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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회사이 Mar 04. 2023

연극은 계속되어야 한다

하나님과 함께 어둠 속을 걷는 법 1-3

사순절에 읽는 욥기 


1.        

그래서 우리는 욥을 읽습니다. 그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읽습니다. 그런데, 그 답을 찾기 어렵습니다. 사실 그것이 우리가 욥을 읽고 또 읽는 이유입니다. 쉽게 답을 찾을 수 있다면, 그 답을 확실히 안다면 아마 우리는 더 이상 그 아픈 욥을 읽지는 않을 것입니다. 뭐가 그리 재미가 있고 읽는 것이 즐거워 욥을 읽을까요? 아픈 가족 곁을 지키는 것도 시간이 지나면 지치는 법인데, 잘 알지도 못하는 그 옛날 저 먼 땅 거기에 살던 욥을 왜 굳이 읽을까요? 


photo by noneunshinboo 


에덴에서 쫓겨난, 그래서 에덴 밖의 세상을 사는 아담이 바로 욥입니다. 아담의 아내 이브가 욥의 아내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바로 ‘욥’이고 ‘욥의 아내’입니다. 우리 모두는 에덴 동산 그 밖을 사는 ‘아담’이고 ‘이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욥을 읽습니다. 피하고 싶고 외면하고 싶은 그러나 나의 얘기와 우리의 얘기로 우리는 욥을 읽습니다. 욥이 살고 있던 동쪽 땅, 그 우스라는 곳은 그 옛날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와 함께 거니시던 그 ‘에덴 동산’이 아닙니다. 너 나 할 것이 없이 우리 모두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 현실입니다. 삶의 현장입니다. 


“우스라는 곳에 욥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흠이 없고 정직하였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아들 일곱과 딸 셋이 있고, 양이 칠천 마리, 낙타가 삼천 마리, 겨릿소가 오백 쌍, 암나귀가 오백 마리나 있고, 종도 아주 많이 있었다. 그는 동방에서 으뜸가는 부자였다.” 


지금 이 욥기의 말씀에서, ‘우스’라는 지명을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여기로 바꾸고, ‘욥’이라는 이름을 나의 이름으로 바꾸고, 동방이 아니라 캐나다에서, 한국에서, 그리고 세상에서 으뜸가는 부자라고 그 구절을 바꾼다 해도, 여기는 그러나 에덴이 아닙니다. 때론 그렇게 보여도, 그렇게 여기고 싶어도, 여기는 에덴이 아니라 에덴 밖입니다. 

만약 우리가 에덴을 살고 있다면, 주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굳이 우리를 찾아오실 이유가 없으십니다. 우리 모두는 사실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2.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 그리고 욥과 아내가 살고 있는 여기는 잠시 머무는 땅, 우스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신 집이 아닙니다. 에덴으로 상징될 수 있는 하나님의 집으로 가는 길, 그 길을 가는 중에 짧게 혹은 길게 머무는 휴게소일 수도, 베이스 캠프일 수도, 소풍을 나온 곳일 수도, 혹은 여행자 숙소일 수도 있습니다. 영원히 내 집으로 알고 머물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그래서 여기서 그만 영원히 살겠다, 끝이 난 여행이 아닙니다. 돌아가야 할 에덴을 가슴에 품고 그 에덴을 향해 걷는, 그래서 우리의 존재의 이유, 우리의 까닭을 향해 가는 여행, 순례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 그 까닭은 주님이십니다. 에덴이 나의 집인 이유, 하늘 나라가 나의 집인 까닭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그 이유가 되시고 까닭이 되시는 주님을 품고 잡고 가는 것이 신앙이고, 신앙의 길입니다. 내가 왜 이리 힘들까, 왜 나만 이런 고통을 겪을까, 왜 우리는 고난 속에 갇혀 옴짝달싹 못할까, 그 이유와 까닭을 찾겠다며 걷는 길이 아닙니다. 


이제 욥은 그 아픈 길을 더듬으며 아프게 갈 것입니다. 어둠 속, 어둔 길을 걸어 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 역시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을 시작으로 ‘사순절(Lent)’을 그렇게 걸어 갈 것입니다. 이마에 재를 바르고, 흙을 바르며, ‘흙에서 나왔고, 흙인 나, 이제 나 흙으로 돌아갑니다. 아버지 하나님께로, 나의 이유이시고 까닭이신 주님께로 내가 지금 걸어서 갑니다’ 하며 걷는 길, 부활의 길입니다. 


photo by noneunshinboo 


3.        

“너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인생 무상의 말씀이 아닙니다. 태초에 그때 거기,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와 사랑의 숨결을 불어넣으시어 흙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신 그 하나님께서 새로운 생명, 영원한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으실 것이라는 희망, 소망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새로운 아담과 이브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너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창 3:19)

그러나 아프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어느새 단단히 굳어 바위가 된 우리입니다. 그러니 흙으로 돌아가려면 아플 수밖에 없습니다. 제 아무리 바위라고 우겨도 채석장이의 망치 한 번이면 산산히 부서지는 바위입니다. 아무리 바위처럼 굳고 딱딱하게 얼어붙은 얼음 산이라고 해도 작은 못 하나로 쪼개지는 얼음 산입니다. 나는 절대로 부서지지 않을래, 바위로 살래, 얼음 산으로 있을래 해도 그럴 수 없는 우리입니다. 그러니 다시 돌아가려면, 그래서 다시 영원한 생명으로 빚어져야 한다면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니 아픕니다. 


오늘 욥기의 1막 1장입니다. 욥이 주인공인 이 연극은 총 4막입니다. 이제 1막 1장입니다. 아직 멀었습니다. 


Show must go on! 

연극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멈출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드라마는 우리가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드라마에 우리는 한 명의 욥으로 있습니다. 관객이 아닌 배우로 있습니다. 때로는 욥으로, 때로는 욥의 아내로, 때로는 욥의 친구들로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사탄의 역할도 조금 할 것입니다. 때로는 내가 무슨 하나님인 양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욥으로 있을 것입니다. 욥이 싫다고 배역을 바꿔 달라 할 수도 없습니다. 


Show must go on! 

연극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우리도 지금 하늘 그 주님 곁에 있는 욥처럼 커튼콜을 받으며 주님께 박수를 받을 때가 올 것입니다. 그때가 욥인 우리가 주인공인 연극의 4막이 시작할 때입니다. 그리고 거기 그 연극의 4막이 열리는 곳은 하늘 나라입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아마도, 아니 분명 힘에 겨울 때가 많을 것입니다. 자주 멈추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이 연극은 혼자 꾸려가야 하는 모노드라마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하는 연극입니다. 함께 걷는 길은 그래도 혼자 걷는 길 보다는 낫습니다. 


The Temptation in the Wilderness, Briton Rivière, 1898, Guildhall Art Gallery


그리고 주님께서 그 연극에 함께 출연하실 것입니다. 그 길을 함께 가실 것입니다. 때로는 친구로, 때로는 애인으로, 때로는 조언자로, 때로는 돕는 이로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냥 팔짱만 끼고 계시진 않으실 것입니다. 때로는 지나가는 행인 1과 2로, 혹은 우물가의 여인 1과 2로 계시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다 외로운 나에게 말을 걸어주는 따뜻한 행인으로, 목마른 나에게 물 한 그릇을 건네 주는 고마운 여인으로 그렇게 다가오실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연극의 제목은 ‘하나님의 바다’, ‘주님의 바다’, 그리고 ‘은총의 바다’입니다. ‘고통의 바다’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 바다에서 헤엄치는 법을 가르쳐 주실 것이니, 욥과 함께 배워 그 바닷속 그 물 안을 하늘을 나는 듯, 땅 위를 뛰고 걷는 듯, 함께 헤엄쳐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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