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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회사이 Mar 09. 2023

날아와 박힌 화살,
그리고 침묵

하나님과 함께 어둠 속을 걷는 법 2-1

사순절에 함께 읽는 욥기 


“내가 태어나던 날이 차라리 사라져 버렸더라면, '남자 아이를 배었다'고 좋아하던 그 밤도 망해 버렸더라면, 그 날이 어둠에 덮여서,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께서도 그 날을 기억하지 못하셨더라면, 아예 그 날이 밝지도 않았더라면, 어둠과 사망의 그늘이 그 날을 제 것이라 하여, 검은 구름이 그 날을 덮었더라면, 낮을 어둠으로 덮어서, 그 날을 공포 속에 몰아넣었더라면, 그 밤도 흑암에 사로잡혔더라면, . . . 어머니의 태가 열리지 않아, 내가 태어나지 않았어야 하는 건데. 그래서 이 고난을 겪지 않아야 하는 건데! 어찌하여 내가 모태에서 죽지 않았던가? 어찌하여 어머니 배에서 나오는 그 순간에 숨이 끊어지지 않았던가?” (욥기 3:3-6, 10-11)

 

photo by noneunshinboo 


1.        

“우스라는 곳에 욥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흠이 없고 정직하였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아들 일곱과 딸 셋이 있고, 양이 칠천 마리, 낙타가 삼천 마리, 겨릿소가 오백 쌍, 암나귀가 오백 마리나 있고, 종도 아주 많이 있었다. 그는 동방에서 으뜸가는 부자였다.” (욥 1:1-3)


콩 심은 곳에 콩이 나고, 팥이 심은 곳에 팥이 나고. 뿌린 대로 거두는 곳. 질서와 조화가 있는 곳. 흠이 없고 정직한 사람,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 잘 사는 곳. 풍요롭고 안전하고 평화로운 곳. 여기는 욥과 욥의 아내가 살고 있는 땅, 우스라는 곳입니다. 평온한 삶입니다. 이대로만 산다면 여기가 하늘 나라라고 한다 해도 무리가 없어 보이는 곳, 그리고 욥과 욥의 아내입니다. 


“욥은 잿더미에 앉아서, 옹기 조각을 가지고 자기 몸을 긁고 있었다.” (욥 2:8)


그러나 하루 아침에 그 모든 것들이 사라졌습니다. 평화는 깨졌습니다. 욥과 욥의 아내는 깨진 그릇, 쏟아진 물이 되었습니다.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서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2:9)

욥의 아내가 내뱉은 이 말은 결코 헛 말이 아닙니다. 솟아날 구멍은 보이지 않습니다. 여기가 끝처럼 보입니다. 


“당신까지도 어리석은 여자들처럼 말하는구려. 우리가 누리는 복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는데, 어찌 재앙이라고 해서 못 받는다 하겠소?” (2:10)

욥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얼마나 그럴 수 있을지 사실 욥 자신도 모릅니다. 




2.        

화살이 날아와 욥의 가슴에 박혔습니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누가 쏜 것인지, 무엇보다 이 화살이 왜 나에게 날아와 꽂힌 것인지, 왜 내가 이 화살을 맞아야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걸 물어보고 알아볼 사이 없이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고통 속에, 침묵 속에 일주일이 흘렀습니다. 


아파만 할 수는 없습니다. 고통만 느낄 수는 없습니다. 침묵 속에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고통에 조금씩 익숙해집니다. 그 박힌 화살은 아직 거기 있습니다. 이제 비로소 박힌 화살이 보입니다. 화살을 느낍니다. 빼낸다고 없어질 화살의 흔적이고 상처입니다. 


“왜 . . . 왜 . . . 도대체 왜 나에게 . . .” 

묻습니다. 막연한 아픔이 아니라, 구체적인 아픔으로 보아야 하고 느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구체적으로 슬퍼할 수 있고, 그래야 구체적으로 그 이유를 찾아낼 수 있고, 그래야 구체적으로 이 고통과 아픔에 내가 굴복을 하든 이겨내든 할 수 있습니다. 


‘잊어라, 참아라, 용서해라, 네 탓이다, 내 잘못이다, . . .’ 그래서는 제대로 아파할 수 없고, 슬퍼할 수 없고, 제대로 누울 수 없고, 그래서는 다시 제대로 일어설 수 없습니다. 그래서는 제대로 누군가에게 항의도 할 수 없고, 제대로 무엇을 물을 수도 없고, 그러니 제대로 답을 들을 수도 없고, 그러니 제대로 용서할 수도, 또 용서받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는 제대로 새 삶을 시작할 수도 없고, 아니면 제대로 끝낼 수도 없습니다. 


Mark Rothko, Untitled (Black on Gray), 1969,70


3.        

마크 로스코의 그림입니다. 검은 어둠이 짙은 회색 위에 있습니다. 아니 검은 어둠과 짙은 회색이 서로 마주하고 있습니다. 욥이 지금 그렇습니다. 어디를 보아도 밝음은 없습니다. 


욥 자신이 비록 켠 불은 아니지만, 누군가 켠 불로 환한 방 안에서 여태껏 남 부러울 것이 없이 살았던 욥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그 불을 껐는지, 순식간에 어두워진 캄캄한 방 안에 홀로 남겨진 욥입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불러봐도 아무런 대답이 없습니다. 어두운 방 안에 혼자입니다. 며칠을 그 방 안에서 침묵 속에 욥이 가만히 있습니다. 그리고 서서히 욥의 눈에 어둠이 익어가니 조금씩 뭔가 보입니다. 내 손이 보이고 내 발이 보입니다. 내 눈 앞 몇 미터 앞에 있는 사물들이 분명치는 않지만 윤곽은 느껴져 적어도 거기에 부딪힐 만큼은 아닙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 더 고통입니다. 죽은 자식들이 보이고, 무너진 집들이 보이고, 텅 빈 소, 양, 그리고 말의 우리가 보이고, 모든 것이 불에 타 사라진 들이 보입니다. 몸에 난 종기와 상처들이 보이고, 처참한 나의 몸뚱이가 보입니다. 내가 앉았던 곳이 잿더미와 똥 무더기가 뒤섞인 곳이라는 것을 겨우 알아차립니다. 차라리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것이 나을 뻔했습니다. 보고 있으니 더 고통입니다.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차라리 모든 기억이 사라지면 이렇게 고통스럽진 않을 것입니다. 


침묵은 때가 되면 깨야 하고, 따라 눈도 귀도 떠야 합니다. 내 속에만 담아 두기엔, 꾹꾹 눌러 두기엔 너무 아프고 고통스러운 그 일들로 나의 속은 썩고 터져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긴 7일간의 침묵을 깨고 욥의 입에서 마침내 터져 나온 말은 저주와 비통의 말입니다. 


“내가 그때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태어나자 마자 차라리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나는 태어나 이런 아픔을 겪어야 하는가? 어찌하여 나는 죽지도 못하고, 죽고 싶어도 죽음은 찾아올 생각도 않고, 어찌하여 나에겐 작은 평화도, 위로도, 위안도 없고, 어찌하여 나에겐 죽음이라는 최후의 안식 마저도 허락되지 않는가? 왜 나에겐 고통과 슬픔과 두려움만이 끝없이 밀려오는가?” 


말로 하나님께 죄를 짓지 않겠다, 7일 밤과 낮을 침묵 속에 있었지만, 마침내 열린 입에서 쏟아져 나온 장마 끝 폭포수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하나님을 저주하는 것 같아 보이진 않지만, 하나하나 따져 들으면 결국 이 땅에 나를 태어나게 하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원망입니다. 항의입니다. 


photo by noneunshinboo 


4.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니, 빛이 생겼다.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셔서, 빛을 낮이라고 하시고, 어둠을 밤이라고 하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하루가 지났다.” (창세기 1:1-5)

‘빛이 있으라!’ 하시니 생긴 빛입니다. 그 빛을 하나님은 보시기에 좋았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 욥이 그 빛을 저주합니다. 

“내가 태어나던 날이 차라리 사라져 버렸더라면, ‘남자 아이를 배었다’고 좋아하던 그 밤도 망해 버렸더라면, 그 날이 어둠에 덮여서,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께서도 그 날을 기억하지 못하셨더라면, 아예 그 날이 밝지도 않았더라면, 어둠과 사망의 그늘이 그 날을 제 것이라 하여, 검은 구름이 그 날을 덮었더라면, 낮을 어둠으로 덮어서, 그 날을 공포 속에 몰아넣었더라면, 그 밤도 흑암에 사로잡혔더라면, 그 밤이 아예 날 수와 달 수에도 들지 않았더라면, . . .” (욥 3:3-6)


“어둠이 있으라! 그래야 내가 태어난 그날이 없을 것이고, 나아가 창조의 그날이 없을 것이고, 그래야 나에게 이런 고통이 없을 것이니 . . .” 

그 이유를 모르니 욥은 그 제일 처음으로 갑니다. 모든 것들이 시작된 그 맨 처음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욥입니다. 그리고 그 맨 처음 거기에는 당연히 한 분, 창조주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럴 것이라면 왜 그때 그런 창조를 하셨습니까? 왜 나를 만드셨습니까?’

하나님이 원망스럽지만, 그러나 차마 그렇게는 말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런 욥의 마음을 어느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무런 이유도 까닭도 없이 찾아온 어둠, 까닭을 찾아도 원인을 물어도 알 길이 없습니다. 이유 없고 까닭 없는 인생이 없고, 핑계 없는 무덤이 없는데. 그러나, 그 근본적인 이류를 알기엔 턱없이 부족한 우리의 머리이고 그 까닭을 죄다 담기엔 너무 좁고 작은 우리의 가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맨 처음으로 달려갑니다. 바로 하나님입니다. 결국 그 이유와 까닭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욥에게는 그랬습니다.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 악을 멀리하는 삶, 흠이 없고 정직한 삶, 우상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던 이유와 까닭이 하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욥이 침묵 속에 그 이유와 까닭을 찾아 오르고 오른 곳, 연어가 그 뿌리를 찾아 오르고 오른 거기 맨 꼭대기 거기, 그 맨 처음. 거기 내가 비롯된 곳, 그곳에 계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욥은 하나님께 달려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흔들어 깨웁니다. 


(→ 2-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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