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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회사이 Jan 26. 2022

나의 길 잃은 시선,
둘 곳을 찾다

노는(遊)신부의 더 드라마, 길 잃은 양을 찾아 길 떠난 예수 (8)


“오늘 다윗의 동네에서 너희에게 구주가 나셨으니,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너희는 한 갓난아기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것을 볼 터인데,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표징이다. . . . 천사들이 목자들에게서 떠나 하늘로 올라간 뒤에, 목자들이 서로 말하였다.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바, 일어난 그 일을 봅시다.” 그리고 그들은 급히 달려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찾아냈다.” (누가복음 2:11-16)


구례성당 2010 크리스마스 장식 (출처,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황제의 궁도 아니고 예루살렘 성전도 아니다. 베들레헴, 포대기, 소와 말, 당나귀와 양, 그리고 짐승의 먹이통과 그 안에 뉘어 있는 갓난아기로 오셨다. 다르지 않다. 거칠고 세찬 들에 양들과 사는, 주변으로 밀려난 우리의 처지와 다르지 않은 메시아다. 우리를 구원하실 메시아 주님이 우리와 다르지 않게 오셨다.  


강 건너 불 구경이나 하자고 오시지 않았다. 저기 멀찌감치 서서 남의 일 남의 얘기하며 하기 좋은 말 듣기 좋은 소리 하러 오시지 않았다. 꽃패 들고 꽃구경에 꽃노래 하며 기승전 다 빼고 결론적으로 다 잘 될 것이니 너무 아파하지도 너무 미워하지도 말라고 속 좋고 맘 좋게 살자고 옛날 얘기 동화 같은 미래 얘기 하러 오시지 않았다. 신산(辛酸)한 나와 우리의 처지로 와서 그 처지를 함께 살려고 함께 살아 가시려고, 그리고 그 처지를 함께 봄의 자리 꽃자리로 만들어 가자고, 당신이 그 봄길 그 꽃길이 되겠다고, 메시아는 오셨다.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바, 일어난 그 일을 봅시다.”


정말 그랬다.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평범하다 못해 오히려 초라해 보이는 한 갓난아기, 그리고 그 옆에 역시 특별함과는 거리가 먼 아기의 엄마와 아빠. 정말 모든 게 그 천사 말 그대로다. 그 똑같음이 오히려 너무 놀랍다. 초라한 목자들에게 찾아온 초라한 아기 메시아.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그 메시아는 또한 초라한 죽음을 맞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먼 길을 돌아 초라한 여기에 깃든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갓 태어난 아기. 길 위 마리아의 무거움을 등에 나누어 지고 함께 걷던 나귀, 요셉의 고단함을 그의 꼭 그러쥔 손과 나누었던 목자의 지팡이, 이들의 고단했던 여정을 위로하고 또한 산고(産苦)를 지켜본 소, 말, 양, 닭. 그리고 이들 모두를 비추는 저 위의 별과 그 너머 저 멀리 알 수 없는 그 찬 들의 긴 밤, 양들과 함께 동튼 아침 따뜻한 태양의 빛을 기다리는 목자들. 그리고 더 멀고 먼 동쪽 어디 그 별에 두 눈을 고정한 채 모르는 여기를 찾아 사막의 바다를 걷는 사람들과 낙타들의 무리. 그 훨씬 너머 소란스러워진 예루살렘 성과 거기 사람들 그리고 지금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여기 변방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로마, 세상 그리고 그 속의 수많은 사람들. 


온갖 풍경들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고, 어디를 보아야 하는지 벅차 정신이 없다. 그렇게 나의 길 잃은 시선을 도대체 어디에 두어야 할 지 너무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그래서 감당하기 어려울 그때. 무한대로 펼쳐진, 나누어 보기도 하나로 보기도 힘든 너무도 다채롭고 다양한 풍경들, 그리고 그 셀 수 없는 풍경들 속 곳곳에서 끝 없이 쏟아져 나오는 다르고 다른 사람의 무리들, 그래서 점점 내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질 그때. 


Vladimir Mother of God


요란하고 시끄럽고 정신을 뒤흔드는 세상, 중심을 잃고 또 길을 잃고 헤매고 흔들릴 그때, 나의 시선을 다시 그 아기에게 둔다. 다시 그 아기가 나의 갈 곳 둘 곳 잃은 시선의 시작점이 된다. 그리고 아기를 안고 품은 엄마와 그 모자(母子)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곁에 선 아빠를 본다. 그리고 하나 둘, 그들을 둘러 싼 사람들에게로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나의 시선은 옮겨가고, 여기 주변의 무리들, 저기 먼 곳의 무리들, 거기 저 먼 알 지 못할 곳의 무리들로 더 넓어져가고, 그리고 같이 퍼져가는 풍경 하나 둘 셋 나의 눈에 들어오고 또 본다. 그렇게 하나는 둘로 셋으로 또 여기는 저기로 시선은 옮겨가고, 사람들이 장면들이 풍경들이 서로를 만나 서로를 잇고 또 이어져 어우러지고 그렇게 점점 커져가는 하나, 커다란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 되어 나의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다시 아기를 본다. 비로소 그 아기의 시선이 나에게로 흔들림 없이 줄곧 향하고 있었음을 본다.  




흔들리고 초점을 잃은 나의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알기 어렵고, 안다 해도 쉽사리 결정할 수 없고 또 못하는 세상이다. 지금의 내 처지를 보느니 영화 속 드라마 속 나였음 하는 남의 처지를 보는 것이 훨씬 쉽고 편안하다. 저 거칠고 황량한 들의 양들이나 지키는 목자들의 처지를 살피느니 로마의 황제의 처지를, 예루살렘 성 그 안의 사람들의 처지를 살피는 것이 훨씬 재밌고 흥미진진하다. 초라한 나의 얘기를 하느니 화려한 남의 얘기를 하는 것이 너무 즐겁고 신난다. 지금 여기의 처지와 나에게 절망과 좌절과 우울과 근심과 불안의 시선을 주느니 상상 속의 꿈같은 처지와 나에게 지금 여기를 잊고 싶은 시선을 주는 것이 좋고 그게 정말 나였으면 좋다, 싶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로마도 예루살렘도 영화나 드라마의 스크린도 아닌 차갑고 어두운 빈 들에 있는 나를 찾아오셨다. 예수께서는 ‘이랬으면 좋겠어 이러면 좋을텐데’의 미래의 처지와 내일의 나가 아닌 ‘지금 너무 외롭다, 슬프다, 아프다’하는 여기의 나를 찾아오셨다. 예수께서는 강 건너 불구경하는 저기가 아닌 그 불 한복판의 여기로, 그냥의 불구경이 아닌 아예 내 안에 제대로 불을 지피러, 남의 일처럼도 남의 얘기처럼도 아닌 나의 일로 나의 얘기로, 나의 일 나의 얘기가 되어 나와 같이 살기로 작정하시고 오셨다. 


어디 둘 곳을 찾아 헤매는 나의 시선, 나에게 나의 처지에 예수께서 따뜻한 당신의 시선을 주시는 것 처럼, 지금 여기의 나에게 주자. 그리고 그분의 시선을 따라가 보자. 그 시선 따라가다 보면 닿는 거기 줄곧 나에게 시선을 고정하신 그리스도 예수, 같은 처지의 주님 계신다.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바, 일어난 그 일을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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