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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회사이 Nov 20. 2021

길 위에 선 마리아

노는(遊)신부의 더 드라마, 길 잃은 양을 찾아 길 떠난 예수 (2)


The Annunciation (Russian, early twelfth century, Tretyakov Gallery, Moscow)


“기뻐하여라, 은혜를 입은 자야, 주님께서 그대와 함께 하신다. . . . 두려워하지 말아라. 마리아야, 그대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보아라, 그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는 위대하게 되고, 더없이 높으신 분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 . 성령이 그대에게 임하시고, 더없이 높으신 분의 능력이 그대를 감싸 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한 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 . .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 . .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누가복음 1:28-38, 새번역)


“기뻐하여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자여! 너는 이제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그 아기의 이름은 예수다.” 

어떻게 기뻐할 수 있을까? 무슨 재간으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정말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냥 ‘놀랍다’라는 차원이 아니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마리아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아니, 이해할 수 있다 없다의 문제가 아니다. 뭔가 잘못됐다. 그럴 순 없다. 그래 뭔가 실수가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분명한 것은 이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마리아가 그 누구보다 그걸 잘 안다.  


“이 몸은 처녀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34절, 공동번역)

놀랍다는 반응을 넘어선 마리아 나름의 작은 그러나 확실하고 적극적인 저항이고 반항이고 항의다. 그냥 여기서 확실한 마침표를 찍겠다는 의도일까? 불·가·능. 그건 나에게 ‘있을 수 없는 일’. 

그러나, 

“성령이 그대에게 임하시고, 더없이 높으신 분의 능력이 그대를 감싸 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한 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아니, 그게 아니라 마리아는 아직 . . . 

그리고, 

“성령이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주실 것이다. . .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자라고들 하였지만, 그 늙은 나이에도 아기를 가진 지가 벌써 여섯 달이나 되었다.” (35-36절)




그럴 수 있다, 영 불가능할 일만은 아니다. 이스라엘의 어머니 사라에게서 이삭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한나가 어떻게 위대한 선지자 사무엘의 어머니 되었는지 마리아는 어려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나도 그런 위대한 어머니가 되고 싶다, 그런 생각은 이스라엘의 딸이라면 누구나 다 한 번쯤은 한다. 그런데 그게 실제로 나한테 일어난다면 그건 또 다른 얘기다. 엘리사벳? 그래, 엘리사벳은 그럴 수 있다. 정말 잘 된 일이다. 

하지만, 난 아니다. 난 다르다. 그럴 수 없다. 그들은 모두 결혼했고 남편도 있다. 그리고 그들은 아기만 갖질 못했을 뿐 언제든지 엄마가 될 준비가 되어 있던, 그리고 아기를 그 누구보다 간절히 원했던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은총은 그런 것이다. 그리고 그래야 한다.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 정말 원하는 사람에게 그 원하는 것이 주어지는 것, 정말 필요한 사람에게 그 필요한 것이 주어지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하나님의 은총은 당연히 그래야 한다. 하지만, 난 마리아다. 난 그들이 아니다. 나에겐 이건 선물일 수도 은총일 수도 그렇다고 기적일 수도 없고 기적이어서도 안된다.  


사라도 아니고 한나도 아니고 그렇다고 엘리사벳도 아닌 여기 마리아는 그냥 마리아일 뿐이다. 작은 시골 변두리, 이제 막 소녀 티를 벗었을까, 겨우 얼마 전에 약혼을 한 마리아가 지금 당장 아기를 가질 이유는 없다. 설마 아무리 철이 없기로서니 엄마가 너무 되고 싶으니 결혼 전이라도 좋으니 제발 아기를 갖게 해 달라고 기도 했을까? 아니, 누가 그런 기도를 할까? 누가 그런 일을 꿈에라도 상상이나 할까? 그래, 내가 아닐 것이다. 지금 천사가 주소를 잘못 알고 온 것일 수 있다. 사람을 잘못 봤을 수도 있다. 그리고 천사도 실수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아무튼 난 아니다. 난 그들과 다르다. 


“그래 마리아 넌 다르다. 넌 그들과 다르다, 그리고 특별하다. 그러나 또한 너도 그들과 다르지 않다. 하나님께 불가능한 일은 없다.”

천사는 더는 말이 없다. 마리아의 차례다. 무슨 말을 할까? 생각할 시간을 조금 달라고, 이유는 알아야 할 것 아니냐고, 하다못해 결혼식이라도 정식으로 치루고 난 후에 보면 어떻게 안되겠냐고 그렇게 말할까? 아니면, 아예 난 그럴 수 없다고, 그런 일이 절대로 나에게 일어나선 안 된다고 할까? 


photo by noneunshinboo


그런데, . . . 

“여기 주님의 종이오니, 지금 말씀하신 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끝이 나는 것일까? 정말 이렇게 끝이 나도 되는 것일까? 천사가 전해준 말 보다 마리아의 ‘네’ 라는 말이 사실 더 황당하고 또 놀랍다. 하늘이 두쪽으로 쪼개지고, 태양이 그 빛을 잃고, 땅이 흔들리고, 세상이 온통 어둠으로 뒤덮일 그녀의 ‘네’ 라는 것을 지금 마리아는 알까? (마 27:51-52, 눅 24:44-45) 그녀의 삶 뿐만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의 삶을 완전히 뒤바꿀 정말 엄청난 ‘순간’이라는 것을 마리아는 알았을까? ‘네’라고 하는 그 순간 새로운 창조가 그녀 안에서 시작되고 있음을, 그녀를 통해 새로운 세상이 태어날 것이라는 것을 마리아는 알고 있었을까? 알았다면 그리 쉽게 ‘네’ 라고 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설사 그녀가 알았다고 한들 그렇게 쉽게 ‘네’라고 할 수 있는 일일까 그것이? 만약 뭔지도 모르면서 ‘네’라고 했다면 그것은 철이 있고 없고가 아닌 너무 무모하고 무책임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게 도대체 무슨 뜻인지, 그래서 구체적으로 뭐가 어떻게 된다는 것인지, 그리고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 그럼 자신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자신보다 더 황당해 하고 당황할 요셉에겐 뭐라고 말해야 하는지, 그럼 요셉과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것인지, 혹시나 아니 당연히 부모님이나 동네 사람들이 물어볼 텐데 그럼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지, 정말 ‘그 아기’가 천사의 말대로 그런 분이 되기는 하는 건지, 그리고 그게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며 그럼 ‘그 아기’는 누구라는 건지, . . . 도대체 뭐하나 제대로 묻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자세한 설명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저 놀랍고 당황스럽고 두렵고, 더군다나 마리아에게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그래서 이해할 수도 없고 당연히 모를 수 밖에 없는 일인데, 그런데 어떻게 마리아는 “그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라고 할 수 있을까? 손에 쥔 것도 없고 눈에 보이는 것 역시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라고 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의 종 마리아, 주님께 ‘순종’하는 종 마리아, . . . ‘복종’ ‘순종’이라는 그 단어 하나로 이 장면을 이 사건을 다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런 마리아를 온전히 이해할 수 일을까? 

아니면, 이 장면을 읽는 오늘 우리가 오히려 남 얘기라고, 남 일이라고, 옛날 얘기라고 너무 쉽게 보고 너무 만만하게 읽는 것은 아닐까? 만약 내 일, 내 얘기, 내 가족의 얘기라면 이 상황에서 과연 나는 그리고 우리는 천사의 그 말에 ‘네’라고 대답할 수 있었을까?




사실 우리는 우리가 내뱉는 ‘네’ 라는 말의 무게가 실제로는 생각보다 훨씬 무겁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지금 여기 어린 소녀 마리아가 감당하기엔 천사가 전한 말이 너무 크고 무겁고 너무 버겁다는 것도 안다. 앞으로 가면 갈수록 마리아가 감내해야 할 그 ‘네’의 무게, 그녀를 더욱 외롭고 힘겹고 훨씬 슬프고 아프게 할 그 ‘네’의 크기를 우리는 너무도 잘 안다 (눅 2:34-35). 하지만 마리아의 그  ‘네’가 ‘한처음 어둠이 깊은 물 위에 뒤덮여 있었던 그때, 그 물 위를 휘돌았던 그 하나님의 창조의 영’이 이제 여기 마리아 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안에서 하실 새로운 창조의 ‘네’가 될 것이라는 것 또한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창 1:1-2). 

하나님이 장차 마리아를 통해 하실 일은 ‘네’라고 대답한 마리아 자신, 그리고 오늘 우리 모두 – 마리아와 달리 우리는 그녀와 그 아기가 장차 어떻게 될 것이지 이미 읽었고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 의 이해와 능력, 그리고 기대와 상상을 넘어선다. 그것은 우리의 존재를 넘어서는, 우리가 깨닫고 알고 이해하기에는 우리 훨씬 너머의 너무나 신기한 일 (욥 42:2-3), 그래서 신비라고 밖에 할 수 없다. 그리고 마리아는 그 신비 앞에, 그 길 위에 선다.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지금 마리아는 믿음의 길, 믿음으로 가는 그 길을 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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