행복하다, 아니 불행하다’, . . . ‘나는 복이 있다, 아니 없다’, . . . ‘하나님은 나에게 계신다, 안 계신다’, . . . ‘주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아니다’ . . . ‘주님은 나를 버리셨다, 아니다’ . . . 


그렇게 애꿎은 꽃만 못살게 굴며 길을 가다 보면, 내 손에 뜯긴 꽃잎들이 길 바닥을 덮을 것입니다. 마치 내가 꽃 길을 걷는 듯 보일 수도 있습니다. . . . 그러나, 바람 한 번이면 죄다 날려가 다시 흙먼지만 일 뿐입니다. 줄곧 길을 걸으며 길 가에 핀 꽃잎을 따는 삶이면, 그 꽃잎의 개수에 맞춰 내가 그리고 내 삶이 오르락내리락한다면 정말 슬플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주님을 믿고 따르고 또한 그 길을 가고 있다면, 그리고 혹시 오늘 그렇게 살겠다 작심을 했다면, 이미 우리는 복이 있는 사람,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는 일이 한결같고, 항상 좋은 일만 있어야 웃을 수 있고, 나에겐 모든 것이 만족스럽고 부족한 것이 없어서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과 모든 일이 내 맘대로 내 뜻대로 되고, 또 죄다 이루어지니, 그때 비로소 ‘내가 복이 있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시고, 주님께서 나를 아시고, 그리고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복입니다. 지금 주님 안에 내가 있는 것이 복이고, 내 안에 주님께서 계신 것이 복입니다. 내가 주님을 믿는 것이 복이고, 내가 그 믿음을 사는 것이 복입니다. 그래서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내 집에 쌀 아흔아홉 가마가 있지만 나에게 그 하나가 부족해 내가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겨우 쌀 한 가마 있어 그 아흔아홉 가마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 어쩔 수 없이 내 눈이 자꾸 가는 내가 그래서 초라하고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나의 하늘 창고가 쌀로 가득한 것을 내가 모르는 것이 불행이고, 그래서 그걸 늦기 전에 내가 깨닫는 것이 행복입니다. 그래서 아흔아홉을 갖고 있던, 하나를 갖고 있던, 나 보다 가난하고 슬프고 아프고 상하고 힘겹고 고단하고 어딘가에 갇히고 눌리고 그래서 외롭고 쓸쓸한 사람, 쌀 한 가마 겨우 있는 사람, 그것 마저도 없는 누군가와 함께 내 것을 나누는 것이 행복입니다. 그나마 나는 누구와 나눌 그 무엇이 아예 없다, 그 무엇이 정말 없다, 그런데 그것이 있는 어떤 사람이 나와 나누겠다고 나를 찾아오는 것, 그래서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이 행복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 역시 주님께서 들려주신 또 하나의 ‘행복 변주곡’입니다. 


“그 때에 임금은 자기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창세 때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어 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할 것이다. . . . 임금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할 것이다.” (마태복음서 25:34-36, 40) 


마음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한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 그리고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만이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 가난한 사람 곁에 내가 함께 있어, 그 가난함을 함께 나누는 것이 복이고, 그 나누는 사람이 또한 복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거기 그 몸도 마음도 삶도 그리고 영도 가난한 사람들, 그들 곁에 그리스도께서 그들 중의 한 사람으로 계십니다. 그리고 거기 그들 중의 한 명으로 계신 그리스도 주님 곁에 또한 내가 있어, 그들의 슬픔과 아픔을 내가 함께 나눕니다. 그리고 거기에 하늘 나라, 하나님 나라는 이미 와 있습니다. 그러니 나는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3.        

여기 또 한 사람이 변주해서 들려주는 ‘행복 변주곡’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행복한 사람으로서, 복이 있는 사람으로서 이런 삶을 살아야 한다고, 신앙의 선배이며 신앙의 영웅인 사도 바울이 들려주는 또 하나의 ‘행복 변주곡’입니다. 


“소망을 품고 즐거워하며, 환난을 당할 때에 참으며, 기도를 꾸준히 하십시오. 성도들이 쓸 것을 공급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십시오.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시오. 축복을 하고, 저주를 하지 마십시오.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 서로 한 마음이 되고,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사귀고, 스스로 지혜가 있는 체하지 마십시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려고 애쓰십시오.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십시오.” (로마서 12:12-18)


The Dance Class (La Classe de Danse), Edgar Degas, 1873-1876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작곡하시고 또한 직접 들려주시는 ‘행복’을 주제로 한 여덟 개의 변주곡(變奏曲)을 들었습니다. 주님께서 연주하신 ‘행복 변주곡’의 앵콜 곡도 하나 들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변주곡도 들었고, 윤동주 시인의 변주곡도 들었습니다. 


이젠 우리가 연주할 차례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 주님의 행복 변주곡을 일상으로 연주하고, 삶으로 살아야 합니다. ‘복이 있는 사람’으로 우리의 이웃에게 그 여덟 가지 복을 연주해서 들려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관객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이신 주님의 거룩한 무대 위에 오른 한 명의 배우이고 한 명의 연주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금 관객이 되셔서 우리를 지켜보십니다. 


이제 우리는 어떤 음악을 들려주고, 어떤 연기를 보여주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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