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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회사이 Jan 27. 2022

문제적 인간으로 오신 예수

노는(遊)신부의 더 드라마, 길 잃은 양을 찾아 길 떠난 예수 (9)


“그들은 이것을 보고 나서, 이 아기에 관하여 자기들이 들은 말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었다. 이것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목자들이 그들에게 전해준 말을 이상히 여겼다.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고이 간직하고 마음 속에 곰곰이 되새겼다. 목자들은 자기들이 듣고 본 모든 일이 자기들에게 일러주신 그대로임을 알고, 돌아가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를 찬미하였다.” (누가복음 2:20)



“이 아기가 대체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누가복음 1:66) 

세례자 요한이 태어났을 때 사람들은 궁금했다. 여기 목자들도 이 갓난아기를 보며 궁금했을 것이다. “이 아기는 누굴까? 이 아기가 대체 어떤 사람이 될까? 정말 천사의 말 대로 그리스도 주님이신가?” 그리고 그 궁금증, 그 질문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 아기를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도 줄곧 따라다닐 것이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지금은 그 시작일 뿐이다.  


작은 이들 가운데 가장 작은 이로 오신 여기 아기 예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가장 작은 이를 보내신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또한 그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 나라를 소유하게 된다 (참조, 누가복음 9:48, 마태복음 25:40).


photo by noneunshinboo 


지금 이들 목자들이 이 아기 안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하실 일, 그리고 장차 올 그 하나님 나라를 보았을까? 이들 목자들은 들에서 들었던 하늘의 메신저의 말과 일치한 광경을 보았고, 그래서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의 같음이 너무 기이했고,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과연 지금 여기 포대기에 싸여 소 먹이통에 뉘어 있는 그들의 보호와 보살핌이 필요한 이 아기가 그들을 구원하고 해방시킬 메시아라는 것을, 푸른 초장 맑은 시냇물로 그리고 하나님 나라로 인도할 자기들의 참 목자라는 것을, 그들은 이 아기 안에서 보았을까? 알았을까? 그리고 믿었을까? 모를 일이다. 


자기들이 지금까지 상상하고 기대했던 그 나라, 자기들이 여태껏 기다리고 꿈꾸어 왔던 지금 보고있는 이 아기와는 전혀 다른 자기들만의 화려한 왕을 여전히 가슴에 품은 채 왔던 곳으로 살던 곳으로 돌아가고 있었을까? 그리고 여전히 ‘다른’ 왕을 기다리며 차가운 밤 차가운 들을 헤맬까, 목자없는 양들처럼? 모를 일이다. 


아기는 이제 커갈 것이다. 그리고 목자들은 성인이 된 그 아기의 말을, 가르침을, 이적들을, 그리고 두고 두고 잊지 못할 그 사건을 듣고 보게 될 것이다. 그때에 저들은 예전 그 밤에 천사에게서 들었던 또 자기들 눈으로 직접 보았던 일들을 비로소 믿을까, 아니면 그때에도 여전히 믿지 않을까? 그것도 아니면 ‘성급하게 굴지 말고 조금 더 두고 보자, 조금 더 기다려보자’ 여전히 그럴까? 모를 일이다. 


아기가 커 가듯, 저들도 같이 커 가야 할 텐데. 아기는 커가는데, 어른은 늘 거기 그대로다. 세상의 문제는 나는 다 컸다 자라길 거부하는 어른들이다.  



photo by noneunshinboo


여기, 변방의 갈릴리, 변방의 마리아, 변방의 베들레헴, 변방의 목자들, 변방으로부터 오는 사람들, 그리고 아무것도 쥔 것 없고 입은 것 없고 누울 곳 없이 포대기에 싸여 짐승 먹이통에 뉘어 있는 막 태어난 힘 없는, 철저히 타인에게 의존할 도리 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는 변방의 한 갓난아기가 있다. 방문객은 고작, 여기 누가 봐도 볼 것 없고, 딱히 들을 말도 없어 보이는, 들 잠 자고, 들 일 하는 목자들, 특별할 것도 없어 보이는 아기의 엄마와 아빠, 그리고 영 형편 없는 그들의 주변 풍경들이다. 태어나자 마자 이미 변방의 처지에 놓인 아기, 주님 예수다. 

그리고 화려한 성문 안이 아닌 성문 밖, 변방, 변두리 출생의 아기 예수는 그 성인 예수로 맞는 죽음 역시 성문 밖 어디 즈음이 될 것이다. 부활의 자리 역시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또 다시 그 변방 어디, 갈릴리에서 부활한 그를 만날 것이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는 변방으로, 주변부로, 성문 밖으로만 가시는 걸까? 왜 예수께서는 변방인들, 주변으로 밀려난 사람들과 어울리시는 걸까? 왜 줄곧 거기에 그들과 있으시는 걸까? 

그런데 왜 우리는 그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따른다고 하면서 그 반대로 성문 안으로 더 안쪽으로 더 깊숙히 들어가려고만 할까? 왜 우리는 예수께서 편애하다시피 했던 그들과 거리를 두려고 하고 어울리려 하지 않는 걸까? 

누가복음서을 읽는 이유 중 하나는 그 ‘왜’를 묻고 그 ‘왜’를 알고 그 ‘왜’를 또한 살기 위함이다.  


나에게 우리에게 ‘왜’로 오신 예수, ‘문제적 인간’ 예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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