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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회사이 Feb 11. 2022

너무 멀지 않고 너무 가깝지 않은,
둘이 아닌 하나

노는(遊)신부의 더 드라마, 길 잃은 양을 찾아 길 떠난 예수 (16)


“예수께서 활동을 시작하실 때에, 그는 서른 살쯤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생각하기로는 요셉의 아들이었다. 요셉은 엘리의 아들이요, 그 윗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 . . 나단, 다윗, 이새, 오벳, 보아스, . . . 야곱, 이삭, 아브라함, . . . 셈, 노아, . . . 에노스, 셋, 아담에게 이르는데,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누가복음서 3:23-38)


Christ Pantocrator, 6th Century (Saint Catherine's Monastery, Sinai)


먼 하늘만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예수는 너무 동떨어진 그래서 내게는 너무 먼 하나님의 아들이시기만 하고, 코 앞의 땅만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예수는 너무 가까운 그래서 내가 너무 잘 아는 한 사람의 한 아들, 즉 요셉의 아들이기만 하다. 누구는 예수에 대한 생각이 하나님의 아들에서 멈추고, 그리고 또 누구는 요셉의 아들에서 멈춘다. 


그러나,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중개자란 반드시 하느님답고 사람다운 무엇을 지녀야 할 것이오니, 그렇지 않고 인간답기만 해도 하느님한테서 너무 멀고, 하느님답기만 해도 인간한테서 너무 멀므로 중개자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누구에게 예수는 하나님과 사람 그 경계, 혹은 그 사이 어디쯤에 계신 분이라는 이해에서 멈춘다. 


그러나, 

“참다운 중개자는 은밀한 당신 자비로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자들에게 보내주시고 보여주신 그분! 우리에게 그를 본받아 겸손을 배우게 하시니, 이 바로 ‘하느님과 인간의 중개자’ 인간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죽을 죄인들과, 아니 죽으시는 거룩한 님 사이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인간과 더불어 죽으시되 하느님과 더불어 의로우신 분. 이로써 그분은 (의로움의 삯이 생명과 평화인지라) 하느님과 이어진 의로 의화된 죄인들의 죽음을 쳐부수고자 그들과 공통된 죽음을 받기 원했던 것입니다. . . . 그분은 인간이시기에 중개자이시나 말씀으로 사이에 계시는 분이 아니시니 하느님과 같으시고, 하느님 안에 계시사 같은 한 하느님이신 까닭이니이다.”*  




저기와 여기, 하늘과 땅, 그 뿌리와 그 뻗은 가지와 그 달린 잎이 너무 멀다 하지 않도록 너무 멀리 계신 당신이 되지 않으시고 마음의 거리를 당기고 몸의 거리를 좁혀 뿌리와 그 가지를 잇고, 하늘과 땅을 잇고, 하나님과 인간을 잇고, 또한 인간과 인간 그 서로를 잇기 위하여 오신 예수. 

그 예수는 하나님과 사람 그렇게 나뉜 둘이 아니라, 우리로는 도저히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신비 속 온전히 하나로 오신,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는 너를 좋아한다” 하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외아들로서 한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계셨던 말씀이셨고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또한 하나님이셨고 (요 1:1), 마침내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한 사람으로 오신 (요 1:14), 그래서 ‘사람들이 생각하기로는’ 요셉의 아들이다. 


지금 누가(Luke)는 오직 한 분 중개자, 하나님이시자 사람들이 알기로는 요셉의 아들이신 그 예수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간다. 그렇게 오르고 올라 거기 아브라함에 이르고,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않고 오르고 또 올라 그 맨 처음 첫 사람인 아담에까지 이르고, 그 아담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첫 사람, 하나님의 아들 –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는 의미와는 다른 – 이라고 전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아브라함을 한 조상으로 둔 이스라엘만의 메시아가 아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첫 사람, 아담을 그 처음으로 둔 모든 인류의 메시아가 되며, 또한 그 예수께서는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근원이 되고, 그의 가르침과 삶이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살아가야 할 삶의 기준이 되고 걷는 길이 되고 따라야 할 모범이 된다. 


photo by noneunshinboo


하나님과 사람 그 둘을 나누어 오지 않으시고 나누어 살지 않으시고, 온전히 하나로 오시고 온전한 하나로 사신 예수. 그래서 그 예수를 우리가 믿고, 그 예수를 우리가 따르고, 그 예수를 따라 우리가 사는 것은 결국 이 땅에서 저 하늘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이 땅에서의 우리의 구체적인 삶이 영적인 삶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로 사는 온전한 삶은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첫 사람 아담을, 나아가 그 한처음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의 말씀이신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그 뿌리로 하는 ‘한 형제이며 한 자매’이며, 그래서 그 온전한 삶은 하늘만 바라보고 위로만 뻗는 가지가 아닌 동시에 땅 위 서로를 향해 옆으로도 힘껏 뻗어 서로를 아끼고 보듬고 지키고 ‘함께’ 살아가는 삶인 것이다. 


그것은 또한 이미 하늘 나라, 하나님 나라가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고,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함께 사는 것이고, 또한 그 나라가 온전히 곧 올 것이라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속에 같이 사는 것이다. 



* <고백록> A. 아우구스티누스 지음, 최민순 옮김, 바오로의 딸, p. 466-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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