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서, 길 위에서 길을 가르치는 예수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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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누가 누군지 그것을 알아내는 방법이 있습니다. 열매입니다. 그 사람의 행실과 실천입니다. 그리고 결과입니다. 나무를 알기 위해서는 그 열매를 보아야 합니다. 그 꽃을 보아도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 꽃 향기와 그 꽃의 화려함에 취해 그 나무를 제대로 알기 어렵습니다.
“너희는 그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야 한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따며,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딸 수 있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찍어서 불 속에 던진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 열매를 보고 그 사람들을 알아야 한다." (마 7:16-20)
바로 그 사람의 말과 보임새가 아니라 행위, 실천 그리고 그 결과를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분명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 (마 7:21-23)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그 불법을 행하는 사람들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즉 신자들입니다. 게다가 예언자로 불리는 사람들을 포함해서 신앙이 깊다는 사람들입니다. ‘주님, 주님’ 하는 사람,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도 하고, 귀신도 쫓아내고, 기적도 행하는 사람입니다.
표현이 적당하진 않지만 말하자면 그렇고 그런 신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교회 안과 밖에서 누구보다 ‘신앙심이 깊다’, ‘신앙인의 모범이다’, 칭찬도 듣고 존경도 받는 사람입니다. 우리 눈에는 구원이 확실히 예약된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정작 주님은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른다’ 하십니다. 우리 눈에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으로 보이는데, 주님은 아니다 하십니다. 오히려 이리와 늑대이고, 또한 뽑아 태울 가라지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다가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과 같다. 사람들이 잠자는 동안에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뿌리고 갔다. 밀이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도 보였다. 그래서 주인의 종들이 와서, 그에게 말하였다. ‘주인 어른, 어른께서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에서 생겼습니까?’ 주인이 종들에게 말하기를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였다. 종들이 주인에게 말하기를 ‘그러면 우리가 가서, 그것들을 뽑아 버릴까요?’ 하였다. 그러나 주인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가라지와 함께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추수할 때에, 내가 추수꾼에게, 먼저 가라지를 뽑아 단으로 묶어서 불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에 거두어들이라고 하겠다.’” (마 13:24-30)
‘나는 도무지 너를 모른다’ 하셨지만, 사실 주님은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다 보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릅니다. 그가 누군지 도무지 모릅니다. 누가 누군지 잘 모릅니다. 심판대에 서서야 그제야 비로소 압니다. 그러나 그 때는 너무 늦습니다. 내가 어느 쪽에 있었는지, 누구를 따랐는지 그 깨달음이 너무 늦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 열매를 보고 그 사람들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 7:20)
2.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다.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내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 .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운 것이다. 그것은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 .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것은 이것이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 (요 15:9-17)
작은 사람 하나도 잃지 않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그것이 하늘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작은 사람 중에 하나가 바로 우리입니다. 바로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이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께서 오신 이유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받은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의 은총을 우리는 열매, 즉 사랑으로 다시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는 그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 말씀을 실천하는 삶을 통해서 그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다 자기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고 할 것이다.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서,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그 집을 반석 위에 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서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자기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고 할 것이다.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서, 그 집에 들이치니, 무너졌다. 그리고 그 무너짐이 엄청났다.” (마 7:24-27)
신앙인이라고 해서, 신앙인들이 모인 교회라고 해서, 비가 피해 내리고, 홍수가 비껴 가고, 바람이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그리고 주님의 말씀, 그 단단한 바위, 그 위에 세운 신앙이고 교회라고 해서 그 단단한 바위가 방패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악인은 쓰러져서 사라지지만, 의인의 집은 든든히 서 있다.” (잠언 12:7)
의인, 그리고 의인의 집이 든든히 서 있을 수 있는 이유. 비와 홍수와 바람에도 불구하고 그 바위 위에 세워진 신앙과 교회가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 이유는 주께서 지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믿는 사람에게 어려운 일, 고난과 고통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무너지게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약속입니다. 대신 너희는 내 말을 듣지만 말고, 들은 그대로 실천해라, 믿는 그대로 살아라, 그것이 주님의 명령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악한 사람의 집은 망하고, 정직한 사람의 장막은 흥한다.” (잠언 14:11)
그래서 산상설교, 혹은 산상수훈의 마지막 말씀은 바로 반석 위에 지은 집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제껏 예수께서 산 위에서 가르치신 그 모든 말씀을 듣기만 한다면 그건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다는 것입니다.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인이란 그리스도 예수의 말씀을 듣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에게 필요한 지혜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 지혜, 그리고 바르고 옳은 길을 함께 분별하는 지혜,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함께 실천하며 주님의 길을 함께 걷는 지혜입니다.
3.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니, 무리가 그의 가르침에 놀랐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마 7:28-29)
사람들이 놀랍니다. 마치 그 옛날 산 위의 모세를 보는 듯합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에 놀랍니다. 그 권위 있는 가르침, 그 권위 있는 예수의 모습에 놀랍니다. 사실 지금도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많이 놀랍니다. 특히 산상설교에 놀랍니다. 무엇보다 그 팔복의 가르침에 놀랍니다. 그래서 누구는 예수를 한 명의 성자 혹은 성인으로, 위대한 철학자 혹은 사상가로, 인류의 큰 스승으로 알고 놀랍니다. 그런데 놀랄 뿐입니다. 신앙인들도 그럴 수 있습니다. 놀라는 것에서 멈춘다면 그렇습니다.
그 가르침이 놀랍고 위대하다, 그러나 우리 사람이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실천은 불가능하다, 수도자나 성직자가 해야 할 일이다, 그것도 성인들만 가능하다, 그래서 우리가 그들을 성인이라 부르는 것이 아니냐.
아니다, 사람은 불가능하다, 겸손히 기도하고 예배하고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정도만 하면 된다, 그것이 주님의 가르침의 의도다. 이 땅에서는 불가능하다, 하늘 나라에서나 가능하다, 이건 하늘 나라의 도덕과 윤리를 말한 것이다, 이 땅에서 살아갈 우리의 삶은 아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행함으로 얻는 구원이 아니다.
이러저러 변명과 구실과 해석과 설명이 지난 2 천년간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핵심은 내가 할 수 있다 없다, 가능하다 불가능하다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그 삶을, 그 가르침을 실천하는 삶을 살겠다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자세, 말씀을 살겠다는 의지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삶, 말씀을 실천하며 걷는 그 길을 돕고 인도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내가 주님의 가르침을 삶으로 살고자 하니 성령께서 나를 도우십시오, 이끄십시오, 그 인도하심에 따르겠습니다, 하는 작심(作心)의 문제이고, 그 길을 향해 매일 한 발을 떼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예수께서 산상설교,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마치십니다.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그 놀란 사람들을 뒤로 한 채 예수께서는 산에서 내려가십니다. 예수께서 그 가르치신 말씀을 직접 사람들 가운데서 사실 것입니다.
그때 거기 사람들, 그리고 지금 여기 우리 앞에 선택이 놓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놀란 채로 거기 산에서 계속 있을 것인가? 아니면 예수님을 따라 산에서 내려와 현실 가운데에서, 우리의 삶 가운데에서 그 말씀을 실천하며 살 것인가? 선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