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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회사이 Mar 02. 2023

욥,그리고 고통의 바다(苦海)

하나님과 함께 어둠 속을 걷는 법 1-2

사순절에 읽는 욥기 


“주님께서 사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종 욥을 잘 살펴 보았느냐? 이 세상에 그 사람만큼 흠이 없고 정직한 사람, 그렇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 없다. 네가 나를 부추겨서, 공연히 그를 해치려고 하였지만, 그는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고 있지 않느냐?’ 사탄이 주님께 아뢰었다. ‘가죽은 가죽으로 대신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 생명을 지키는 일이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립니다. 이제라도 주님께서 손을 들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시면, 그는 당장 주님 앞에서 주님을 저주하고 말 것입니다!’” (욥기 2:3-5)


photo by noneunshinboo 


1.        

어느 날 한 일꾼이 욥에게 달려왔습니다. 

“우리가 소를 몰아 밭을 갈고, 나귀들은 그 근처에서 풀을 뜯고 있는데, 스바 사람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가축들을 빼앗아 가고, 종들을 칼로 쳐서 죽였습니다. 저 혼자만 겨우 살아 남았습니다. 

그 일꾼이 아직 말을 다 마치지도 않았는데, 또 다른 사람이 달려왔습니다. 

“하늘에서 하나님의 불이 떨어져서, 양 떼와 목동들을 살라 버렸습니다. 저 혼자만 겨우 살아 남았습니다.”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그 일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또 다른 사람이 달려와서 말합니다. 

“갈대아 사람 세 무리가 갑자기 낙타 떼에게 달려들어서 모두 끌어가고, 종들을 칼로 쳐서 죽였습니다. 저 혼자만 겨우 살아 남았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이 달려와 말합니다. 

“주인 어른의 아드님과 따님들이 큰 아드님 댁에서 한창 음식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는데, 갑자기 광야에서 강풍이 불어와서, 그 집 네 모퉁이를 내리쳤고, 집이 무너졌습니다. 그 때에 젊은 사람들이 그 속에 깔려서, 모두 죽었습니다.” (욥 1:13-19)




고삐 풀린 불행은 멈추지 않습니다. 

사탄이 욥을 쳐서, 발바닥에서부터 정수리에까지 악성 종기가 나서 고생하게 합니다. 그래서 욥은 자식을 잃은 고통이 있는 상태에서 이젠 잿더미에 앉아서, 옹기 조각을 가지고 자기 몸을 긁고 있습니다. 

“이래도 당신은 여전히 신실함을 지킬 겁니까?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서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욥 2:7-9)


한 평생을 욥과 함께 살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흠이 없이, 정직하게, 그리고 악을 멀리하며 살았던 아내입니다. 그런데 오죽 힘 들고 고통스러우면 그런 말을 했을까요? 

자식도 다 잃고, 재산도 다 잃고, 이젠 남편도 죽을 병에 걸려 깨진 그릇으로 자기 몸이나 긁으며 신음하고 아파하는 것을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처지이니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이 사실 이상하지 않습니다. ‘우리 그냥 여기서 함께 죽자’ 당연히 그러지 않을까요?  


세상 그 누구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행복 종합 선물 세트’를 받았다 했던 부부였는데, 어떻게 이런 지경에 이르렀을까요? 왜 이런 ‘불행 종합 선물 세트’를 받은 사람이 되었을까요? 그때 에덴 동산의 아담과 이브에게는 그 이유라도 있었는데, 여기 우스의 욥과 그의 아내에게 그 이유란 도대체 뭘까요?  




2.        

“주님! 욥이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 (욥 1:9)

이게 사탄이 하나님께 제기한 그 이유입니다. 지금 사탄은 그래서 하나님께 고발장을 들이밀고 있습니다. 


“하나님, 저에게는 욥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지 않는다는 것, 죄가 있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물론 심증입니다. 하지만 확실합니다. 그런데 심증으로는 부족하다 하시니 저에게 허락만 하신다면 그 증거를 찾아오겠습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진 않는다는 것을, 주님께 바라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이 저렇게 흠 없이 살고 정직하게 살지는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그 까닭이 없이 악을 멀리하지 않는다는 것을 제가 확인시켜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저에게 수사권을 주십시오. 압수 수색이든, 잠복 수사이든 해서 그 물증과 증거를 찾아낼 것이니 허락해 주십시오.” 

“대신 욥의 몸에는 손을 대지 말아라!”


그러나 사탄은 그 증거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재산도 다 잃고 하루 아침에 열 명이나 되는 자식들을 다 잃었는데도, 그 증거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그 이유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보았느냐? 알았느냐? 이 세상에 그 욥만큼 흠이 없고 정직한 사람, 그렇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 없다. 네가 나를 부추겨서, 공연히, 아무 이유 없이 욥을 해치려고 하였지만, 욥은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고 있지 않느냐?” (욥 2:3)


사탄이 말합니다. 

“주님, 자기에게 정말 소중한 것은 자기에게 정말 소중한 것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입니다. 본래 자기 생명을 지키는 일이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 사람이고, 무슨 일이든 다 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이제라도 주님께서 손을 들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시면, 분명 당장 주님 앞에서 주님을 저주할 것입니다.” 

“하지만 욥의 생명만은 건드리지 말아라!”


하지만 온 몸에 악성 종기가 나고 병들어 이미 죽은 시체나 다름이 없는 욥은 하나님을 저주하지 않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욥을 포기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욥은 믿었고, 그래서 욥 역시 절대로 그 하나님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대가는 너무 큽니다. 고통, 고난, 그리고 죽음입니다. 


photo by noneunshinboo 


3.        

그렇다면 여기 욥처럼 그 믿음이 있으나 없으나, 하나님을 경외하나 하지 않으나, 흠이 없거나 있거나, 정직하게 살거나 그렇지 않거나, 악에서 멀거나 가깝거나, 매 한가지로 피할 수 없는 것이 고통이고 고난이고 죽음이면, 아니 오히려 욥처럼 하나님을 경외하고 흠이 없고 정직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에게 더 가혹하다면, 욥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경건한 삶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결국에는 우리에게 믿음이 있든 없든 우리가 여기를 고해(苦海), 즉 고통의 바다로 살아가야 한다면, 고통의 바다(苦海)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이 우리 모두의 처지라면, 고통의 바다 앞에 속수무책인 우리의 믿음이라면, 우리는 그 믿음을 계속 붙잡고 있어야 할까요? 


그러다 혹여 고통의 바다에 허우적대는 나에게 누군가 던져준 구명 튜브, 나를 태워준 구명 보트에 감사하며, 그래도 나는 그것이 없는 사람들 보다는 낫다, 만족하며 감사하며 살면 되는 걸까요? 그러다 우연히 떠밀려 도착한 곳이 야자수와 바나나로 가득한, 맑은 물이 샘솟는 썩 괜찮은 섬이라도 되면, 그냥 거기를 에덴으로 알고 살면 되는 걸까요? 억세게 운이 좋아 여기 고통의 바다를 유유히 지나가는 멋진 유람선에 올라타 고통의 바다를 남 얘기로 알고, 남 일로 여기며, 행복하고 즐겁게 살면 그것으로 다 되는 걸까요? 이러나저러나 여기 살다 죽어 하늘 나라에 가면 그게 복이지, 그러면 될까요? 


피하고 싶은,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끝까지 내 안에 속여 둘 수는 없는 질문입니다. 그렇다고 이 질문을 계속 끌어안고 살 수도 없습니다. 




4.        

마태복음서 14:24-33입니다.  

제자들이,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서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안심하여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께 말합니다. 

“주님, 주님이시면, 나더러 물 위로 걸어서, 주님께로 오라고 명령하십시오.” 


그래서 예수께서 ‘오너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갔습니다. 그러나 얼마를 가지 못하고 베드로는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물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주님, 살려주십시오!” 

그리고 예수께서 곧 손을 내밀어서, 그를 붙잡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 


photo by noneunshinboo 


주님의 말씀을 따라 배에서 내려 시커먼 물 위에 몇 발을 떼었던 베드로는 얼마를 걷지 못하고 깊고 어두운 물 속으로 빠집니다. 베드로나 우리나 보이는 거센 바람, 높은 파도를 못 본 척, 모른 척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물 위를 걷는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내가 물 안에 빠져도 나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욥에게, 베드로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닥친 문제는 내가 물 위를 걸을 수 있느냐가 아니냐가 아닙니다. 내가 물에 빠진 다음에 내가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것이 우리에게 닥친 문제입니다.  


나의 믿음이 너무 좋아 내가 물에 빠지지 않고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나의 믿음이 너무 작고 초라해 물에 빠지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지금 물 속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이유가 꼭 나의 형편없는 믿음 그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의 믿음이 많다고 거친 바람이 나를 피해서 불어오진 않을 것이고, 나의 믿음이 강하다고 깊은 물이 얕은 웅덩이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누구 한 사람은 여기서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기세로 거세게 불어오던 바람이 주님의 말씀을 따라 그 물 위를 걷던 베드로를 피해서 불어오진 않습니다. 베드로에게만 그 거센 바람이 미풍이나 순풍으로 바뀌어 불진 않습니다. ‘한 번 견딜 수 있으면 견뎌 보시지’하며 잡아먹을 듯 거칠게 달려드는 파도와 그 깊고 어둔 바다는, 주님만 믿고 그 타고 있던 배 바깥으로 발을 내딛은 베드로의 코 앞에서 갑자기 잔잔하고 부드러운 파도, 고요하고 착한 바다로 바뀌진 않습니다. 




우린 비를 피할 수 없습니다. 물론 조금 피할 수는 있을 지도 모릅니다. 나에게 우산이 없으면 남의 우산이라도 빼앗아 쓸 수 있고, 빌려서 쓸 수 있고, 그것도 없으면 남의 집 처마 밑에, 아니면 가까운 가게 안에서 잠깐 비를 피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마냥 거기에서 비를 피하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언젠가는 우산 밖으로, 처마 밖으로, 가게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내가 지금 물 속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것은 아닐까? . . . 내가 의심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 따 먹지 말라는 그 열매를, 그 의심의 열매를 먹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가 이러다 죽는 것은 아닐까? . . .  내 이 꼴을 보니 분명 나는 할 수 없는 죄인, 돌이킬 수 없는 죄인이 아닐까? . . . 믿음이 턱 없이 부족한 나라서 이러는 것일까? . . . 정말 벌을 받아도 싼 인생일까? . . . 내가 정말 벌을 받고 있는 것일까? . . . 그렇다면 내 앞에 닥친 이 어둠의 끝은 어디일까? 끝은 있을까? . . . 이렇게 계속 빠져만 들어가다 보면 그래도 그 바닥은 나올까? 그럼 그 바닥은 어디일까? . . . 언제쯤 그 바닥을 내가 치고 다시 오를 수 있을까? . . . 차라리 그 바닥을 빨리 치면 좋을 텐데, 그래야 내가 다시 저기 물 밖으로 올라올 수 있을 텐데, . . . 하지만, . . . 왜? 왜? 왜?”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도 그 꼬리를 물고 또 물고 질문을 따라 돕니다. 


(→ 1-3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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