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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회사이 Sep 28. 2021

스카이트레인,
땅 속을 달려도 하늘을 난다

노는(遊)신부의 틈과 사이로 본 밴쿠버의 여백이 있는 풍경(3)


밴쿠버의 하늘기차 스카이트레인은 하늘을 달리고 땅 속으로도 달린다. 

난 기차 여행이 좋다. 여기 밴쿠버로 온 후 기차 여행은 겨우 전철(SkyTrain)로 메트로 밴쿠버 내를 이동하는 것이 전부이긴 하지만, 그래도 난 좋아한다. 공중을 산책하듯 달리며 구경하는 밴쿠버의 온갖 모양새의 집들과 꽃밭들, 거리에 늘어선 가게들과 걷는 사람들과 차량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공원들과 숲들과 나무들. 해가 있으면 있는 대로, 비가 오면 비 오는 대로, 구경하는 재미가 제법 쏠쏠한 관광 열차 보다는 백배는 싼 값에 밴쿠버 풍경들을 감상할 수 있는 스카이트레인이 좋다. 


밴쿠버의 스카이트레인은 철이와 메텔의 은하철도 999의 밴쿠버 버전이다. 놀이공원의 공중을 도는 놀이 열차와도 닮았다. 그런데 은하철도 999에는 기관사는 몰라도 분명 차장이 동승하는 걸로 봐서는 차장도 기관사도 없는 스카이트레인은 놀이공원에 있는 그것과 더 유사하다고 누군 말하겠지만, 그러나 가끔 폴리스 같아 보이지 않는 폴리스인 트랜짓 폴리스(Metro Vancouver Transit Police)들이 표 검사를 하거나 문제 해결을 위해 타기도 하니, 기차를 운전하거나 줄곧 동승하는 차장은 아니라 할 지라도,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차표 검사를 수행하는 면에 있어서 밴쿠버의 은하철도 999라 할 만하다. 그리고 차장도 실은 투명인간이고 보면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옷을 벗으면 없다고 보아도 – 사실 보이지 않는 사람을 없다고 ‘보는’ 것도 이상하다 – 괜찮지 않을까 싶다. 사실 그 차장이 하는 대사의 많은 부분이 “다음 역은 어디 어디고 . . .” 정도에서 머무는 게 대부분인 것을 보면 스카이트레인의 방송 안내 멘트와 별반 다를 것이 없으니 또한 은하철도 999라 할 만하다. 

아무튼 그 차장, 없으면서 있고 있으면서 없으니 그런 면에서 밴쿠버의 스카이트레인은 확실히 은하철도 999와 닮았다. 또한 운전자 혹은 기관사 없이 컴퓨터에 의해 무인 자동으로 운행된다는 면에서도 확실히 미래적인 은하철도 999와 유사하다 하겠다. 물론 은하철도 999는 공간적 시간적 배경과 그 기차의 운용적 기술적인 면에서는 상당히 미래적인 반면 그 증기 기관차의 외관과 내부의 구조가 너무 과거적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 면에선 확실히 밴쿠버의 스카이트레인이 더 미래적이다. 정확히 어떤 영화인지 제목은 기억 나진 않으나 가까운 미래를 다룬 한 할리우드 영화에서 밴쿠버의 스카이트레인을 본 적이 있다. 추격 장면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정말 미래에 있을 법한 그런 운송 수단으로 제법 그럴싸한 배경으로 보여졌다. 아무튼 밴쿠버의 하늘기차, 스카이트레인은 확실히 은하철도 999와 닮았다. 


photo by noneunshinboo


밴쿠버의 스카이트레인. 누구는 쇼핑 몰에, 공원에, 바닷가에 가기 위해, 누구는 학교로, 집으로, 일터로 가기 위해, 또 누구는 버스나 배로 갈아타기 위해, 또 누구는 밴쿠버를 구경하려고, 또 누구는 나처럼 그냥 기차가 타고 싶고, 기차 여행을 하고 싶어 탄다. 어느새 밝은 곳 달리던 그 하늘기차는 밴쿠버 다운타운 즈음 땅 속 어둔 지하기차가 된다. 하지만 그것도 좋다. 열차 안, 여기 저기 흩어져 앉고 서고 기대고, 타고 내리고 하는 사람들 보는 것도 재밌고 좋다.  


밴쿠버의 스카이트레인은 강원도의 힘, 동해로 가는 기차를, 기차 밖과 안 풍경을 그립게 한다. 둘은 분명 다른데도 그렇다. 그러나 왜 그 둘이 연결될까 싶어 굳이 공통점을 찾자면 그건 바다다. 그 동해로 가는 기차가 멈추지 않고 계속 갈 수만 있다면 그 바다의 끝에 있는 도시들 중 하나가 밴쿠버다. 동해바다, 나아가 태평양을 가운데 두고 마주하는 밴쿠버. 무엇보다 밴쿠버 스카이트레인에서도 바다를 볼 수 있다. 바다 위 혹은 밑이라 하기엔 조금 민망하지만 아무튼 엄밀하게 말해 바다 그 물 위로도 그 물 밑으로도 스카이트레인은 달린다. 



 

그때 거기, 동해로 향한 그 기차 안과 밖 풍경, 그리고 어둔 터널. 짧고, 때로는 긴 터널의 어둠은 기차 밖, 밝음의 풍경으로 향하던 나의 시선과 관심을 나의 안, 그리고 기차 안 풍경으로 비로소 돌리게 한다. 그때의 그 짙은 어둠의 터널들. 그리고 그 기차 안에 있는 나. 언제 그 어둠의 터널 끝날지 내가 알 수 없고, 또 정할 수 없다. 목적지가 있기에 맡길 수밖에 없다. 그건 이 기차가 그곳으로 나를 실어다 줄 거라는 신뢰 때문일 수도, 그곳에 대해 갖는 기대 때문일 수도, 그곳에 곧 도착할 거라는 희망 때문일 수도 있다. 어둠은 창 바깥 풍경에 넋 놓고 있던 나로 하여금 이제 들어선 어둠 속 창에 비친 넋 놓은 내 얼굴을 보게 한다. 그러나 오래 보진 않는다. 긴 자기애는 지치게 한다. 창 밖 어둠에 조금 익숙해지면 창에 비친 내 얼굴 주변 여기 저기 의자에 흩어져 앉아 있는 동행자들, 여행자들, 얼굴들이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내 얼굴 사라지고 이들의 얼굴들이 보이고, 그래서 본다. 어디까지 가는지, 어디서 오는지, 어디서 타고 내리는지, 혼자 가는지 같이 가는지, 모르지만 본다. 어떤 이야기들을 안고 가는 것일까? 이야기들이 여기 저기에 흩어져 있다. 말 걸고, 말 나누고, 그럴까 싶은 나와 같이 가는 얼굴들 그리고 이야기들. 밖으로 향하는 신뢰와 기대와 희망은 조금씩 안으로 향한다. 


동해로 그렇게 기차는 가고, 우리는 기차 안 어디쯤 졸고 깨고, 뒤척이고 서성이고, 삼삼오오 수다에 즐겁고, 기분 좋게 지쳐가고, 갖고 온 것 나눠 먹고 마시고, 혹은 혼자도 좋았다. 그렇게 밖의 짙은 어둠을 안의 옅은 밝음으로 가면 좋겠다. 그럼 어느새 어둠은 저만치 밀려 가고, 밝음은 이만치 밀려오고, 서로 자리를 내어 주고 내어 받고, 그런 사이에 어둠은 더욱 옅어지고 밝음은 더욱 짙어가지 않을까? 밝음이 점으로 사라졌듯, 또 밝음은 점으로 올 것이다. 커다란 캔버스로 오지 않는다. 어둠이 모르는 사이 느닷없이 찾아왔듯, 또 어둠은 그렇게 사라질 것이다. 밝음과 어둠의 시간과 공간, 다른 혹은 같은 경험들과 얼굴들과 이야기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그 기차 달리고, 여행객들 그 안에 있다. 우리는 함께 가고 있다. 단지 먼저 혹은 나중에 탔거나 탈 것이거나, 내렸거나 내릴 것이거나 할 뿐이다. 


그렇게 동해로 향하던 기차 생각에 스카이트레인의 다운타운 끝 역, 남들 다 내리는데 내리지 않고 계속 앉아 있다. 멈춘 스카이트레인이 다시 달리기 시작하자, 어느새 시야 다시 밝아진다. 은하철도 999처럼 ‘기차가 어둠을 헤치고 은하수를 건너’는 것은 아니지만, 땅 속 하늘기차가 어느새 다운타운 밖으로 다시 하늘로 나간다. 땅 속 터널을 달렸던 하늘기차는 이제 다시 하늘을 달린다. 터널이 저만치 뒤에 보이고, 분명 뒤였는데 이제 앞이 되어 뒤가 아닌 앞으로 기차는 가고, 어둠은 더욱 밝음이 되어 가고. 


내가 어둠에서 빠져나온 건지, 어둠이 내게서 빠져나간 건지. 

내가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온 건지, 어둠이 나의 터널을 빠져나간 건지. 

기차는 가고 나는 그 기차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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