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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회사이 Feb 07. 2022

가슴 속에 담아 둔 말씀

노는(遊)신부의 더 드라마, 길 잃은 양을 찾아 길 떠난 예수 (14) 


“ . . . 소년 예수는 예루살렘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그의 부모는 이것을 모르고, . . . 그를 찾았으나, 찾지 못하여,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서 찾아다녔다. 사흘 뒤에야 그들은 성전에서 예수를 찾아냈는데,  . . . 그 부모는 예수를 보고 놀라서, 어머니가 예수에게 말하였다. ‘얘야, 이게 무슨 일이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찾느라고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모른다.’ 예수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였습니까?’ 그러나 부모는 예수가 자기들에게 한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깨닫지 못하였다. 예수는 부모와 함께 내려가 나사렛으로 돌아가서, 그들에게 순종하면서 지냈다. 예수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에 간직하였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을 받았다.” (누가복음서 2:41-52)  



이게 무슨 말인지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앞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나게 될지, 알 수가 없다. 이 모든 말들이 무엇이 될지, 이 모든 일들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나는, 이 아이는, 그리고 우리 모두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하지만 마리아는, 그때 거기 들었던 하나님의 은총을 입었다는 천사의 그 말, 들에 있던 목자들에게 나타났고 전해주었다는 천사의 그 말, 그리고 성전에서 만났던 한 선지자의 그 말, 그 들은 것과 그 본 것 그 모든 것들을 가슴 속 깊이 담아 두었던 것처럼, 오늘도 이 모든 일을 가슴에 간직한다. (눅 1:29, 2:19, 51) 


Our Lady of the Sign from Yaroslavl (Kiev School, ca. 1114. Tretiakov Gallery, Moscow)


우리는 말씀을 읽고 듣는다. 그 말씀, 때론 알아 먹고, 때론 몰라도 먹는다. 그리고 그 먹은 말씀이 무얼까 곰곰이 생각한다. 그리고 그 말씀 붙들고 기도하고 걷고 또한 살아간다.   

그 말씀. 내 입에 포도송이보다 더 달고 수박보다 더 시원하여 삼킬 때 있고, 내가 단번에 알아듣고 그 뜻 이해하기에 너무 버겁고 무거울 때 적지 않고, 내가 받아 먹고 그대로 따르기에 너무 거칠고 딱딱하여 누가 볼까 슬쩍 뱉어내고 싶어질 때 참 많고, 그러나 차마 그러진 못해 입 안에 머물고 귓 가에 맴도는 말씀. 


그러나 ‘내 발의 등불이요 내 길의 빛’이라 하시기에 나에게 살이고 뼈라고 하시기에 삼키는 그 기이하고 신비한 말씀이다. (시편 119:103, 105) 




누구에게나 듣고 싶은 말도 있고, 듣기 싶지 않은 말도 있다. 담아 두고 싶은 말도 있고, 담기 꺼려 밀쳐내고 싶은 말도 있다. 먹기 좋고 듣기 좋고 보기에도 좋은 말도 있고, 뜨겁고 쓰고 딱딱하고 거칠고 두렵고 아픈 말도 있다.  

그러나 내 맘, 내 생각, 내 몸, 내 뜻으로 가려 듣지 않고, 때에 따라 상황에 따라 가려 담지 않는다. 분별(分別)*, 그것이 중요하다. 나로부터 오는 말인지 하늘로부터 오는 말씀인지 읽고 또 읽고 기도하고, 그렇게 분별하여 가슴에 담아 깊이 간직한다. 그러나 분별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냥 안주머니 깊숙히 넣어 두지 않는다. 서랍 속에 넣어 자물쇠 걸어두지 않는다. 


말씀을 내 가슴 속에 담아 두는 것은, 누런 소가 그 삼킨 여물 다시 게워 내어 오물오물 씹고 또 씹는 것처럼, 반추(反芻, 새김질, 되새김)**하는 것이다. 


“복 있는 사람은 . . . 오로지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함 같으니, . . .” (시편 1: 1-3)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가만히 있지 않다. 밤낮 가림이 없이 제 뿌리로 그 흐르는 물 빨아 먹고 마시고 자라고, 제 잎 시듦이 없이 좁고 넓고 개념치 않고 제 그늘을 내고, 남의 계절 탓 않고 제 열매를 맺는다. 

그러나, 오물오물 우물우물, 낮의 높은 해가 다 지도록 저기 한켠에서 가만히 그 새김질에만 정신이 온통 팔린 게으른 소, 어둑해지는 사위에 놀라 허겁지겁 논으로 밭으로 냅다 뛰지만, 주인은 집으로 돌아가 없고 텅빈 들에 흙먼지 묻을 일 없어 깨끗한 쟁기와 홀로 남겨질 것이다. 


그래서 그 말씀 읽고 듣고 먹는 것, 그 삼킨 말씀 잊지 않고 내 가슴에 담아 두는 것, 그 말씀 즐거워하며 밤낮 묵상하는 것, 그 말씀이 내 안에 머물게 하는 것.  

그것은,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길, 그 길뿐입니다. . . . 주님의 말씀을 내 마음 속에 깊이 간직합니다. . . . 나는 주님의 법을 묵상하며, 주님의 길을 따라 가겠습니다. 주님의 율례를 기뻐하며, 주님의 말씀을 잊지 않겠습니다.” (시편 119:9-11, 15-16)


말씀을 내 안에 담아 두는 것, 말씀이 내 안에 머물게 하는 것, 그것은 가만히 조용히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도 아닌 내가 밭 갈고 씨 뿌리고 물 주고 거름 주고 빛 주는 것이다. 그 말씀의 길을 따라 걷는 것이다. 

그렇게, 


“내 안에 머물러 있어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 안에 머물러 있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과 같이, 너희도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


그리고, 그래서,  

그 담아 둔 말씀은 열매를 맺는다. 


photo by noneunshinboo 


주인이 이른 아침부터 애써 마련한 여물을 한껏 삼킨 소, 삼킨 그 여물을 앉고 서고 걷고 하며 짬짬이 다시 게워 내어 씹고 또 씹고 좋은 생각을 내고 제법 힘을 내어 그 밭을 갈고 논을 갈고 거기 길을 내어 뿌리고 심은 씨가 자라 가지를 내고 잎을 내고 나중에 꽃 구경하고 또 더 나중에 열매 구경을 넘어 그 말씀이 맺은 열매 제 주인과 이웃들과 함께 나눌 것이다.  


여기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말씀을 읽고 듣고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 말씀을 삼켜 가슴 속 깊이 넣어 간직한다. 누가 볼까 땅에 묻어 없는 듯 눈에 보이지 않는 듯 묵히는 것이 아니다. 그 말씀 주야로 꺼내 되새기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또한 그 말씀을 살고 그 말씀을 따라 걷는다. 아기 예수, 사람으로 오신 그 받아 삼키고 담아 둔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함께 하시니 열두 살의 소년으로 그리고 서른 살이 넘어선 성년으로 그 키가 자라고 그 지혜가 자라고 서서히 하나님 나라는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 드러나고 이루어진다. (참조, 눅 2:40, 52; 11:2)


그 들은 것, 그 본 것, 그 모든 것들과 일들을 가슴 속 깊이 담아 두는 마리아. 그리하여 그 담아 둔 말씀으로 마리아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어머니가 되었고, 우리는 그 말씀으로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과 딸이 되었고, 그리고 이 땅에 그 말씀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왔다. 


읽고 듣고 쓰고 말하고 또 걷고 사는 그 가슴 속 깊이 담아 두는 말씀은 나에게 ‘죽어 있는’ 말씀이 아닌 ‘살아 있는’ 말씀이 되고, 나의 안에 담아 둔 그 말씀으로 나는 ‘죽어 있는’ 나가 아닌 ‘살아 있는’ 나가 된다. 



* 영적 분별, Spiritual Discernment 

** 묵상(默想), 관상(觀想), Contemplation, Rumination, Chewing over/up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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