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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회사이 Jan 31. 2022

길 위에 선 사람들

노는(遊)신부의 더 드라마, 길 잃은 양을 찾아 길 떠난 예수 (11)


“ . . . (그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 요한은 요단 강 주변 온 지역을 찾아가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 .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 길을 곧게 하여라. 모든 골짜기는 메우고, 모든 산과 언덕은 평평하게 하고, 굽은 것은 곧게 하고, 험한 길은 평탄하게 해야 할 것이니,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것이다.” 요한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진노를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누가복음 3:3-7)


photo by noneunshinboo 


피해야 한다는 것은 어찌 알았을까?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누가 일러주지 않아도,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귀신같이 안다. 그런데, 뭐가 허전하다. 남들 다 간다 해서 그럼 나도 간다 하며 허겁지겁 오느라 중요한 걸 몰랐다. 무엇을, 어떻게, 그리고 왜 피하라고 하는 것일까? 


가쁜 숨 애써 참고 숨기며 그냥 지나가다 들렸다는 듯, 이건 무슨 줄이지 무심한 척, 길게 늘어선 긴 줄이 영 마땅친 않지만 짐짓 태연한 척, 슬그머니 줄 그 끄트머리에 선다. 남들 볼까 싶어 나 아닌 척, 그저 조용히 왔다 남들 다 받는다는 그 세례 받고, 남들 다 받는 다는 그 은혜 받고, 누구도 모르게 티나지 않게 있다가 표나지 않게 사라지려고 했다. 

그런데, 


“이 독사의 자식들아!”

그만 들키고 말았다. 여기 긴 줄 사람들 사이에 숨은 나를 그가 알아본다. 지금 나에게로 온다. 그리고 나에게 말한다. 그런데 이 요한은 지금껏 광야에서 살았다는데 어찌 나를 알았을까? 이 사람이 혹시 온다는 그분인가? 메시아인가? 




거칠 것 없고 거칠기 그지없는 광야, 그 거친 광야의 거친 요한이 전혀 거칠 것 없이 거칠고 또 거칠게 말한다. 사실 성령께서 인도하신 대로 그에 따라 살고 말하는 요한이다. 그에게 거칠게 뭐가 있을까? 광야의 요한은 성문 안에 살지 않는다. 성문 밖에 산다. 그는 성문 안을 지향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거칠 것이 없다. 눈치 볼 일도 없다. 그는 성문 밖에서 태어나고 살고 죽는 예수와 무척 닮았다. 변방 중의 변방인 광야에서, 변방인으로, 광야의 외치는 소리로 사는 요한은 거칠고 거침이 없다. 그의 외침 역시 거칠고 거침이 없어 상처를 더 깊고 더 넓게 쓰리고 아리게 한다. 그 아픈 상처는 그의 외침으로 생긴 것이 아니다. 이미 거기 있었다. 지금껏 아무렇지도 않은 듯 끌어안고 살았던 상처들이다. 그러나 이제 비로소 요한의 거친 외침으로 마취 풀린 듯 그 상처가 아프다.  


그래서 회개는 아프다. 회개의 세례는 소금물에 상처 담근 듯, 그 물에 문지르고 씻어내는 듯 아프다. 요단강 맑은 물 아닌 마치 죽음의 바다, 소금 바다에 상처 투성이 몸을 던진 것처럼 아프다. 세례가 아픈 것인 줄 알았다면 미리 마음의 준비, 몸의 준비 운동이라도 하고 왔을 텐데. 씻은 듯 사라질 줄 알았는데, 씻어 더 뚜렷해질 줄 미처 몰랐다. 사실 회개가 아픈 것도 아니고 세례가 아픈 것도 아니고, 그 상처가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인데, 내가 피하는 것은 회개이고 세례다. 


photo by noneunshinboo 


내 손, 내 발, 내 몸과 내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들 그 흔적들을 애써 눈 감고 감추고 없다 하지 않고 피하지 않고 눈 감지 않고 맨 눈으로 보는 것은 아프다. ‘나는 죄인이다’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아프다. 죄는 상처를 남긴다. 상처를 아무리 덧대고 덧대도 그 상처가 어디로 갈까? 그 아픔을 어떻게 할까? 덧대고 무뎌진 상처, 그리고 그 아픔을 모르는 무감각은 결국 나를 끝으로 몰아갈 것이다. 그러나 그 전에 감추지 않고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상처에 반응하고 아파하는 것은 오히려 상처가 주는 기회고 은총이다. 아픔을 느낄 수 있음은 아직 내가 살아 있음인 까닭이고 여전히 내가 희망을 하고 있음인 까닭이다. 그래서 그 상처, 그 아픔이 나를 살리는 회개의 바다, 용서의 바다, 생명의 바다로 이끌어 그 앞에 서게 한다. 


저 긴 줄, 고개 숙인 채, 제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 지금 길을 걷다 갖는 아픔 잠깐 속여줄 진통제 몇 알 받겠다 온 것도, 앞으로의 아픔 미리 예방하겠다 백신 맞아두겠다 온 것도 아니다. 이제까지 걷던 그 길에 돌아서 이제 참 길을 걷고 참 삶을 사는 참 나가 되겠다고 참 길 위에 선 것이다. 


‘아팠고 또 아프게 했다 그러나 이젠 아프지 않고 아프게 하지 않겠다’ 하며 길 위에 선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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