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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회사이 Mar 10. 2023

침묵을 깨다, 깨우다

하나님과 함께 어둠 속을 걷는 법 2-2

사순절에 함께 읽는 욥기 


“어찌하여 하나님은, 고난당하는 자들을 태어나게 하셔서 빛을 보게 하시고, 이렇게 쓰디쓴 인생을 살아가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는가? 이런 사람들은 죽기를 기다려도 죽음이 찾아와 주지 않는다. 그들은 보물을 찾기보다는 죽기를 더 바라다가 무덤이라도 찾으면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데, 어찌하여 하나님은 길 잃은 사람을 붙잡아 놓으시고, 사방으로 그 길을 막으시는가? 밥을 앞에 놓고서도, 나오느니 탄식이요, 신음 소리 그칠 날이 없다. 마침내 그렇게도 두려워하던 일이 밀어닥치고, 그렇게도 무서워하던 일이 다가오고야 말았다. 내게는 평화도 없고, 안정도 없고, 안식마저 사라지고, 두려움만 끝없이 밀려온다!” (욥기 3:20-26)


photo by noneunshinboo 


1.        

“주님, 살려주십시오.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마 8:23-27)

거친 파도와 거센 비바람에 혼비백산한 제자들이 배 밑에서 주무시는 예수님을 흔들어 깨웁니다. 


여기 욥이 그 제자들처럼 소리치고 울부짖으며 흔들고 또 흔들어 하나님을 깨웁니다.

“하나님 그만 거기 높은 곳에 계십시오, 여기 이 땅으로 내려오십시오, 내 곁에 계십시오, 내 말을 들으십시오, 내 몰골을 똑똑히 보십시오, 지금 내가 죽게 생겼습니다. 차라리 나를 죽게 하십시오. 주님, 제발 일어나십시오, 내가 지금 죽게 생겼습니다.” 


“주님,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요 11:21, 32)

오빠를 잃고 주님을 보자 원망하는 마르다와 마리아처럼, 지금 욥은 하나님을 붙잡고 원망을 쏟아냅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여기 계셨다면 내 자식들이 저렇게 죽진 않았을 것입니다. 그 많던 내 재산도 다 온전히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는 어디에 계셨습니까?” 


때론 우리가 그 이유를 아는 어둠도 있습니다. 때론 우리가 그 까닭을 짐작하는 고통도 있고, 고난도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내가 지금 슬프고 아픈 이유를 잘 압니다. 놓친 사랑, 가버린 사람 때문에 아프고 슬픕니다. 손 끝이 바늘에 닿아 아프고, 손이 못에 찔려 아픕니다. 옆구리에 화살이 박히니 아프고, 내 안으로 창 끝이 들어오니 고통입니다. 사랑이 그리고 그 사람이 내가 슬픈 이유이고, 바늘과 못이 그 아픈 이유이고, 화살과 창이 그 고통의 까닭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가 정말 아프고 고통스러운 이유이고 까닭은 아닙니다. 그 이유와 까닭들이 우리의 존재가, 그리고 우리의 삶이 힘겹고 고단하고 아프고 슬픈 그 근본적인 이유와 까닭이 아닙니다. 


photo by noneunshinboo 


2.        

“하지만, 왜,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합니까? 왜, 왜 하필 나에게 이런 모진 일들이 아무런 이유도 까닭도 없이 일어나야 합니까? 


그러자 누군가 묻습니다. 

“그럼 왜 너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가? 왜 너에게만은 그런 일들이 찾아오진 않아야 하는가?” 


또 누군가가 묻습니다. 

“세상에 고통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세상에 죽어야 마땅한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지진과 홍수와 쓰나미와 화산 폭발과 전쟁과 테러와 기아와 처절한 가난 속에 살아 마땅한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그런 까닭과 이유가 넘치도록 악하고 죄 많은 사람이 있어, 당연히 그런 일들을 겪어야 마땅한 사람이 정말 세상에 얼마나 될까?” 




“세상에 욥만큼 흠이 없고 정직하게 사는 사람, 악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이 내리신 욥에 대한 평가입니다. 그렇다면 욥이 하나님이 인정하신 그런 의로운 사람이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은 그 보상과 대가로 욥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하고 복이 넘치는 삶을 살게 하셨을까요? 아니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부러워하는 삶을 살던 욥이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어찌하여 이런 삶을 살게 된 것일까 해서 그 이유와 까닭을 찾던 욥이 하나님을 발견했고 알게 되었고, 그래서 그런 삶을 허락한 그 하나님을 욥이 경외하였고, 또한 악을 더 멀리하고 흠이 없이 정직하게 살았던 것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이 그런 멋진 인생을 욥에게 약속하셨기 때문에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리고 의로운 삶을 살았을까요? 


그가 부유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게 된 것일까요? 아니면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부유하게 된 것일까요? 하나님인 나를 믿고 경외하고 그리고 흠이 없이 정직하게 살면 너는 부유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그 말을 믿었고 그렇게 살았고, 그래서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복(?)을 받았을까요? 아니면 복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었을까요? 그 둘 사이에 확실한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혹시 우리가 모르는 하나님과 욥 사이에 어떤 거래가 있었을까요? 

우리는 모릅니다. 


그럼, 욥이 지금 완전히 망해버린 이유는 또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충분히 경외하지 않아서, 충분히 악을 멀리하지 않아서, 충분히 흠이 없고 정직하게 살지 않아서 망한 것일까요? 아니면 욥이 어떤 계약을 위반해서 그랬을까요? 아니면 하나님께서 마음이 바뀌셔서 그랬을까요? 아니면 욥의 마음이 바뀌어서 그랬을까요? 


그것도 아니면 하나님을 순진한 아이처럼 너무 믿었고 의지했고 신뢰했고, 그래서 저렇게 된 것일까요? 그렇다면 눈치껏 요령껏 적당히 했으면 괜찮았을까요? 아니면 아예 그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버리고, 그 신앙을 포기하고, 지혜롭게(?) 그리고 영리하게 했으면 괜찮았을까요? 만약 지금이라도 그렇게 한다면 예전의 삶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요? 

그것 또한 우리는 모릅니다. 




3.        

날아와 나에게 박힌 화살을 만지작거리며 그 화살에게 그 날아온 이유를 아무리 물어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이 화살이 나에게 아픔과 고통을 준 것은 틀림이 없지만, 그러나 그것이 그 근본적인 고통의 이유는 아닙니다. 고통을 느낀 내가 궁극적으로 봐야 할 곳은 그래서 화살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화살이 날아온 곳을 알 수 없고, 그 쏜 사람도 알 수 없고, 쏜 이유, 내가 맞은 이유 마찬가지로 알 수 없습니다. 지금 욥이 그렇습니다. 


욥은 이제 그 동안 살고 있었던 우스라는 곳이 에덴이 아니라 ‘에덴의 동쪽’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픈 진실, 무서운 진실입니다. 피하고 싶었고 외면하고 싶었고 부정하고 싶었던 현실입니다. 욥은 지금 깨달음으로 향한 아픈 길 위에 서 있습니다. 


여기 물을 떠날 것인가, 아니면 다시 그 물 안으로 들어갈 것인가? 한 발은 이쪽에 한 발은 저 쪽에, 그 경계선 위에서 욥은 한 동안 아슬아슬 걸쳐 있을 것입니다. 무게의 추는 어디로 기울까요? 그 ‘왜’라는 질문에 어떤 답을 찾느냐에 달렸습니다. 분명한 것은 물 밖에서, 혹은 해안가를 걸으면서, 혹은 저 산등성이로 올라 먼 발치에서 그 떠난 물을 바라보며 그 ‘왜’라는 질문을 하고 또 하고 해서는 그 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photo by noneunshinboo 


4.        

침묵을 깬 욥은, 질문을 들고 그 물 안으로 다시 발을 조금씩 넣습니다. 물고기가 물 밖에서 그 물에 대한 궁금증을 풀려고 하다가는 머지않아 그 몸에 있던 물기가 다 말라, 그만 죽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물 밖이 아닌, 그렇다고 물 위도 아닌, 금방이라도 나를 삼켜버릴 것 같고, 그래서 곧 내가 빠져 죽을 것 같은 그 물 안으로 질문을 들고 들어가야 합니다. 


철 지난 바닷가를 혼자 거닐며 고민을 해 본들, 풍랑이 이는 그 바다의 이유를 찾을 길이 없고, 알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 물로 들어가야 합니다. 물고기가 물을 벗어날 수 없듯, 우리가 하나님을 벗어나 살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바다가 바다인 이유를 내가 모르는데,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이유를 나는 찾을 수 없습니다. 당신 자신이 존재의 이유이시고, 그래서 그 끝과 시작이 없으신 하나님의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욥이 살던 거기 우스는 너무 좋은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영원한 에덴일 수는 없습니다. 내가 원하고 뜻하고 계획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행복과 번영의 땅으로 보여도, 그러나 죄와 악이 영원히 침범할 수 없는 그런 성역이 아닙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아무런 고통도 고난도 모르고 죽음도 모르고 어둠도 모른 채로 영원히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여기’가 정말 ‘어디’인지 알아야 합니다. 


(→ 2-3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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