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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회사이 Jan 24. 2022

나에게 기쁜 소식은
무엇이어야 할까?

노는(遊)신부의 더 드라마, 길 잃은 양을 찾아 길 떠난 예수 (7)


“그 지역에서 목자들이 밤에 들에서 지내며 그들의 양 떼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주님의 한 천사가 그들에게 나타나고, 주님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니, 그들은 몹시 두려워하였다. . . .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여 준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서 너희에게 구주가 나셨으니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누가복음 2:10-12) 


photo by noneunshinboo


찢어지게 가난하고 비천한 집에서 태어나 세상 사람들의 온갖 미움과 멸시와 천대를 온 몸으로 받아낸 밉상의 미운 새끼 오리, 나중에 여봐란듯 날개 활짝 펴고 훨훨 날아오르는 우아한 백조가 되었다는 동화 속 거지 왕자의 이야기가 아니다. 개천에서 정말 용이 나올 수 있는지 내가 한 번 작심하고 보여주겠다, 숱한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용쓰고 용빼고 그래서 마침내 정말 용이 되어 세상을 구한다는 신화 속 영웅의 이아기도 아니다. 


만삭의 이제나저제나 곧 엄마가 될 나이 어린 여인조차 기어이 저 먼 곳까지 꾸역꾸역 무거운 몸 끌다시피 찾아가 황제의 호구 조사에 응할 수 밖에 없는, 그래야 그나마의 삶이라도 이어갈 수 있는, 팍팍하고 고단한 피식민의 처지와 곤궁한 삶과 그런 어쩔 수 없는 세상 속, 이리 치이고 저리 차이고 흘러 흘러 굴러 굴러 한뎃밥 먹고 한뎃잠 자는, 저 하늘 은하수 별 헤는 밤은 너무 춥고 쓸쓸하고 처량한 현실이요, 낭만적 목가적 전원적 풍경과는 멀어도 한참 먼 저 들에 핀 잡초 같은 무명의 인생들, 그 한 가운데로 들어온 한 아기에 대한 이야기다. 


어느 한 밤, 빈 들에 뜬 눈으로 지새는 목자들, 그리고 밑도 끝도 없이 이들을 불쑥 찾아온 그래서 오히려 침입해 들어왔다고 해야 할 낯선 존재와 그가 전하는 더 낯선 ‘기쁜 소식’, 에스에프 영화 속 낯선 존재들의 침공 장면처럼 비현실 같은 그러나 정말 현실 속 사람들의 현실 이야기다. 




기쁜 소식이다. 복음이다.  


그런데 여기 가난하고 죄 많다 손가락질 받는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란 어떤 것이어야 할까? 어떤 소식이 이들을 정말 기쁘게 할까? 저기 예루살렘과 로마에 살고 있는 이들이 아닌, 지금 여기 이 거칠고 세찬 들에 하루 하루를 이어가야 하는 이들에게 기쁜 소식은 무엇이어야 할까? 

만약 느닷없이 나타난 이 낯 선 메신저와 군대가 로마 황제 그리고 식민지 주둔군의 메신저와 군대이기라도 하다면, 이들이 정말 그들이라면, 그래서 로마 황제의 어떤 무시무시한 칙령을 들고 이들에게 왔다면, 혹시 목자들 중 누구를 잡으러 또 무엇을 더 빼앗으러 왔다면, 그럼 이들은 어찌해야 할까? 


지킨다? 무엇을? 내 것을? 이게 나의 것이기는 할까? 오롯이 내 소유만도 아닌 여기 지금 이 양떼를 내 목숨을 지킨다? 늑대와 승냥이는 지금 손에 쥔 작대기와 돌맹이로 어찌 해볼 수야 있겠다 싶지만, 황제로부터 온 사람들 그것도 총칼 앞세우고 밀어닥친 서슬퍼런 저들을 그저 목자에 불과한 목자들로선 어찌 해 볼 도리가 없다. 만약에라도 저들이 그런 이유로 왔다면 정말 그렇기라도 하다면 필시 지금 목자들을 찾아온 저 낯선이가 말하는 기쁜 소식이란 적어도 이들에게 만큼은 결코 좋은 소식, 기뻐할 소식은 되지 않을 것이다. 깊은 밤 짙은 어둠 속, 차가운 들에 있는 이들을 찾아온 전혀 예상치 못한 그래서 전혀 반가울 리 만무한 침범자요 침입자인 저 낯선자들에게 갖는 이들의 두려움은 그래서 낯설 수 없고 당연한 분명하고 확실한 두려움이요 공포일 것이다. 


“뭐지? 누굴까? 왜 여기 우리를 찾아온 것일까?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숨 죽인 채, 그 말 떨어지기를 기다린다. 


photo by noneunshinboo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이다.”


아니다. 그런게 아니다. 두려워해야 할 소식이 아닌 크게 기뻐해야 할 소식이다. 로마 황제도, 그가 보낸 메신저도 군대도 아니다. 전혀 아니고 전혀 다르다. 온 세상의 왕, 왕 중의 왕, 하나님으로부터 온 메신저요 하늘의 군대다. 


그렇다면, 하나님 그리고 하늘로부터 온 두려워하지 않을 기쁜 소식이란 무엇일까? 무엇이어야 할까? 빼앗긴 들에 봄이라도 찾아온다는 소식일까? 힘겹지만 즐겁게 내가 씨 뿌리고 거름 주고 물 주고 키워낸, 그리고 그 거둔 밀로 나도 너도 먹고도 남을 빵 굽고, 내가 딴 포도로 정성껏 담아 담근 포도주로 내 잔 니 잔 흘러 넘치도록 붓고 또 붓고, 큰 인심 크게 쏜다 싶게 잘 먹이고 잘 키운 양들 중 제일로 실한 놈 잡아 구워 한 상 제대로 크게 차려, 여기 저기 소리 소문 크게 내어 모인 이웃들과 동네 잔치 한 번 여는게 내 소원이라면 소원인데. 혹시 그 소원 들어주겠다는 소식일까? 그런 세상 오기는 온다는 소식일까? 설마. . . 정말 그런 소식일까?


그런데 왠지 불안하다, 그리고 낯설지 않다, ‘메시아가 오신다’ ‘그분이 오셨다’ ‘내가 바로 메시아다’ ‘저기 저 사람이 그분이시다’ 하는 말들. 정신이 번쩍 들게 하고 나를 황홀케했던 단어, ‘메시아’. 하지만 그 말에 더는 속지 않겠다. ‘내가 메시아다’, 그렇게 떠들고 다니던 사람들, 이제껏 수도 없이 들었고 또 보았다. 이제는 속지 않겠다, 그렇게 다짐도 누구 못지 않게 했고 또 했었다. 번번히 속고 또 속고, 그래서 이번에는 절대 안 속는다 하며 또 속고 속기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뭔가 다르다. 지금의 흙구덩이 속 처지에서 시원하게 나와 우리를 끌어내고 훌훌 거기 벗어나게 하겠다 했던 ‘내가 구원자다, 내가 기름부은 자다, 내가 메시아다’ 했던 수많은 사람들, 그러나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이 아니라고 한다. 

마침내 참 ‘주님’, 참 ‘메시아’가 오셨다.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던 이름, ‘여호와,’ 우리의 ‘주님’이 오셨다. 


“그렇다면, 정말 그렇다면, 우리를 믿게 하시오. 우리가 믿을 수 있도록, 그 징표를, 그 확실한 증거를 우리에게 보이시오. 우리 눈으로 봐야겠소, 그럼 우리가 그 소식, 그 기쁜 소식을 믿겠소.”  

 

지금 나는 어떤 기쁜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까? 

여기 우리는 어떤 기쁜 소식을 위한 어떤 징표, 어떤 무엇을 위한 어떤 확실한 증거를 보길 원하고 있을까? 

그리고 그것들을 보면 정말 믿을까? 

그런데 누구를 무엇을 믿는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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