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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회사이 Nov 22. 2021

길 떠나는 마리아

노는(遊)신부의 더 드라마, 길 잃은 양을 찾아 길 떠난 예수 (3)


길 떠나는 마리아 Mary on the Way by Sr. Maria van Galen, the Franciscan Missionaries of Mary, 768x1126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누가복음 1:38, 새번역)


믿음, 믿음의 길, 믿음으로 가는 길, 그 길 위에 선 마리아. 


무엇에 대한 확신이 있어서 가는 길이 아니라 누구에 대한 믿음으로 가는 길이다. 무엇을 확신하기 때문에 떠나는 길이 아닌 누구를 믿기 때문에 떠나는 길이다. 나는 이 길을 가는 것이 전혀 두렵지 않다, 나에게는 두려움 따위는 없다, 하며 호기롭게 가는 길이 아니다. ‘있는’ 두려움 ‘없다’ 척 하며 가는 길도 아니다. 그 오는 두려움 애쓰며 피하려고도 억지로 뛰어넘으려고도 목숨걸고 맞서 싸워 이기려고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두려움과 함께 이 길을 가겠다는 결심이고 작심이다. ‘나와 늘 함께 하시는 하나님’,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가는 길이다. 그리고 두렵고 무서운 여기 작은 마리아로 하여금 그리고 오늘 우리로 하여금 그 ‘네’의 길을 걷게 하는 것은 바로 믿음이다. 


믿음이란 무엇일까? 믿음으로 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믿음의 길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작은 나로서는 도저히 답을 알 수 없고, 답이란 게 정말 있기나 할까 싶고, 이게 답일 수 있을까 싶고, 그야말로 도대체가 답 없는 그래서 포기하고 싶고 포기할 수 밖에 없고 포기한 그 때 거기 나와 지금까지 항상 함께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또 앞으로도 계실 한 분. 그 답 오직 그 분이 아시고, 그 분이 그 답 갖고 계시고, 또 그 답이 되시는 한 분. 내가 다 알 수 없고 모두 이해할 수 없고 그 하실 일들과 그 뜻을 전부 깨달았다 할 수 없는 한 분. 내 안에 그 흔적이나마 조금 감히 담겠다 할 수 없는 나보다 더 나를 아시고 사랑하시고 또한 지키시고 이끄시며 함께 하실 영원한 나의 한 분. “그 한 분이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나도 모르게 나의 깊은 곳에서부터 들려오는 고백, 남의 목소리가 아닌 나의 목소리로 듣는 고백, 그것을 믿음이라 하지 않을까? 


나로서 감당하기 어렵고 버겁고 힘겨워 무엇을 상상도 기대도 예상도 할 수 없고, 하지도 못하고, 하고 싶지도 않은 그때. 그래 내 눈으로 차마 볼 수도 없고, 감히 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저 멀리로 고개 돌리고 싶은 그때. 너무 크고 넓고 높아 그래서 어디나 계시다 하지만, 오히려 나에겐 불러도 찾아도 기다려도 대답 없는 메아리로만 계시는 듯 한 그때. 그러나, “그래, 그 분 믿고 가자, 한 번 끝까지 가보자” 할 그때, 이것을 우리는 믿음으로 간다 할 수 있지 않을까? 


내일의 ‘나’가 구체적으로 그리고 확실히 어떨 것이고, 어디에 있을 것이고, 누구가 될 것이고, 무엇을 할 것이고, 무엇을 갖고 있을 것이라는, 여기의 내가 바라고 원하는 그 내일의 나에 대한 어떤 확신 혹은 확실함으로 가는 길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지금 내가 가는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그리고 이 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계시고, 지금 함께 걸으시고 또한 그 길 끝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신 그 하나님을 신뢰하며 갈 때 우리는 그 길을 믿음의 길, 믿음으로 따르는 길, 믿음으로 떠나는 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바다를 본 사람만이 지금 눈 앞에 보는 이 시냇물이, 이 강물이 어디로 향해 흐르는지 안다. 산 꼭대기에 오른 사람만이 지금 걷는 이 구불구불 길이 어디로 나 있는지 안다. 지금 눈 앞에 보이는 작은 물길, 지금 내가 걷는 좁은 산길이 어딘가로는 이어지겠지 막연히 가는 길이 아니다.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꽤 큰 호수와 넓은 강, 그리고 제법 몇 개의 봉우리를 그럴 듯이 거느린 상당한 높이의 언덕이 전부라 알고 그렇게 믿는 이들의 말을 곧이듣고 가는 길도 아니다. 오직 그 바다를 본 사람, 그 산을 오른 사람을 신뢰하며 떠나는 길, 그 길이 믿음의 길이다. 

그 바다와 그 산을 만드신 하나님, 그리고 우리에게 바다와 산이 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이제 우리를 위해, 우리를 그 깊고 넓은 바다와 그 높고 큰 산으로 난 물길과 산길 이 되시기 위해, 생명의 길이 되시기 위해, 여기 마리아를, 그리고 마리아를 통해 우리를 찾아오셨다. 


photo by noneunshinboo


그리고 마리아는 지금 그 새 바다, 그 새 산을 향해 가기로 결정했다. 마리아는 그 바다에 대해, 그 산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런 바다가, 그런 산으로 난 길이 있다는 얘기도 들어보지 못했다. 마리아는 그러나 결정했다, 하나님을 신뢰하기로 했다. 없는 바다도, 없던 산도 있게 하시고, 어제도 보았고 오늘도 보고 있는 저 바다도 저 산도 내일 없게 하시는 그 하나님을 신뢰하기로 작정했다. 그 하나님은 마리아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그리고 모든 생명들의 하나님이다. 


내가 갖고 있던 ‘자’로 재어 보기엔 내 ‘자’가 너무 작고, 내 깜냥으로 감당하고 가늠하기에는 너무 크신 하나님. 그 말씀 받아 들기엔 너무 무겁지만, 같이 들어주겠다 하시기에, 그 말씀 받아먹기엔 너무 쓰지만, 내 입엔 써도 내 안에서는 달다 하시기에, 그냥 “네” 하고 받아 들고, 받아 삼킨다. 혼자 가기엔 너무 멀고, 홀로 걷기엔 너무 험하고 또 외롭다. 하지만 옆에 같이 간다 하시기에, 밀고 끌고 업고 안고 가겠다 하시기에, 그 말씀 따라 길을 나선다. 그 길, 걷다 때로 뒤 돌아보며, “그 때 내가 왜 그랬을까. . . ” 후회도 할 것이고, “내가 미쳤지, 왜 따라 나선다고 이리 생고생을. . . ” 하며, 눈물도 있어 멈칫 할 것이다. 또 때로 뒤로 몇 걸음 딛기도 할 것이다. 

그럴때, “힘들지? 힘든 거 안다. 나도 그랬다. 그래도 우리 마저 가자, 곧 거기다. 다 와 간다” 하시는, 나 앞서 가신, 그리고 이제 내 옆에 같이 가시는 한 분. 그 분 실망 크실까 나도 나름 의리 지킨다 하며 가다 보면 어느새 거기에 가 있는 나 볼까 싶어 끝까지 가자 하며 가는 길. 믿음의 길은 그런 길 아닐까? 그렇게 감당 못할 무모한 “네” 하며 따라 나선 길 아닐까? 




그 길, 우리 무슨 그리 대단한 확실함을 손에 쥐고 보란 듯 흔들며 담보 삼아 갈까?  그 길, 나의 멋대로의 확신, 뭐 그리 큰 믿음이나 되는 냥 당당한 척 내 믿음에 대한 깐깐한 확신 속에, 한 손엔 생일 케이크, 다른 손엔 꽃 들고, 가슴팍 넣어 둔 다이아반지에, 흥얼흥얼 콧노래 부르며, 님 만나러 꽃 길 뛰는 듯 춤추며, 구름 위 나는 듯 가는 길일까? 그 길, 오히려 꽃 길로 알고 속은 듯 가는, 가시 제법 보이고 또 숨어 있는 길, 눈에 보이는 돋친 가시 피하기도 꺾기도 찔리기도 하며, 꽃 길이겠거니 걷는 길 아닐까? 꽃이 나고, 그 꽃이 떨어지고, 그래 그 생채기에 열매 맺으며 걷는 길. 아픈 만큼만이라도 성숙해지기를 소망하며 걷는 길.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아픔 보다 훨씬 성숙해진 나를 만나는 길. 그 길, 마리아는 이제 가 보기로, 가기로 작정했다. 


당찬 시골 소녀 마리아의 정말 당차다 못해 기가 찬 ‘네’의 길. ‘아니오’의 길이 아닌 ‘네’의 길에 들어선 마리아. 그녀의 짧은 ‘네’가 매일 매일이 기다려지는 연속극처럼, 정말로 매일 매일이 그 기가 차고 기가 막힐 사건들의 연속의 시작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네’의 그 짧은 순간이 영원 속으로의 생명의 기 뚫림의 시작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마리아는 그땐 몰랐다. 사실, 어찌 다 알까? 그러나, 그 길, 속속들이 몰라도 가야 한다 하기에, 가야 하기에 가는 길이다. 그 ‘네’로 인하여 영원한 생명의 기운, 그 새 생명의 영이 마리아에게 임하고, 이제 새로운 창조는 바야흐로 시작된다.  


photo by noneunshinboo


“이게 하나님의 뜻이란 말인가? 내가 어떻게 이걸 감당하나? 내가 무슨 잘못이기에 이런 상황에 몰리나? 이게 정말 내가 가야 할 길이라고? 난 안 간다, 못 간다, 갈 수 없다, 불가능할게 너무 뻔한데? 게다가 말도 안되게 어렵다는 걸 이미 아는데, 너무 고되고 힘들게 뻔한데, 그걸 뻔히 알며 그 길을 어찌 갈까? 굳이 가야 한다면, 다른 길은 없을까?” 

우린 간혹 혹은 자주 너무 말도 안 되는, 그래서 정말 말도 안 나오는 상황을 맞딱뜨린다. 그 때, 마리아를 기억하자. 그녀도 그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그 길을 선택했고, 우린 그 선택이 옳았다는 걸 잘 안다. 그 선택이 오늘 우리의 신앙을 있게 했다. 그리고, 그 마리아의 하나님이 지금 내가 믿는 하나님이다. 


오늘 우린 어찌해야 할까? 순간의 선택이 영원으로 이어지는 길, 그 길 앞에 혹은 그 길 위에 선 이들도 있고, 조금 그 길을 어떻게든 걷던 이들, 그리고 지금 걷고 있는 일들도 있다. 어찌해야 할까? 답은 이미 나와 있는데, 다른 답 없나 머뭇, 멈칫, 멈추고 주저하는 건 나, 그리고 우리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천사는 떠났다. 이제 마리아도 길을 떠난다. 믿음의 길 떠나는 마리아, 우리더러 함께 가자 한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질 줄 믿은 여자는 행복합니다.” (눅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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