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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회사이 Mar 24. 2023

하나님과 함께 절망을 걷다

하나님과 함께 어둠 속을 걷는 법 3-3

사순절에 함께 읽는 욥기 


1.        

욥이 욥의 친구들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어찌하여 악한 자들이 잘 사느냐? 어찌하여 그들이 늙도록 오래 살면서 번영을 누리느냐? 어찌하여 악한 자들이 자식을 낳고, 자손을 보며, 그 자손이 성장하는 것까지 본다는 말이냐? 그들의 가정에는 아무런 재난도 없고, 늘 평화가 깃들며, 하나님마저도 채찍으로 치시지 않는다. . . 그들은 그렇게 일생을 행복하게 살다가, 죽을 때에는 아무런 고통도 없이 조용하게 스올로 내려간다.  그런데도 악한 자들은, 자기들을 그냥 좀 내버려 두 라고 하나님께 불평을 한다. 이렇게 살면 되지, 하나님의 뜻을 알 필요가 무엇이냐고 한다. 전능하신 분이 누구이기에 그를 섬기며, 그에게 기도한다고 해서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고 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성공이 자기들 힘으로 이룬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나는 그들의 생각을 용납할 수 없다. 악한 자들의 등불이 꺼진 일이 있느냐? 과연 그들에게 재앙이 닥친 일이 있느냐? 하나님이 진노하시어, 그들을 고통에 빠지게 하신 적이 있느냐? . . . 그러나 어떤 사람은 행복 하고는 거리가 멀다. 고통스럽게 살다가, 고통스럽게 죽는다. . . 그런데 어찌하여 너희는 빈말로만 나를 위로하려 하느냐? 너희가 하는 말은 온통 거짓말뿐이다.” (욥 21:7-18, 25, 34)


친구들은 욥에게 무어라 답을 할까요? 


photo by noneunshinboo 


“네가 하나님을 경외한 것 때문에, 하나님이 너를 책망하시며, 너를 심판하시겠느냐? 오히려 네 죄가 많고, 네 죄악이 끝이 없으니, 그러한 것이 아니냐? . . . 너는 아직도 옛 길을 고집할 셈이냐? 악한 자들이 걷던 그 길을 고집할 셈이냐? . . . 그러므로 너는 하나님과 화해하고, 하나님을 원수로 여기지 말아라. 그러면 하나님이 너에게 은총을 베푸실 것이다.” (욥 22:4-5, 15, 21)


여전한 친구들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장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멀고, 흠이 없이 정직하게 산다 하셨던 욥입니다. 그 욥이 지금 이유 없고 까닭 모를 고난을 겪고 또 고통 속에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친구들에 의해 졸지에 악한 자가 되었습니다. 악한 자의 길을 걸었고, 그래서 지금 자식이 죽어도 할 말이 없고, 모든 재산이 사라져도 변명할 수도 항의도 할 수 없는, 벌을 받아 당연한 악인이 되어버렸습니다. 


2.        

이제 욥에게는 죽음이 희망입니다. 


“내가 살 날은 이미 다 지나갔다. 계획도 희망도 다 사라졌다. 내 친구들의 말이 '밤이 대낮이 된다' 하지만, '밝아온다' 하지만, 내가 이 어둠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내 유일한 희망은, 죽은 자들의 세계로 가는 것이다. 거기 어둠 속에 잠자리를 펴고 눕는 것뿐이다. 나는 무덤을 ‘내 아버지’라고 부르겠다. 내 주검을 파먹는 구더기를 ‘내 어머니, 내 누이들’이라고 부르겠다. 내가 희망을 둘 곳이 달리 더 있는가? 내가 희망을 둘 곳이 달리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이 있는가? 내가 죽은 자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갈 때에, 희망이 나와 함께 내려가지 못할 것이다.” (욥 17:11-16)


욥과 같이 우리에게 실패도 있고, 좌절도 있고, 절망도 있습니다. 피하고 싶다고 피해질 수 없고, 외면한다 해서 사라지지 않고, 없다 부정해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How are you?” 

“I am fine, I am good, I’m OK. Thank you, and you?” 


누가 인사로 건넨 말에 말은 그렇게 해도, 미소는 지어도, 언제까지 ‘I’m fine’, ‘I’m good’, ‘I’m OK’ 할 수는 없습니다. 적어도 나는 압니다, 하나님도 아십니다, 내가 ‘fine’, ‘good’, ‘OK’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솔직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용기 있게, 그리고 과감하게 욥처럼 절망 앞에 솔직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실패를 밥처럼 먹고, 좌절을 친구 삼고, 절망을 이불 삼아 덮고 잘 지라도, ‘왜’ 라는 질문을 잡고 하나님과 씨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그 모든 순간을 함께 걸어가야 합니다. 


“거기 죽은 자들이 있는 곳 거기까지 희망이 나를 잊지 않고 따라올까? 죽음이라는 망각이 그나마 나에게 남은 희망이 아닐까? 남은 것이 하나도 없는 그래서 완전한 절망이 나에게 유일한 희망이 아닐까? 하나님이 나와 함께 거기 저 아래까지 내려가실까?”


욥은 내가 아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아직 갇혀 있지만, 그러나 희망의 끈을 아주 놓지는 않습니다. 계속해서 그 하나님 앞을 벗어나 어디로 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욥을 내쫓기 전까지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피해 갈 곳이 없다, 그것이 희망입니다. 




3.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절망은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희망과 마찬가지로 그 절망을 역시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야 합니다. 


“성전을 허물고, 사흘만에 짓겠다던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너나 구원하여라.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마 27:40)


십자가 위, 그 벼랑 끝에 서 계셨던 하나님의 아들에게 사람들이 한 말입니다. “하나님께 죄를 지었으니 거기 십자가 위에 있는 것이 아니냐? 그렇지 않다면, 네가 죄가 없다면, 하나님의 아들이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롭게 살았다면, 하나님이 당연히 너를 구원하시지 않겠느냐? 아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거기서 내려와라.” 


욥의 친구들을 보는 듯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렇게 전합니다. 


“낮 열두 시부터 어둠이 온 땅을 덮어서,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세 시쯤에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부르짖어 말씀하셨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그것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이다. . . 다른 사람들은 ‘어디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하여 주나 두고 보자’ 하고 말하였다.” (마태복음서 27:45-49)


고통 속에, 절망 속에 계신 그리스도 예수. ‘누가 과연 그를 구해줄까?’ 누가 보아도 절망적입니다. 남은 희망은 더 이상의 고통이 없이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절망처럼 숨을 거두셨습니다. 끝입니다. 희망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보아라,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졌다. 그리고 땅이 흔들리고, 바위가 갈라지고, 무덤이 열리고, 잠자던 많은 성도의 몸이 살아났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뒤에,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도성에 들어가서, 많은 사람에게 나타났다.” (마 27:51-53)


희망은 거기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다시 시작됩니다. 절망으로 알았는데,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절망을 함께 걸어가셨습니다. 그리고 희망이 되셨습니다. 아들 예수님과 함께 절망을 걸어가셨던 그 아버지 하나님은 절망 중에 있는 우리, 고통 속에 있는 우리와 함께 걸어가십니다. 


photo by noneunshinboo 


4.        

여기 아직 희망을 놓지 않은 욥입니다. 


“내게 호흡이 남아 있는 동안은, 하나님이 내 코에 불어넣으신 숨결이 내 코에 남아 있는 한, 내가 입술로 결코 악한 말을 하지 않으며, 내가 혀로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 나는 결코 너희가 옳다고 말할 수 없다. 나는 죽기까지 내 결백을 주장하겠다. 내가 의롭다고 주장하면서 끝까지 굽히지 않아도, 내 평생에 양심에 꺼림칙한 날은 없을 것이다.” (욥 27:3-6)


욥은 이재 하나님의 재판정으로 향합니다. 


“내가 이참에 하나님을 하나님의 재판정에 고소하겠다, 내가 하나님을 하나님께 고소하겠다, 내가 모르는 하나님을 내가 하나님께, 내가 아는 하나님을 내가 모르는 하나님께 고소하겠다, 나는 하나님께 내 절망을 짊어지고 가겠다, 내가 알아야 하겠다, 내가 알았고 또한 내가 모르는 그 하나님을 알아야 하겠다.” 

그러니 고난의 길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길입니다. 


우리는 내가 하나님을 다 알아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하나님의 길을 다 알아서 내가 그 길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알기 위해 믿고, 믿기 위해 알고. 아는 것이 너무 부족해서 더 알고 싶어 가는 길이고, 믿음이 턱없이 작아서 그러나 더욱 믿고 싶어 가는 길입니다. 하나님을 더 알고 싶고, 하나님께 더 알리고 싶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싶고, 하나님께 사랑을 더 받고 싶고.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걷습니다. 함께 걸으며 알아가고, 사랑하고, 믿고 의지합니다. 


희망은 그냥 여기 있지 않고, 내가 걷는 것, 함께 걷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절망도 함께 걷고, 슬픔도 함께 걷고, 아픔도 고통도 함께 걷고, 그리고 즐거움도 기쁨도 함께 걷습니다. 그것이 희망의 길입니다. 부활의 길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나와 예수, 그렇게 단 둘이서만 걷는 길이 아닙니다. 




5.        

위로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너 나 할 것이 없이 우리 모두가 다 위로가 필요하다고 하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어디서 누구로부터 그 위로를 우리는 받아야 할까요? 


“내가 눈을 들어 산을 본다. 내 도움이 어디에서 오는가? 내 도움은 하늘과 땅을 만드신 주님에게서 온다. 주님께서는, 네가 헛발을 디디지 않게 지켜 주신다. 너를 지키시느라 졸지도 않으신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분은,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신다. (시편 121:1-4)


그렇다면 그 하늘로부터 오는 위로, 주님이 주시는 위로는 어떻게 우리에게 올까요? 우리는 그 위로를 어떻게 느낄까요? 


교회 안에서 자주 듣는 말입니다. 


“교회를 사람 보고 다니나요? 하나님 보고 다니는 거지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세요. 사람을 보지 마세요.”


그런데 그게 될까요?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사람들만 보이는데 . . . 내가 믿음이 적은 탓이겠지 . . . 하지만 ‘하나님만 보세요’라며, 신앙의 9단처럼 말하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세상살이의 수많은 고통과 외로움과 슬픔 속에 있다가 위로와 위안과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교회를 찾았는데, 교회에서, 사람들에게서 위로가 아니라 상처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젠 사람이 아닌 하나님만 바라보겠다는 말일 것입니다. 주님을, 그리고 교회를 포기할 수 없으니, 하나님만 보겠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될까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 이렇게 받아들여도 될까요?

“그러니, 당신도 나를 보지 마세요. 나도 믿지 마세요. 나도 의지하지 마세요. 그냥 나를 투명인간으로 생각하세요. 오직 주님만 바라보세요.”


교회는 건물이 아닌 그리스도를 믿고 또 그리스도의 삶을 살겠다는 사람들의 모임인데, 어떻게 사람을 보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있을까요? 하나님만 바라보고 교회에 나올 수 있을까요? 교회 안에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데, 그 내 눈에 보이는 사람들을 어떻게 보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만을 볼까요? 내 옆에 사람이 있는데, 앉아 나와 함께 예배를 드리는데, 함께 성찬식도 하고, 밥도 먹고, 성경 공부도 하고, 기도도 하는데, 어떻게 그 사람을 보지 않을 수 있을까요? 


phobo by noneunshinboo 


6.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서, 마침내 문 앞에조차도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셨다. 그 때에 한 중풍병 환자를 네 사람이 데리고 왔다. 무리 때문에 예수께로 데리고 갈 수 없어서, 예수가 계신 곳 위의 지붕을 걷어내고, 구멍을 뚫어서, 중풍병 환자가 누워 있는 자리를 달아 내렸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 환자에게 ‘이 사람아! 네 죄가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하셨다.” (마가복음서 2:2-5) 


아픈 한 사람을 위해 지붕을 뚫고 주님 앞에 데려온 사람들입니다. 그 네 명의 친구들의 믿음을 통해, 그 사랑을 보시고 그 아픈 사람을 고치신 주님입니다. 위로와 위안, 그리고 치유와 회복이 그 네 명의 친구들을 통해 찾아왔습니다. 

주님 주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던 거기가 교회이고, 그 교회 안에 아픈 사람을 데려온 그 네 명의 친구들, 가족들, 이웃들이 교회이고, 그래서 그 사람들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보시고 주님은 그 아픈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신앙의 길은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줄까 받을까 싶어 하나님만 바라보고 걷는 길이 아닙니다. 상처를 주더라도 받더라도, 그러나 어디 다른 곳에 가지 않고 그 주고받은 상처 속에 계신 주님을 보고, 그래서 서로의 얼굴에 있는 주님을 보고, 주님의 얼굴을 한 서로를 위로하고 또한 서로에게서 위로를 받으며 걷는 길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본다, 그러다 외로워지는 건 우리입니다. 자기 형제와 자매를 보지 않은 채 엄마와 아빠만 바라보는 자식을 어떤 엄마와 아빠가 좋아할까요? 내 형제 내 자매의 얼굴 안에서 내 엄마와 아빠의 얼굴을 보며, 엄마가 되고 아빠가 되어 서로의 고통을 알아주고, 서로를 보듬어주며 서로를 위로하는 자식들이 엄마와 아빠에겐 기쁨이지 않을까요?  


phobo by noneunshinboo 


나의 믿음을 보시고 그 내 친구의 고통을 치유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내 친구의 믿음을 보시고 나의 고통을 또한 치유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나의 믿음을 보시고, 이웃을 향한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웃을 향한 나의 작은 사랑을 통해 내 이웃의 아픔과 슬픔과 외로움을 치유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가장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라고 하신 주님은, 그래서 그 고통 속에 있는 이웃 안에 계십니다. 이웃의 절망 안에 계십니다. 그리고 고통과 절망 속에 있는 내 안에 계십니다. 그 주님을 내가 보는 것, 그 주님을 서로의 얼굴에서 보는 것, 나와 친구 그리고 이웃의 고통과 절망 안에서 함께 아파하시는 주님을 보는 것, 그것이 희망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것이 희망입니다.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희망입니다. 아니 희망이어야 합니다. 


희망도 같이, 절망도 같이, 기쁨도 같이, 슬픔도 같이, 즐거움도 같이, 아픔도 같이. 주님과 같이, 주님의 길을 걷는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같이, 그리고 우리 이웃과 같이 절망도 희망으로 걸어야 할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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