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서, 길 위에서 길을 가르치는 예수 (12-1)
함께 읽고 걷는 더 드라마, 예수의 길 떠난 가족
1.
“엄마, 친구들 중에서 그거 없는 애는 나 밖에 없어. 아빠, 내 친구들 다 하는데 왜 나만 . . .”
남들은 다 있는데, 나만 없습니다. 남들 다 하는데, 나만 안 합니다, 못합니다. 그래서 억울합니다. 속상합니다.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화가 납니다.
너도 나도 다 사는 게 힘들다고 합니다. 남들은 다 있는데, 남들은 다 가는데, 남들은 다 하는데, 남들은 다 그렇게 사는데, 왜 나만 그렇지 않을까? 왜 우리만 그렇지 못할까? 걱정, 근심, 불안, 그리고 우울의 원인을 가만히 보면, 짜증, 원망, 불만, 증오, 혐오, 그리고 분노의 이유를 잘 보면 그 다수에 끼지 못해서, 그 다수에 포함되지 못해서고, 그리고 그 다수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소수가 되지 못해서가 아닐까요?
2.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그런데, 그렇게 가지 못하는 이유는 이 길을 혼자 갈까, 나 혼자만 가는 것은 아닐까, 그러다 낙오자가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요? 사람들이 저 길로 가는 이유가 다 있겠지 싶어 그래서 이리저리 부는 바람에 내가 흔들려 차마 혼자 다른 길을 가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유행에 민감한 사회입니다. 유행을 앞선 사람이 되든, 유행을 만들고 이끄는 사람이 되든, 그저 유행을 따르는 사람이든. 아니면 난 그런 유행은 모른다, 모르고 산다, 관심 없다 하든.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유행 속에 살아가는 우리는 늘 피곤하고 그래서 피로감을 느낍니다. 피곤한 사회, 피로 사회를 살아갑니다. 크고 작은 이러저러한 걱정, 근심, 불안, 그리고 우울감 속에 살아갑니다. 교회를 찾는 이유 중의 하나 역시 우리가 사는 그 피로 사회 속에서 위로와 위안을 얻고 싶고, 쉼을 얻고 싶고, 마음의 평화를 얻고 싶어서는 아닐까요?
3.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널찍하여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너무나도 좁고, 그 길이 비좁아서, 그것을 찾는 사람이 적다.” (마 7:13-14)
두 개의 문과 두 개의 길이 있습니다. 남들도 다 간다 하니, 괜찮겠지 하며 가서는 안 되는 길이 있습니다. 혼자라도 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아무리 넓고 커서 누구나 들어가기 쉬워 보여도,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몰려도 너무 편안해 보여도 들어가지 말아야 할 문이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좁고 낮고 그래서 겨우 한 사람 드나들까 싶은 문, 그런데 웬일인지 사람들이 몰려 너무 비좁은 문이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내가 들어가야 할 문이 있습니다.
‘사느냐 죽느냐’, 선택입니다. ‘영원한 삶이냐 영원한 죽음이냐’, 선택입니다.
“보십시오. 내가 오늘 생명과 번영, 죽음과 파멸을 당신들 앞에 내놓았습니다. 내가 오늘 당신들에게 명하는 대로, 당신들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면, 당신들이 잘 되고 번성할 것입니다. 또 당신들이 들어가서 차지할 땅에서,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들이 마음을 돌려서 순종하지 않고, 빗나가서 다른 신들에게 절을 하고 섬기면, 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경고한 대로, 당신들은 반드시 망하고 맙니다. 당신들이 요단 강을 건너가서 차지할 그 땅에서도 오래 살지 못할 것입니다. . .” (신명기 30:15-20)
유대인들 앞에 놓인 선택이었습니다. 생명을 택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듣고 또 따르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땅에 들어가 잘 살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생명으로 이끄는 문, 생명으로 향한 길이 결코 넓고 쉽고 편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좁고 낮고 어렵고 불편합니다. 다수가 선택하는 문도 길도 아닙니다. 소수가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소수가 될 용기가 필요합니다.
남들 다 있는데 나만 없다, 그러니 나도 있어야겠다. 남들 다 가는데 나만 안 간다, 그러니 나도 가야겠다. 남들 다 저 길로 가는데 나만 다른 길로 간다, 그러니 나도 저 길로 가야겠다. 남들 다 저렇게 사는데 나만 다르게 살 수는 없다, 그러니 나도 저렇게 살아야겠다. 하지만 사실 그렇게 사는 것이 우리 생각만큼 그렇게 쉽고 편안한 삶은 아닙니다. 그 삶도 그리 만만하지 않습니다. 신앙인이 아닌 사람들의 삶이 그렇게 쉽기만 쉽고 편하기만 편한 삶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사실 남들이 사는 대로 사는 것 역시 무척 어렵고 고단합니다. 피곤하고 피로한 삶입니다.
문이 좁고 길도 비좁고, 그래서 찾는 사람이 적은 길이 고통만 있고, 온갖 고난으로 가득한 삶, 죽음을 넘나드는 박해의 삶을 꼭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의 삶이 구원이 확실하게 보장된 삶,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들어 둔, 평생 보장에 사후 보장까지 되는 그런 ‘보장 보험’의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름받은 사람은 많으나, 뽑힌 사람은 적다.” (마 22:14)
신앙의 문에 들어선 것도, 신앙의 길을 가는 것도 쉽지 않은데,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문을 열고, 그리고 신앙의 길을 열심히 걷고 했는데, 그 길 끝에 다다르니 문이 또 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가뜩이나 문도 작고 낮은데 더군다나 사람들까지 몰려 더욱 비좁아진 문이 있어, 그 안으로 들어가 혼인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이 적다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아직 그 생명의 길을 다 걸어간 사람이 아니라, 그 길 위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 왔다고 자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직 멀었다, 사실 조금 힘이 빠집니다. 하지만 그게 신앙의 길입니다.
4.
신앙은 매일 매 순간 이 문이 맞나 두들기고 이 길이 맞나 고민하는, 그래서 오히려 고뇌와 갈등 속에 있는 그래서 선택의 연속입니다. 신앙은 ‘나는 주님을 만났다, 나는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받았다, 세례도 받았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다,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나는 이미 구원을 받았다’ 모든 것이 끝났다며 흔들리지 않는 확신 속에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길 끝에 다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아직 그 길 위에 있는 사람, 그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바둑은 수 싸움이라고 합니다. 상대보다 적어도 한 수 앞은 내다볼 줄 알아야 이길 수 있습니다. 나보다 몇 수 앞을 보는 사람은 절대로 이길 수 없습니다. 상대는 결과를 이미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눈에는 바른길 같이 보이나, 마침내는 죽음에 이르는 길이 있다.” (잠언 14:12)
사실 문제는 우리의 삶이, 그리고 우리의 신앙의 삶이 그 몇 수 앞을 내다본다 해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앞을 내다볼 수도 없습니다. 인공지능을 갖춘 알파고라고 해도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문 뒤에 무엇이 있는지, 이 길 그 끝에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 길의 그 끝을 모르니 지금 여기 이게 바른 길인지 알 수 없습니다. 옳은 길로 보이지만 결국 죽음에 이르는 길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믿는 성도들 가운데 마침내 구원을 받을 사람은 그래서 아~주 적다는 것을 말하시려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의 길을 끝까지 걷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옳은 문을 열고, 바른 길을 걷기 위해서, 끝까지 가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함께 걷는 지혜’, ‘함께 그 길을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5.
“거짓 예언자들을 살펴라. 그들은 양의 탈을 쓰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굶주린 이리들이다.” (마 7:15)
적은 내부에 있다. 진리입니다. 내부의 적. 신앙의 삶에도 진리이고 또한 현실입니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잘 살피고 양 떼를 잘 보살피십시오. 성령이 여러분을 양 떼 가운데에 감독으로 세우셔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피로 사신 교회를 돌보게 하셨습니다. 내가 떠난 뒤에, 사나운 이리들이 여러분 가운데로 들어와서, 양 떼를 마구 해하리라는 것을 나는 압니다. 바로 여러분 가운데서도, 제자들을 이탈시켜서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것을 말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행 20:28-30)
예루살렘으로 떠나면서 바울 사도가 정든 교회와 신자들에게 유언처럼 남긴 말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받을 박해와 고통, 그리고 앞으로 있을 죽음. 그러나 거기 예루살렘과 로마에서만 그런 신앙에 대한 도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로운 여기 교회 안, 여기 신앙 공동체 안에서도 언제든지 믿음의 길에서 제자들을 벗어나게 할 사람, 거짓 예언자, 거짓 선생, 그리고 거짓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피로 세우신 교회인데 그렇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교회와 신자가 처한 현실입니다. 그래서 긴장을 늦추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양 무리에 섞여 있는 염소는 사실 그리 큰 적은 아닙니다. 염소의 존재가 귀찮고 번거롭고 신경은 무척 쓰이지만 어느 만큼은 무시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다른 데에 있습니다. 외부에 있는 늑대와 이리, 물론 문제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양들을 더욱 하나로 뭉치게 만들기도 합니다. 외부가 아닌, 내부에 있는 양 무리에 섞여 양의 탈을 쓰고 양처럼 있는 늑대와 이리가 사실은 더 큰 문제입니다.
신앙의 문을 열고 들어선 길, 그 신앙의 길을 걷고 있는 양들을 그 무리에서 이탈하게 만들고, 그 길에서 벗어나게 만들고, 마침내 그 양들을 잡아먹어버리는 늑대와 이리가 바로 치명적인 문제이고 그래서 치명적인 적입니다.
그런데, 내부의 적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쉽게 알아챌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동료이기 때문입니다. 나와 같은 동료, 그리스도 신자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예언자입니다. 능력자입니다. 누구보다 신앙심도 깊고 겸손 한 듯도 보이고 여러모로 그 보임새가 너무 훌륭합니다. 그러니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걷는 지혜’, ‘함께 거짓 예언자와 거짓 가르침을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