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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회사이 Mar 23. 2023

고통처럼 알아가는 하나님

하나님과 함께 어둠 속을 걷는 법 3-2

사순절에 함께 읽는 욥기 


1.        

인과응보의 정의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여기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현실이 그 인과응보의 정의에 꼭 들어맞지 않습니다. 우리도 욥의 친구들도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으며, 몸은 멀쩡하고 윤기까지 흐른다. 사람들이 흔히들 당하는 그런 고통이 그들에게는 없으며, 사람들이 으레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아예 가까이 가지 않는다. 오만은 그들의 목걸이요, 폭력은 그들의 나들이옷이다. 그들은 피둥피둥 살이 쪄서, 거만하게 눈을 치켜 뜨고 다니며, 마음에는 헛된 상상이 가득하며, 언제나 남을 비웃으며, 악의에 찬 말을 쏘아붙이고, 거만한 모습으로 폭언하기를 즐긴다. 입으로는 하늘을 비방하고, 혀로는 땅을 휩쓸고 다닌다. 하나님의 백성마저도 그들에게 홀려서, 물을 들이켜듯, 그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 덩달아 말한다. ‘하나님인들 어떻게 알 수 있으랴? 가장 높으신 분이라고 무엇이든 다 알 수가 있으랴?’ 하고 말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은 모두가 악인인데도 신세가 언제나 편하고, 재산은 늘어만 가는구나. 이렇다면, 내가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온 것과 내 손으로 죄를 짓지 않고 깨끗하게 살아온 것이 허사라는 말인가? 하나님, 주님께서는 온종일 나를 괴롭히셨으며, 아침마다 나를 벌하셨습니다.” (시편 73:4-14) 


photo by noneunshinboo 


지금 욥은 고통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친구들은 그런 욥의 현실을 외면합니다. 애써 부정합니다. 보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친구 욥의 현실인데도 그렇습니다. 오히려 벼랑 끝에 선 욥을 아예 벼랑 그 아래로 밀어버리려고 합니다. 


“잘 생각해 보아라. 죄 없는 사람이 망한 일이 있더냐? 정직한 사람이 멸망한 일이 있더냐? 내가 본 대로는, 악을 갈아 재난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더라. 모두 하나님의 입김에 쓸려 가고, 그의 콧김에 날려 갈 것들이다. 사자의 울부짖음도 잠잠해지고, 사나운 사자의 울부짖음도 그치는 날이 있다. 힘센 사자도 이빨이 부러진다. 사자도, 늙어서 먹이를 잡지 못하면, 어미를 따르던 새끼 사자들이 뿔뿔이 흩어진다” (욥 4:7-11)


왜 친구들은 욥이 처한 상황, 그 현실을 보려고 하지 않을까요? 친구들은 두렵습니다. 자신들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욥, 그리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여기의 그 불편한 현실을 외면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래서 내가 모르는 하나님, 내가 잘 안다고 했던 그러나 정말은 내가 잘 모르는 하나님, 나의 이해와 지식과 믿음을 초월해 계신 그 하나님을 계속 모르고 싶습니다. 내가 모르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운영하시는 그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두렵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욥처럼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두렵습니다. 


두려움은 가장 친한 친구의 고통에도 우리의 눈을 가리게 만듭니다. 고난과 고통 속에 있는 이웃을 보고도, 바다 건너 내가 모르는 이웃들의 아픔과 슬픔을 듣고도 보고도 우리는 공감보다는 그들이 그런 고통과 고난을 당한 이유를 찾습니다. 불행의 원인을 찾아내려 합니다. 분명 그 이유가 있는 아픔이고 슬픔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이렇다, 하나님은 이렇게 일하신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게는 복을, 이런 사람에게는 벌을 내리신다 하는 하나님에 대한 나의 갇힌 이해와 그 하나님에 대한 나의 좁은 지식, 그리고 내 생각으로 작아진 그 하나님에 대한 나의 믿음, 그리고 따라 커진 나의 확신은 결국 내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게 만듭니다. 내가 듣고 싶은 것만을 듣게 만들고, 내가 믿고 싶은 것만 믿게 만들고, 그리고 내가 알고 싶은 것만 알게 만듭니다. 


당연히 친구들의 눈에 욥의 고통이 보이질 않습니다. 욥의 아픔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욥의 자리에 없습니다. 욥과 나눌 공감은 없습니다. 따라서 욥에게 줄 위로와 위안도 없습니다. 죄를 지었으니 당연히 그런 벌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벌을 주실 만하니 주신 것입니다. 당연한 벌이니 달게 받아야 합니다. 차가운 땅, 거기 잿더미와 작은 무덤은 죄를 지은 자가 받아야 할 몫이고 가야할 곳입니다. 


“너는, 하나님이 심판을 잘못하신다고 생각하느냐? 전능하신 분께서 공의를 거짓으로 판단하신다고 생각하느냐? 네 자식들이 주님께 죄를 지으면, 주님께서 그들을 벌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 (욥 8:3-4)


서로에게 모질고 잔인합니다. 그러나 서로에게 너무 심하게 말했나 싶었는지, 이런 말도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을 만큼 또한 서로에게 친절합니다. 


“그러나 네가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며 전능하신 분께 자비를 구하면, 또 네가 정말 깨끗하고 정직하기만 하면, 주님께서는 너를 살리시려고 떨치고 일어나셔서, 네 경건한 가정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처음에는 보잘 것 없겠지만 나중에는 크게 될 것이다.” (욥 8:5-7)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8:7, 개역개정)


분명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고 믿는 우리를 나중에는 크게, 창대하게 만드실 것입니다. 분명 하나님은 우리를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잃은 욥, 그리고 죽은 자식의 무덤 앞에 넋이 나간 욥, 온 몸이 상한 욥에게, ‘너의 자식들이 주님께 죄를 지었으니, 주님께서 그들을 벌하시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고 말하고 나서 할 수 있는 말은 분명 아닙니다. 


Job and His False Comforters, Jean Fouquet


2.        

욥과 친구들입니다. 

여기 욥은 고통 속에 바닥에 뒹굴고 있고, 저기 친구들은 꼿꼿하게 서서 그 욥을 내려보고 있습니다. 저 낮은 곳에 처한 욥은 저 높은 곳에 있는 친구들을 올려 보고 있습니다. 그 거리만큼 거기에 공감은 없습니다. 고통 속 신음하는 욥과 거짓 위로자들만 있을 뿐입니다. 


지금 욥의 친구들은 욥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설마, ‘내가 욥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내가 아니어서 감사한 일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겠지요? 설마, 타인의 고난과 고통이 나에게 어떤 감사할 것을 찾는 수단이 되고 있지는 않겠지요? 




“내가 전능하신 분을 경외하든 말든, 내가 이러한 절망 속에서 허덕일 때야말로, 친구가 필요한데, 친구라는 것들은 물이 흐르다가도 마르고 말랐다가도 흐르는 개울처럼 미덥지 못하고, 배신감만 느끼게 하는구나. 얼음이 녹으면 흙탕물이 흐르고, 눈이 녹으면 물이 넘쳐흐르다가도, 날이 더워지면 쉬 마르고, 날이 뜨거워지면 흔적조차 없어지고 마는 개울. 물이 줄기를 따라서 굽이쳐 흐르다가도, 메마른 땅에 이르면 곧 끊어지고 마는 개울. . . 너희가 이 개울과 무엇이 다르냐? 너희도 내 몰골을 보고서, 두려워서 떨고 있지 않느냐? . . . 어디, 알아듣게 말 좀 해 보아라. 내가 귀기울여 듣겠다. 내 잘못이 무엇인지 말해 보아라.” (욥 6:14-21, 24)


욥이 친구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지금 나를 보고, 내 꼴을 보고, 내가 당한 일들을 보고, 오히려 두려워 떨고 있는 것이 아니냐? 너희도 나처럼 될까, 겁에 질려 있는 것이 아니냐? 너희가 알고 믿고 찬양하고 경배했던 하나님과 다르니 놀란 것이 아니냐? 두려운 것이 아니냐? 


너희 생각과 다르게, 너희 신학과 다르게, 너희의 지식과 이해와 다르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흠 없이 정직하게 그리고 악을 멀리하며 살던 내가 이런 고통을 당하니, 그게 두려운 것이 아니냐? 그래서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냐? 


너희에게도 닥칠 수 있다는 것을 애써 부정하는 것이 아니냐? 애써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냐? 나를 위로하려 온 것이 아니라, 너희가 믿고 있는 것을 확인하려고 온 것이 아니냐? 내가 이런 일을 당한 그 이유를 알고 싶어서, 그래서 나의 잘못을, 죄를 찾아내려고 온 것이 아니냐? 


나는 욥과 다르다, 그걸 확인하고 싶어 온 것이 아니냐? 너희에게는 이런 나의 고난과 고통이 절대로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서, 결국 나의 당한 일들을 통해 오히려 너희가 위로와 위안을 얻으러 온 것이 아니냐? 


무엇보다 너희의 이해와 지식 그 훨씬 넘어의 계신 하나님, 그 초월의 하나님, 너희가 모르는 그 하나님이 두려워 그러는 것이 아니냐? 


photo by noneunshinboo 


3.        

욥에게 박힌 화살을 더 깊숙히 박는 친구들입니다. 


“그래 나에게는 부중(不中)이다. 나는 화살을 피했다, 아니 화살이 빗나갔다, 아니 나에게는 그런 화살은 절대로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안도감으로는 부족합니다. 혹시 그럴 수 있다는 불안과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나에게는 절대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하나님을 잘 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운영하시는 그 법칙을 잘 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롭게 사는 사람에게는 복을 주시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벌을 주신다. 나는 그 하나님을 잘 안다. 나는 하나님의 그 법칙, 그 원칙을 알고 있고 믿고 있고, 또 성실히 따르고 있다. 그러니 나는 괜찮다. 아니 나는 괜찮을 것이다. 아니 괜찮아야 한다.” 

그러나 확신이 필요합니다. 증거가 필요합니다. 살아 있는 증거, 증인이 필요합니다. 욥입니다. 


“욥은 분명 어떤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자식들이 무슨 큰 죄를 범했기 때문에 저렇게 된 것이다.” 

친구들은 자기 위로와 위안을 욥에게서 찾으려는 것은 아닐까요? 내가 믿고, 내가 잡고, 내가 걷고 있는 그 원칙이 깨지면 안되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 원칙을 반드시 지키시는 하나님이시어야 하기 때문에, 그래야 내가 그 화살을 비껴 갈 수 있기 때문에 그러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욥의 친구들도 그리고 우리도 알고 있습니다. 차마 놓지 못하고 단단히 붙들고 있는 그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정의(Retributive Justice).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 그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다 안다, 잘 안다 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세상을 운영하시는 이치의 전부일 수 없다는 것. 물론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하는 틀일 수는 있어도, 그러나 그것은 일부이지 전부는 아니라는 것. 무엇보다 우리는 하나님을 어떤 틀에 담을 수 없다는 것. 


사실 욥도 그 틀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조금씩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는 것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은 ‘내가 아는 하나님’ 그 너머에 계신 하나님이시라는 것, 세상을 창조하시고 또한 운영하시는 하나님은 사람의 좁을 틀로는 도저히 담을 수 없는 분이시라는 것, 하나님은 아무리 애를 써도 내가 안다 할 수 없는 하나님이시고, 또한 이 세상 역시 내가 안다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일을 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 그 아픈 사실을 욥은 이제 조금씩 알아가고 있습니다. 머리가 아닌 몸으로, 마음으로, 그리고 영으로 알아가고 있습니다. 


→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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