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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회사이 Mar 22. 2023

내가 아는 것에 멈춘 하나님

하나님과 함께 어둠 속을 걷는 법 3-1

사순절에 함께 읽는 욥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네 믿음이고, 온전한 길을 걷는 것이 네 희망이 아니냐? 잘 생각해 보아라. 죄 없는 사람이 망한 일이 있더냐? 정직한 사람이 멸망한 일이 있더냐? 내가 본 대로는, 악을 갈아 재난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더라. . . 인간이 하나님보다 의로울 수 있겠으며, 사람이 창조주보다 깨끗할 수 있겠느냐? . . . 재앙이 흙에서 일어나는 법도 없고, 고난이 땅에서 솟아나는 법도 없다. 인간이 고난을 타고 태어나는 것은, 불티가 위로 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욥기 4:6-7, 17; 5:6-7) 


photo by noneunshinboo 


1.        

중부중(中不中) 


중(中), 쏜 화살이 과녁을 맞혔다는 말입니다. 부중(不中), 쏜 화살이 과녁을 맞추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즉 화살이 빗나갔다는 말입니다.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과녁으로 삼고 화살을 쏘시니, 내 영혼이 그 독을 빤다. 하나님이 나를 몰아치셔서 나를 두렵게 하신다.” (욥 6:4)


지금 욥에게 화살이 중(中)했습니다. 욥이 가장 아파할 곳, 가장 고통스러워할 그 곳에 적중했습니다.  


그리고 친구들이 멀리서 욥을 찾아왔습니다. 친구 욥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재앙을 만나 처참한 지경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욥을 찾았습니다. 위로를 하겠다고, 뭐든지 욥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하겠다고 멀리서 친구들이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멀리서 욥을 보았으나, 그가 욥인 줄 알지 못하였다. 그들은 한참 뒤에야 그가 바로 욥인 줄을 알고, 슬픔을 못 이겨 소리 내어 울면서 겉옷을 찢고, 또 공중에 티끌을 날려서 머리에 뒤집어썼다. 그들은 밤낮 이레 동안을 욥과 함께 땅바닥에 앉아 있으면서도, 욥이 겪는 고통이 너무도 처참하여, 입을 열어 한 마디 말도 할 수 없었다.” (욥 2:12-13)


친구들은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그저 멀리서 지켜보는 것, 그 옆에 다가가 함께 우는 것, 함께 아파하는 것, 그리고 함께 침묵하는 것. 그게 친구들이 할 수 있는 것의 다입니다. 우는 자 곁에 함께 울고, 웃는 자 곁에 함께 웃는 친구들입니다. 그렇게 일주일을 욥 곁에 있었습니다. 


일주일. 당사자인 욥은 몰라도 아마 멀리서 온 친구들에게 그 정도면 충분하진 않아도 적은 시간은 아니다, 싶었는지 모릅니다. 그만 아픔은 잊고, 고통스럽더라도 이제 툭툭 털고 다시 일어서야 할 때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친구들은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을 평생 의지하고 살던 욥이니, 슬픔에 계속 빠져만 있지 말고 다시 일어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했던 신앙심 깊고 경건했던 그 예전의 욥으로 이제 그만 돌아갈 때가 되지 않았나, 그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여기 마침내 긴 침묵을 깬 욥입니다.  


“내가 태어나던 날이 차라리 사라져 버렸더라면, ‘남자 아이를 배었다’고 좋아하던 그 밤도 망해 버렸더라면, 그 날이 어둠에 덮여서,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께서도 그 날을 기억하지 못하셨더라면, 아예 그 날이 밝지도 않았더라면, . . .어찌하여 하나님은, 고난당하는 자들을 태어나게 하셔서 빛을 보게 하시고, 이렇게 쓰디쓴 인생을 살아가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는가?” (욥 3:3-4, 20)


그러나 친구들이 예상했고 기대했던 욥이 아닙니다. 달라진 욥입니다. 친구들의 생각과는 완전히 다른 욥입니다. 그 예전의 욥의 모습이 온데간데없는 것이야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아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생각도, 그 하는 말도, 세상을 보는 눈도, 그리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 또한 욥이 아닙니다. 달라져도 너무 달라졌습니다.   

친구들이 너무 쉽게 생각했습니다. 욥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 옛날로 그냥 다시 돌아갈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무엇보다 욥에게는 돌아갈 길도 보이지 않고, 그렇다고 앞으로 나아갈 길도 보이지 않습니다. 


photo by noneunshinboo 


2.        

한 친구가 먼저 입을 엽니다. 


“생각해 보아라. 너도 전에 많은 사람을 가르치기도 하고, 힘없는 자들의 두 팔을 굳세게 붙들어 주기도 했으며, 쓰러지는 이들을 격려하여 일어나게도 하고, 힘이 빠진 이들의 무릎을 굳게 붙들어 주기도 했다. 이제 이 일을 정작 네가 당하니까 너는 짜증스러워하고, 이 일이 정작 네게 닥치니까 낙담하는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네 믿음이고, 온전한 길을 걷는 것이 네 희망이 아니냐?” (욥 4:3-6) 


욥을 위로하겠다 그 먼 길을 왔는데. 일주일동안 곁에서 함께 울고 함께 아파했는데. 이제 위로의 말을 건넬 때다, 욥을 도와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도움도 주고 해야 할 때다, 싶었는데. 그러나 내가 알던 그 예전의 친구 욥이 아닙니다. 위로는 고사하고 욥에게 실망스럽습니다. 화가 납니다. 도저히 위로를 받겠다는 사람의 태도가 아닙니다. 


친구들은 욥이 어떤 말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어디서 누가 왜 쏜 것인지도 모르는 화살이 아직 그 몸에 깊이 박혀 있는 욥에게, 화살이 날아와 적중(的中)한 욥에게 친구들은 어떤 말을 듣고 싶었을까요? 어떤 욥을 기대했을까요? 




“모태에서 빈 손으로 태어났으니, 죽을 때에도 빈 손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주신 분도 주님이시요, 가져 가신 분도 주님이시니,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 (1:21)

여전히 하나님을 찬양하는 욥을 기대했을까요? 


“내가 누리는 복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는데, 어찌 재앙이라고 해서 못 받을까?” (2:10)

모진 고난과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혹시 말로라도 죄를 짓지는 않을까 싶어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 경건하고 신실한 그 예전의 욥을 기대했을까요? 

고난과 고통 속에 오히려 신앙이 더욱 강해진 욥을 기대했을까요? 욥을 위로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런 불굴의 신앙인 욥의 모습을 보고 싶어서, 그 욥을 통해 자신들이 오히려 위로와 위안을 얻으려고 온 것은 아니었을까요? 욥의 간증을 듣고 싶어 온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것도 아니면 혹시 친구들은 욥이 그런 일을 겪고도 과연 예전의 그 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면 욥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별 수 없이 신앙에 회의를 느끼지 않았을까, 그래서 결국 신앙을 포기하지 않을까, 그것을 알고 싶어 왔을까요? 


3.        

때로 우리는 서로에게 참 모질고 잔인합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서 기대합니다. 나에게 없는 것을 서로에게서 바랍니다. 고통과 고난 속에 있는 사람 곁에 있기 보다는, 심판자의 자리, 하나님의 자리에서 바라보거나, 혹은 추궁하고 질타하고 시험하고 유혹하는 사탄의 자리에 서 있기를 좋아합니다.  


물론 욥의 친구들이 그렇게 말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인과응보입니다. 


“보십시오. 내가 오늘 생명과 번영, 죽음과 파멸을 당신들 앞에 내놓았습니다. 내가 오늘 당신들에게 명하는 대로, 당신들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면, 당신들이 잘 되고 번성할 것입니다. 또 당신들이 들어가서 차지할 땅에서,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들이 마음을 돌려서 순종하지 않고, 빗나가서 다른 신들에게 절을 하고 섬기면, 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경고한 대로, 당신들은 반드시 망하고 맙니다. (신명기 30:15-18) 


원인이 있으니 그 결과도 있다는 말입니다.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 앞에 의롭고 선한 길을 걷는다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것이고, 그러나 네가 하나님을 떠나 악의 길, 죄인의 길을 걷는다면 하나님은 너를 벌하실 것이다, 사람은 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원칙이고, 또한 약속이라는 것입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누구신지, 하나님이 어떻게 당신의 일을 하시는지,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창조하시고 또한 창조 세계를 어떻게 운영하시는지,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 그 모든 것들을 ‘인과응보의 원칙’이 다 설명하진 못합니다. ‘인과응보의 법칙’으로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들을 우리가 안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내가 알고 또 내가 믿는 하나님은 바로 이런 분이시다, 하나님은 바로 이렇게 세상을 운영하신다, 확신 속에 말하는 욥의 친구들입니다. 지금 욥의 친구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내가 아는 하나님’, ‘내가 믿는 하나님’에 멈추어 계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나의 지식, 나의 이해, 나의 믿음, 그 나에게 갇힌 하나님입니다. 나의 틀에 갇힌 하나님입니다. 내가 이해한 하나님, 내가 아는 그만큼의 하나님은 그런 정도에서 일하십니다. 


photo by noenunshinboo 


내가 하나님 안에 담기는 믿음이 아니라, 내 안에 담긴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만큼의 하나님을 믿고, 그만큼의 이해 안에 계신 하나님을 믿는 나입니다. 그러나 내가 파악한, 내가 아는 정도의 그 하나님, 그 하나님에 대한 나의 믿음, 나의 확신, 그리고 지식과 이해 그리고 상상은 나와 우리, 그리고 세상 그 너머에 계신 하나님, 처음과 끝이 없으신 그래서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우리가 그래서 모르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의 틀에 맞추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좁게, 그리고 과감하게 해석합니다. 형편없이 작은 내가 겨우 보고 듣고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그 일어난 모든 일들을 좁게, 쉽게, 용감하게 나의 확신 속에 해석합니다. 


나와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좋고 기쁜 일들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찬성하시고 허락하시고, 또 응답하신 것이며,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보상으로, 복으로 주신 것이라고 받아들이고 또 그렇게 믿습니다. 그러나 그 일어나는 모든 아프고 슬프고 나쁜 일들, 고통과 고난은 당연히 또한 그 이유가 있어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던 일이었고, 싫어하신 것이었고, 그래서 분노하신다는 증거이며, 그래서 벌을 내리셨다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 일어난 일들을 보니, 그 결과를 보니 누구는 의로운 사람이고, 누구는 죄인이다 쉽게 판단합니다. 


“잘 되는 것을 보니, 복을 받은 것을 보니, 건강하고 부유한 것을 보니, 자식들이 다 잘 되는 것을 보니, 하는 일마다 순조롭고 모든 일이 잘 되는 것을 보니, 저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다, 의로운 사람이 분명하다, 신앙심이 깊은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저 사람에게 저런 말도 되지 않는 고난이 닥치고 더 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있는 것을 보니, 분명 저 사람은 죄인이다, 하나님께 무슨 큰 죄를 지은 것이 틀림이 없다.” 


우리는 굳이 그 상황을 그 문맥을 그 처지를 보지 않아도 듣지 않아도 내가 다 안다, 이미 본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며 그 위험하고 불안한 나의 잣대를 서슴없이 꺼내 듭니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지금 내 눈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들의 표면, 내가 좁게 해석한 현실만 바라봅니다. 대신 그 너머의 것들에 대해 눈을 감습니다. 인과응보의 정의. 그러나 우리는 현실이 꼭 그렇지 않다는 것, 그 반대의 현실이 결코 낯설지 않다는 것, 오히려 정 반대의 상황들이 여기저기 벌어지고 있다는 그 불편한 진실, 그 피할 수 없는 현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외면할 뿐입니다. 욥의 친구들 또한 그렇습니다. 


→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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