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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회사이 Jan 19. 2022

세례자 요한이 가는 길

노는(遊)신부의 더 드라마, 길 잃은 양을 찾아 길 떠난 예수 (5)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찬양받으실 분이시다. 그는 자기 백성을 돌보아 속량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능력 있는 구원자를 자기의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다. . . . 아가야, 너는 더없이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릴 것이니, 주님보다 앞서 가서 그의 길을 예비하고, 죄 사함을 받아서 구원을 얻는 지식을 그의 백성에게 가르쳐 줄 것이다. 이것은 우리 하나님의 자비로운 심정에서 오는 것이다. 그는 해를 하늘 높이 뜨게 하셔서, 어둠 속과 죽음의 그늘 아래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게 하시고,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 (누가복음 1:76-79) 


photo by Noneunshinboo


“그의 이름은 요한이다.” (1:63)


아기의 이름은 어떻게 할까 이리저리 궁리하던 사람들에게 낯선 한 이름을 툭 던진 아기의 아빠 사가랴. 그리고 성령으로 채워진 그 사가랴의 입에서 몇 달을 두고 전혀 말 못해 끙끙거리며 냉가슴 앓고 앓던 끝에 이때다 터지듯 쏟아져 나온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신다. 우리와 하신 약속을 기억하신다. 그리고 마침내 그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 오신다. 너와 나 그리고 우리를 위해 여기 오신다. 새로운 해가 마침내 높이 떠올라 여지껏 어둠 속 죽음의 그늘 아래 거기 앉을 수도 설 수도 없어 체념한 듯 살던 사람들에게 빛이 들어오고, 그래 한 치 앞도 뒤도 옆도 볼 수 없어 오도 가도 못한 꽁꽁 언 발에 오줌조차 쌀 수 없던 그들의 발이 이제 따스한 빛 그 온기에 녹아 가벼워진 발로 이제 그 빛 따라 평화의 길, 빛의 길로 들어서게 될 것이다.”




귀 멀어 3년, 눈 멀어 3년, 속앓이로 속 멀어 3년, 주저앉아 3년, 드러누워 3년, 그런김에 몸져누운 채 갑절로 3년, 겨우 깨금발 휘청거리며 어렵고 힘들게 어찌어찌 다시 3년에 3년에 또 3년, 평생에 있는 거 없는 거 남은 거 없고 멀 수 있는 것들 죄다 멀고 또 멀어 있어도 없는 듯 없다 하며 정말 없이 있이 그렇게 목구멍이 포도청인 듯 꿈보다 해몽으로 살긴 살아야했던 인생들이다. 쥐구멍도 그 보다는 훨 낫겠다 싶게 나 보기도 너 보이기도 민망하고 민망해 숨고 숨긴 인생들이다. 

그런데 오래 살고 볼 일이라고, 그런 그들에게 ‘옛다 여기’ 선심 쓰듯 던져주는 그 알량한 한 뼘의 슬쩍 드는 볕이 아니라 온 태양이 온 통째로 아예 온전히 온다고, 그래서 여기와 나를 온전하게 할 것이라고 한다. 나의 인생이 죄의 어둠 속, 죽음의 그늘 아래의 인생이 더는 아닐 것이라고 한다. 


사랑, 용서, 자비, 정의, 그리고 구원과 해방. 그저 글자로만 존재했던, 말로만 들었던, 기억 속에 희미해져가던 그저 죽어 있던 글자(死字)요 죽은 말이었는데. 이제 살아 있는 글자(活字)요 나를 살리는 말(the Living Word)이 되어 살아있는 빛으로 나에게 온다고 한다 (요한복음서 1:1-5). 

내가 그 곳을 애써 찾아 가는 것이 아니라, 그 빛이 나를 애써 찾아 여기로 온다고, 그냥의 빛이 아니라 이제 막 떠오를 새로운 태양으로부터 오는 빛이라고. 그 빛 속에 영원토록 살아갈 꿈 같은 날이 이제 온다고. 진짜 같은 가짜 아닌 가짜 같은 진짜인 현실 같은 꿈 아닌 꿈 같은 현실로 온다고. 정말 그렇게 될 거라고 한다.




이 꿈 같은 소식. 아홉 달 내내 아내 엘리사벳이 아닌 마치 내가 임신한 듯 그 속 안에 넣고, 소 여물 우물우물하는 듯 이리 굴리고 저리 키웠을 이 기막힌 소식. 말 못할 정도로 너무 놀랍고 기쁘고, 그 만큼 말 못해 슬프고 속 끓인, 말처럼 뛰고 싶었던 말이었다. 지금 사가랴의 입은 이제 고삐 풀려 이리 뛰고 저리 나는 망아지이며, 비 온 뒤의 여기저기 솟고 솟는 죽순이요, 장맛비 가둬 둔 그 감당키 어려운 보에 든 봇물이 되어 내쳐 저기 보이지 않는 곳까지 터져 나가려는 듯, 하고 싶었고 그러나 못했던, 이제 겨우 할 수 있고 그래서 마침내 하는 그 감당키 어려웠던 말, 


“이제 곧 주님 오신다!” 


생시에는 도저히 감당키 어려운 꿈 같은 소식. ‘제발 좀 그렇게 되었으면 소원이 없겠다’ 소리 절로 나오게 만드는 놀랍고 기쁘고 감격스러운, 언감생심의 엄동설한 수박 쪼개고 복숭아 손에 들고 꿀 떨어지는 홍시 입에 물 소식. 여기, 빛이신 분, 길이신 분, 그리스도, 주님 오신다. 여기 생시로 곧 오신다. 


‘너에게 아들이 태어날 것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여라,’ 오늘 그 천사의 예언이 이루어졌듯 내일 여기 사가랴의 예언은 이루어질 것이다. 지금까지의 어둠 속 그 날들이 지나간 꿈이 될지, 아니면 지금 사가랴의 입에서 나온 말들이 앞으로 온다는 그 날들이 꿈이 될지, 아니면 정말 이 모든게 생시가 될지, 그래서 사람들은 지금 요한을 주목한다.  


photo by Noneunshinboo


“이 아기는 대체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1:66) 


그러나, 요한은 유대 온 산골에 퍼진 소망과 소문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자신에게 갖는 사람들의 온갖 기대를 그저 따라갈 생각이 없다. 주님의 보살피는 손길이 함께 하는 요한, 몸과 마음이 굳게 자란 요한은 그 모든 것들을 뒤로 한 채 광야로 들어간다. 내가 무엇이 되어야 하고 또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아는 요한, 때를 알고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요한은 지금 내가 있어야 할 곳은 광야라고,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광야에서의 시간이라고 그렇게 미련없이 광야로 향한다.  


광야의 길을 가는 요한이다. 광야의 요한이다.

지금 그가 가는 길, 그가 머물 자리는 머지않아 예수의 길, 예수의 자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걸어야 할 길, 우리도 있어야 할 자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길, 그 자리는 장차 꽃으로 피어날 꽃길, 꽃자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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