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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회사이 Feb 09. 2022

나의 입장(立場)에 선 예수

노는(遊)신부의 더 드라마, 길 잃은 양을 찾아 길 떠난 예수 (15)


“백성이 모두 세례를 받았다. 예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시는데,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예수 위에 내려오셨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울려 왔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는 너를 좋아한다.’ ” (누가복음서 3:21-22)


The Baptism of Christ, Joachim Patinir (c. 1515,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Austria)


회개의 세례를 기다리는 요단 강가의 긴 줄 거기 죄인들의 무리에 섞여 함께 서 계신 예수, 그 차례가 되어 그 강물에 몸을 담그시는 예수, 기도하시는 예수, 그리고 그때 거기 하늘이 열리고, 그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영이 내려온다.   

회개의 강, 그 물의 위를 걷지 않으시고 그 물의 안으로 들어가시는 예수, 그 물의 위가 아닌 그 물의 안을 사는 사람들의 한 명이 되신 예수, 그 물이 낯설고 무섭고 두렵고, 그 물 안을 사는 것이 외롭고 쓸슬하고 슬프고 아프고 또 가난하고 고단하고 참을 수 없는 현기증에 견디기 힘겨워도 도망칠 수 도 몰래 빠져나갈 수도 없는 사람들과의 공감과 연대를 위해 그 물의 안으로 들어서는 예수, 그리고 그때 거기 하늘이 열리고, 그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영이 내려오고, 그 하늘에서 한 소리가 울려 온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는 너를 좋아한다.”


그 사랑의 공감과 연대의 자리, 거기에서 예수께서는 하늘 아버지께 기도를 하고 하늘 아버지의 음성을 지금 들으신다. 값싼 측은지심이 아닌, 높음에서 낮음을 그윽히 바라보는 이의 마음이 아닌, 강 이쪽에서 강 저쪽을 지켜보는 그나마의 동동거리는 안타까움이 아닌, 저기 그들의 입장이 되기 위해 아예 그 강 건너 여기로 오는, ‘나’가 ‘나’로 계속 있지 않고 ‘너’가 되는, 그리고 ‘나’의 입장에서 ‘너’의 입장이 되는 그 사이, 하늘로 오르는 기도가 있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소리가 있다. 



기도는 내가 하나님께 숨을 곳 피할 길을 가르쳐달라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도록 청하는 것이며, 일하실 수 있도록 나를 여는 것이며, 내 안에 공간을 내는 것이며, 또한 하늘로부터 나에게 내려오는 소리, 내 안에서 나에게 울려 나오는 소리,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딸이다’ 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그럴때 나는 감히 하나님의 입장을 엿보고, 하나님은 선뜻 나의 입장으로 오신다. 




‘나 잘 살았습니다, 나 착한 사람입니다’ 라고 쑥쓰러워도 말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그렇게 말하기 조금 석연치 않은 구석은 있으나 별 문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나 잘못 살았습니다, 나 죄인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불편하다. 그 불편함이 켜켜이 쌓여 혹시 나를 그렇게 알까 그렇게 생각할까 그렇게 볼까 불안하다. 


그러나 불편과 불안을 안고 남들의 시선들 속에 ‘나 죄인입니다’ 하는 사람들 가운데 서는 것, ‘나 용서 필요합니다’ 하며 회개의 강 앞에 서는 것은 그것이 조금은 거짓일 지언정 용기다. 그 강의 물 속으로 불편과 불안의 몸을 통째는 아니어도 어느만큼 담글 수 있는 것 역시 용기다. 새털처럼 가벼워지지 못한, 다 씻어내지는 못한 불편과 불안을 그 물의 기억과 함께 살아가는 것은 더 큰 용기다. 그리고 그 용기내어 걷는 길은 십자가의 길이다. 그러나 이전과 전혀 다른 위로와 위안, 그리고 희망이 그 용기를 내어 걷는 길에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죽음처럼 적막하고 어두운 강, 더 이상 길이 막히고 없고 그래서 기막힌 죽음처럼 멈춘 듯 흐르는 강, 그 강의 수면에 떨어지는 햇빛은 채 물 안으로 들어가지 못해 두터운 강의 부정과 부인과 거절로 반사되어 다시 오르고, 수면에 닿은 찰나의 그 반짝임에 그래도 저기 해가 있구나 하늘이 있구나 그것이면 지금 나에게는 족하다 하며 빛의 흔적만 보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나를 드러내는 불편함, 나를 그렇게 볼까 알까 대할까 하는 불안함에 내 발끝만 디딜 땅만 그리고 앞만 보던 고개를 들어야 한다. 수면으로 오르는, 수면에 닿아 그 빛에 나를 노출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불편하고 불안하다 하는 나의 목소리, 불편하게 불안하게 만든다 하는 남의 목소리를 벗고, 지느러미처럼 자꾸 미끄러질 것 같은 나의 손, 멈춘 듯 흐르는 물결을 따라 나와 함께 흐르며 나를 향해 뻗는 그 손 용기내어 잡는 것이 필요하다. 


그 못들어오도록 못나가도록 막아선 두터운 수면을 뚫고 죽음처럼 가라앉은 물 안으로 들어오신 예수의 손. 물 밖으로 손 끌어 나가자해도 나오라해도 꿈쩍않으니 아예 물 안으로 들어오신 예수의 손. 그 있는 물의 흐름 아예 바꾸자, 바꾸어 살자, 생기로 흐르는 생명의 강으로 바꾸어 살자고 들어오신 예수의 손. 넌 내 맘을 몰라, 넌 나와 입장이 달라, 그 소리 나오지 못하게 아예 우리 맘 우리 몸이 되신 예수의 손, 내 입장이 되신 예수다. 


The Baptism of Christ (15 century, Russian State Museum, St. Petersburg)


불편과 불안, 슬픔과 아픔, 고통과 좌절으로 잡은 손, 그리고 적은 위로와 위안, 작은 기쁨과 즐거움, 많지 않고 크지 않은 안도와 희망으로 잡은 손, 손들. 나에게서 시작이 되어 너에게로, 너에게서 시작이 되어 나에게로, 사랑은 공감이 되고 사랑은 연대가 되고, 나는 너가 되고 너는 나가 되고, 수많은 나들과 너들만큼이나 다르고 다르지만 그러나 큰 하나가 되어 회개의 강이 흘러 골고다의 그 언덕 그 위로 그리고 다시 아래로 내리 흘러 생명의 강이 된다. 


여기, 잠시 잠깐의 망각과 도피, 던져준 겨우 얻어낸 위로와 위안, 빼앗길까 움켜쥔 초라한 기대와 희망, 그런 것들에 만족하며 거기에 더 이상 머물기를 거부하고, 시냇가에 심은 아름드리 나무로 살기를 바래 여기 요단강에 닿은 사람들. 그 입장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사랑의 공감과 연대로 인하여 여름 한낮 작은 연못에 떨어진 돌이 만들어내는 파문처럼 점점 커져 그 연못을 꽉채우는 물의 공명, 조금씩 커져 가 닿은 그 연못 테두리 거기 연못가의 자란 풀을 흔들고, 물새 깨어 날아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되어 하늘까지 올라 이르고 ‘여기 서 있는 너도, 거기 서 있는 너도 모든 너들은 내 사랑하는 아들 딸이니, 너희 모두 나의 사랑을 받는 형제이고 자매이다’ 하는 하늘의 음성이 내려와 듣는 기적이 여기 요단 강가에 인다. 죽음의 강이 생명의 강이 된다. 


그때 거기 그들에게 그리고 지금 여기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기적. 사랑, 공감, 연대, 위로, 그리고 희망. 

우리 모두는 그것들이 정말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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