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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회사이 Feb 02. 2022

피할 길, 살 길

노는(遊)신부의 더 드라마, 길 잃은 양을 찾아 길 떠난 예수 (12)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진노를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어라. 너희는 속으로 ‘아브라함은 우리의 조상이다’ 하고 말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 도끼를 이미 나무 뿌리에 갖다 놓으셨다. 그러므로 놓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어서 불 속에 던지신다.” (눅 3:7-9)


photo by noneunshinboo


여기 아브라함의 후손인 나. 이 정도면, 나 정도면, 꽤 잘하고 있다고 잘 살고 있다고 자부하며 여태껏 그렇게 믿었고 알았고 살았다. 남들도, 이 긴 줄에 선 이들도 다 그렇게 살아왔다. 그리고 지금 요한이 주는 세례 한 번 받는다 해서 뭔 큰 일이 날까 싶어 왔다. 일단 혹 모르니 보험 삼아 받아 두면 나쁘진 않겠다 싶어, 그 세례 한 번 받아볼까 싶어 왔다. 그를 다시 또 볼까, 여기 다시 또 올까 싶어, 한 번 받으면 그걸로 끝이겠지 싶어 왔다. 남들 모르게 조용히 왔다 조용히 가면 될까 싶어, 여기 그 긴 줄에 섰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회개라는 것이, 회개의 세례라는 것이. 


죄, 그리고 죄의 고백과 회개. 그리고 용서. 죽어야 다시 사는 회개의 세례의 신비. 알았던 상처도 몰랐던 상처도 감추었던 상처도 훤히 드러나게 하여 나를 더욱 쓰리고 아리게 만드는 회개의 세례는 아프다, 피하고 싶다. 소금물에 상처 담근 듯 그 물에 문지르고 씻어내는 듯 아프다. 그 물 멋모르고 들이키다 점점 타는 목마름으로 아프다. 




회개의 세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와 그 죄의 상처를 그리고 그런 나를 맨 눈으로, 맨 몸으로, 맨 정신으로 보는 것이다. 남 몰래 혼자 보는 것이 아니라 불빛 아래 드러내는 것이다. 죽은 뼈 죽은 살이 새 뼈 새 살로 다시 사는 것이다.  

소금 바다에 뛰어들어, 그 물로 손 닦고, 얼굴 닦고, 몸과 마음 다 닦고, 그 죽음의 바다에 내 몸 완전히 던져, 빠져, 죄에 죽은 ‘나’ 되는 것이다. 회개의 세례는 ‘죽은 나’ 되어 ‘새로운 나’ 되고 ‘새로운 나’로 사는 그 시작이다.  


회개의 세례는 고작 군데 군데 돋은 새 살에 만족하며 가슴 뿌듯함으로 죄의식에서 벗어나 가볍고 홀가분하게 살아가기 위한 단순한 물 첨벙거림이 아니다. 이전의 삶에서 완전히 달라진 바뀐 삶을 살겠다는, 그래서 이전의 삶을 전혀 찾아볼 수 없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돌려 살겠다는 마음먹음(作心)이며, 그 시작이다. 그 먹은 마음이 걷고 사는 마음이 되고 걷고 사는 몸이 될 때 비로소 살아있는 회개가 된다. 죽음의 바다가 생명의 바다가 된다. 


회개의 세례는 내가 어떤 땅에 심겨져 뿌리를 내린 어떤 나무인지를 아는 그 시작이다. 회개의 세례는 끝이 아니다. 그래서 회계는 시작과 끝의 한 점이 아닌 그 사이를 대나무가 매듭 지으며 자라고 커가듯, 그 사이를 내가 살아야 마땅한 삶, 주님의 눈에 옳은 삶을 사는 것이다. 요한은 그걸 ‘회개의 열매’ 혹은 ‘열매를 맺는 회개’라 부른다. 그래서 그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다. 


회개의 세례는 땅에 든든히 뿌리를 박고, 철 따라 내리는 비와 눈과 바람을 맞으며 가지를 뻗고 잎을 내고 꽃을 피우고, 그 꽃이 진 자리에서 열매를 맺으며 또 자라는 것이다. 땅에서 솟고 하늘에서 내리는 생명의 물을 받고 그 물을 가지에 꽃에 열매에 내어주고 또 내 가지에 깃든 새들과 내 주변의 이웃으로 흘려보내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 회개의 사람은 조금씩 조금씩 새 사람이 되어 간다. 그래서 회개는 그리고 회개의 세례는 끝이 아니다. 


photo by noneunshinboo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입니다.” 

“이 돌들로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만드실 수 있으시다. ”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속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너희에게 정해 준 것보다 더 받지 말아라. 아무에게도 협박하여 억지로 빼앗거나, 거짓 고소를 하여 빼앗거나, 속여서 빼앗지 말고, 너희의 봉급으로 만족하게 여겨라.” (눅 3:10-14)


이게 다는 아니다. 하지만 우선 이것부터 시작하자. 일단 요한이 지금 하는 말 곧이듣고 곧이곧대로 하자. 그대로 하면 된다. 


그런데, 그들은 요한에게서 어떤 답을 기대했을까? 무슨 답이 나오길 바랐을까? 율법 준수와 종교적 의무 이행과 관련한 것들, 종교적 실천과 행위에 관한 것들? 그 선행 혹은 자선? 영성 훈련류의 어떤 것들? 뭔가 경건해 보이고 신심을 보여줄 만한 그런 것들? 


그러나 요한은 그런 것들에 대해 말을 하지 않는다. 남 속이지 말고 남의 것 빼앗지 말고, 내 것이라 잔뜩 쌓아두지 말고, 우리 가운데 춥고 배고픈 사람이 없도록 그들을 돕고, 나아가 내가 가진 것을 그들과 나누라고, 관념적 추상적이 아닌 구체적이고 실질적이고 실제적인 사회적 경제적 정의, 윤리, 그리고 의무를 다하라고 한다. 애매모호하게 부르짖는 사랑과 정의와 자비는 말고,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고 살갗에 닿는 행동, 그 실천을 말한다. 


무엇이 하기에 더 쉬울까? 무엇이 따르기에 더 힘이 들까? 

그때 거기 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일까, 아니면 지금 여기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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