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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회사이 Nov 27. 2021

길 위에서 길을 노래하는 마리아

노는(遊)신부의 더 드라마, 길 잃은 양을 찾아 길 떠난 예수 (4)


photo by noneunshinboo


“그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을 높이셨습니다.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 손으로 떠나 보내셨습니다.” (누가복음 1:51-53, 새번역)


우리가 살아가는 드라마들의 드라마, 더 드라마 (The Drama / The Divine Drama).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어 우리 가운데에서 지금 하려고 하시는 일, 그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의 길을 마리아는 노래한다. ‘지극히 높으시고 놀라우신 능력의 하나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하는 수많은 송가들 중의 하나가 아니다. 반전의 대역전극. 모래 사막이 바다 되고, 바위 높은 산이 평지 되고, 하늘 담은 연못이 높은 하늘 되고, 그렇게 하늘과 땅과 바다가 개벽하는 거대한 더 드라마가 이제 펼쳐질 것이다.   


나의 비참함을 들으셨고 보셨고 아시는 나의 하나님께서 나를 더 이상 그 비참함 속에 모른 척 내버려 두지 않기로 작정하셨다, 한다. 지금까지 나를 비천하다 조소하고 열 손가락질하던 사람들, 나의 비참한 삶에 자비와 동정은 고사하고, 나의 주린 배 추레한 몰골 볼 품 없다 천하다 비웃음에 어떻게든 감추게 만들던 사람들, 이제 더는 그들을 그냥 두고 보지 않기로 하셨다, 한다.  


“나 여기 있어요! 우리 여기 이렇게 있어요!” 아무리 소리쳐도 들리는지 안 들리는지, 안 듣는지 못 듣는지 “어디?” 하며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있어도 없는 존재요 없는 듯 있는 존재요, 보인다 해도 밝은 곳에서는 오히려 더욱 보이지 않는 희미한 어둠 같은 그림자 조차 없이 살아온 사람들. 왁자지껄 잔치 소리에 죽은 듯, “나 여기, . . .” 겨우 나오던 소리 차마 부끄러워 미리 겁먹어 삼키고, 소리 없이 속으로 숨고 묻고 그 소리 소거되던 사람들. 휘황찬란한 잔칫집의 네온사인 불빛 아래 “나 여기 있는데, . . .” 하며 조금 뻗은 손 누가 볼까 그 손 그림자 조차 만들 사이 없이 슬그머니 그림자인 채로 물러갈 사이도 없이 지워진 채 살아가던 사람들. 누구 들은 사람도, 누구 본 사람도 없이 살아온 사람들. 그러나, 이제 그들을 더는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겠다, 마리아를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마리아를 통해 세상으로 나올 아기, 그 아기로 하여 어제까지도 남의 땅인 듯 발 닿지 않던 여기 좁은 땅이 그러나 이제 그들의 푸른 초원과 푸른 바다가 되어 그들은 불어오는 신바람에 돛 높이 올리고 펼치고 거칠 것 없이 날 듯 뛰어다닐 것이다. 어제까지 한 모금 허락 없던 여기 깊은 우물이 그러나 이제 그들의 하얀 뭉게 구름 속 높푸른 새 산이 되어 그들은 땀 식을까 성큼성큼 시원한 호수 품은 그 숲으로 뛰어들어 그 물에 몸과 마음을 실컷 축일 것이다. 그렇게 한 쪽 발은 새 산 딛고 다른 쪽 발은 새 바다에 담근 채, 바다 거꾸로 펼친 듯 파랗고 산 들어 올린 듯 푸른 새 하늘로 맘껏 한껏 두 손 뻗을 것이다. 


그렇게 비천하고 목마르고 주린 이들을 높이고 높이시는 하나님. 이제 그 분 아들께서 만들어 가실 대역전의 드라마, 더 드라마를 마리아는 성령을 통해 지금 듣고 보고, 그래서 작은 그 속에만 담아두기에는 도저히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을 노래한다. 더 드라마는 이미 시작되었고, 더 드라마의 관객 아닌 주인공으로 벌써 그 무대 위에서 선 마리아는  그녀의 생애 첫 아리아를 부른다. 


photo by noneunshinboo


그리고 이 작은 여인이 더 드라마의 주인공임을 알아차린 한 사람이 있다. 


“그대는 여자들 가운데서 복을 받았고, 그대의 태중의 아이도 복을 받았습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내게 오시다니,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 . . 내 태중의 아이가 기뻐서 뛰놀았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질 줄 믿은 여자는 행복합니다.” (눅 42-45)


마리아 그리고 함께 오는 그 ‘기쁜 소식’에 태중 아기의 힘차고 신나는 성령의 발길질을 느끼며 객석의 자리 거부하고 무대 위로 올라 팔 벌려 맞는 엘리사벳이 있다. 나와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꿀, 내가 살아가는 세상을 새로이 창조할 사건, 그 드라마 같은 진짜의 드라마. 어둠 속 관객 아닌, 무대 한 켠 그 소식 듣고 나온 우물가의 여인, 길 모퉁이 동네 아저씨는 되어 우리 함께 무대 위에 서야하지 않을까? 

‘기쁜 소식’은 모든 이를 위한 것이나 누구나 알아듣진 못하고 아무나 함께 기뻐하진 않는다. 무대 위에 선 사람만이 그 기쁨을 나누고, 또 내 것으로 할 수 있다. 공연이 끝난 뒤 배우들 떠난 빈 무대를 아쉬움에 하염없이 바라보며 밝아진 그러나 이제 곧 불 꺼질 거기 객석 한 구석에 홀로 남겨진 관객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드라마는 시작되었고, 그 끝은 아직 멀었다. 무대 위 여전히 나의 자리는 비어 있고, 준비는 필요 없다. 여기,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하며 많은 햄릿들이 극장 밖에서 서성이고, 객석에 앉아 머뭇거리고 미적거리고. 그러다 장 파하고 막 내린다. 


“지금 저 무대 위, 난 오를 것인가, 말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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