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교회사이 Jan 21. 2022

그 때, 문제적 아기

노는(遊)신부의 더 드라마, 길 잃은 양을 찾아 길 떠난 예수 (6) 


“그 때에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칙령을 내려 온 세계가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는데, . . . 모든 사람이 호적 등록을 하러 저마다 자기 고향으로 갔다. 요셉은 다윗 가문의 자손이므로, 갈릴리의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에 있는 베들레헴이라는 다윗의 동네로, 자기의 약혼자인 마리아와 함께 등록하러 올라갔다. 그 때에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는데, 그들이 거기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마리아가 해산할 날이 되었다. 마리아가 첫 아들을 낳아서,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눕혀 두었다.” (누가복음 2:1,7)



황제가 기쁜 소식이다, 황제의 이름 아래에 내 이름 올려야 잘 살 수 있다, 그래서 너 나 할 것 없이 황제에게 줄서기 바쁘다, 하는 세상. 그 때에 ‘아니다’ 저 황제가 기쁜 소식일 수 없다, 내가 바로 기쁜 소식이다, 너의 이름은 나의 이름 아래에 올려야 한다, 나를 따라와야 한다, 하며 한 문제적 아기가 태어났다.  




우리 사는 세상, 누가 강하고 누가 약한지, 누가 높고 누가 낮은지, 누가 부유하고 누가 가난한지, 누가 건강하고 누가 아픈지, 누가 웃어야 하고 누가 슬퍼 울어야 하는지, 누가 배부른 사람이고 누가 목마르고 배고픈 사람인지, 그리고 누구에게서 돌아서 누구를 따라야 하는지, . . . 애써 고민할 필요 없다, 누가 보아도 명확하다. 

의인과 죄인, 주인과 종, 중심과 변두리, 같음과 다름, 그리고 내 편과 네 편, 이 편과 저 편, 우리 편과 남의 편, 이것과 저것, 이것이 아니 저것이 맞다 틀리다 옳다 그르다 있다 없다, . . . 굳이 깊이 생각할 필요 없다, 누가 들어도 참 쉬운 문제다. 

이렇게 저렇게 세상을 사람을 인생을 무엇을 가르고 나누고 쪼개고 구분하고 구별하고 배제하고 소외시키고, 내가 너 보다, 네가 나 보다, 우리가 저들 보다, 저들이 우리들 보다 더 낫다 더 못하다 더 많다 더 적다 더 좋다 더 나쁘다 더 잘 산다 아니다 더 성공했다 아니다, . . .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누가 생각해도 너무 간단하다. 

이건 문제가 될 수 없다. 그건 문제도 아니다. 당연하다고 살았다. 다른 방식은 방법은 없다고 살았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살았다. 그렇게 또 살아가면 되었다. 


그런데, 


photo by noneunshinboo


“아니다.”


그렇게 문제적 아기가 태어났고, 상황은 복잡해졌고, 더는 간단하지 않게 되었고, 그래서 문제가 되었다. 사는 게 고달프고 힘겨웠어도 다른 길은 없었고, 그래서 선택은 아예 처음부터 되어 있었고, 결정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길은 벌써 주어져 있었고, 굳이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었고, 그렇게 왔던 길 그래서 앞으로도 똑 같은 그 길 내처 가면 되었다. 

그런데, 


“아니다.”


복잡해졌다. 복잡한게 아니라 아예 어그러져 버렸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 그게 맞는지 도통 알 수 없게 되었다. 새로운 세상이라도 온 것일까? 살아가는 데 새로운 기준이라도 생긴 걸까? 그것도 갑자기? 이 아기로 인해? 그럼 이 아기는 누구지? 뭘까 이 아기로 인해 벌어질 일들은? 정말 새로운 세상, 새로운 왕, 새로운 나라라도 되는 것일까? 혼란 속으로 분열 속으로 몰아넣는 문제적 아기의 출생이다.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 (마태복음 10:34). 


무엇보다 분명한 것은 적어도 이 아기가 로마 황제에게 평화를 줄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이다. 황제는 그렇다 치더라도, 그럼 나에게 우리에게 이 아기는 평화를 줄 것인가? 그럼 이제 나는 누구의 이름 밑에 나의 이름을 올려야 하는가? 어느 줄에 서야 하는가? 누구를 따라야 하는가? 




로마 황제 vs 갓난아기. 

황제의 이름 밑에 나의 이름을 올리는 일, 최고의 권력자 밑에 줄을 서는 것은 강요든 자발적이든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반면 홈리스 처지의 아기의 이름 밑에 나의 이름을 올리는 일, 아무리 자발적으로 한다 해도 분명 쉽지 않은 일이다. 누가 강요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누가 보아도 너무 쉬워 보인다.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예전에는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들이 문제가 되어 지금 여기로 왔다. 왜 하필 지금일까? 황제가 버젓이 있는 세상인데, 그럭저럭 살아도 살아지는 세상인데, 적응 아닌 적응을 하며 살아왔고 또 큰 문제 없다고, 사실 문제가 있다 해도  별 수 없고 어쩔 수 없다고, 어찌 해 볼 수 있어도 큰 수가 아닌 이상 그냥 그렇다 하며 다들 살아가는 세상인데, 한 아기가 태어났다 해서 무엇이 크게 달라질까 싶은 세상인데, 그럼 그냥 무시할까? 

이전에는 없던 문제다. 적어도 나에게 문제 될 건 없다 하며 지금 당장에는 무시할 수 있다. 그러나 머지않아 나의 살갗 가장 약한 부위에 먼저 닿아 나를 따끔거리게 할 때는 올 것이고, 나의 눈동자에 든 들보가 되어 더 이상 피할 수 없고 더 이상 못 보고 못 들은 채 아예 없다 하지 못할 때는 올 것이고, 우리는 작다 할 수 없는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Denarius from the reign of Tiberius Caeesar


“우리가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20:22) 


그때도 여전히 문제가 될 것이 전혀 없어 보이는 황제, 그리고 이제 더 자라고 더 커진 문제가 된 예수. 


문제가 아닌 것이 문제가 되어버린 것이 아니었고, 원래부터 문제였고,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고 했던 것이 사실 문제였고. 문제를 삼는 것이 문제라면 그것도 문제일 수 있고.  진실를 아는 것이 문제라면 또 문제일 수 있고. 하지만 계속해서 무시해도 좋을 문제일 수 있을까? 


단번에 풀 수 있는 문제도 지금 당장 풀어야 할 문제도 아닌, 긴 시간을 살아야 할 문제, 긴 시간 공들이며 내가 살아가야 할 문제. 가슴에 품고 손과 발로 풀어야 할, 하루 하루 살아가야 할, 그리고 함께 살아내야 할 문제. 

그리고 문제적 아기로 오신 예수. 


아기는 커갈 것이고, 문제도 커갈 것이고, 그리고 문제를 사는 우리 역시 커갈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세례자 요한이 가는 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