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교회사이 Feb 17. 2022

광야에 선 예수, 광야로 사는 우리

노는(遊)신부의 더 드라마, 길 잃은 양을 찾아 길 떠난 예수 (17)


“ . . . 그리고 그는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셔서,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그동안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아서, 그 기간이 다하였을 때에는 시장하셨다. . . .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말해 보아라.’ . . .  악마는 예수를 높은 데로 이끌고 가서, 순식간에 세계 모든 나라를 그에게 보여 주었다. . . . ‘내가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너에게 주겠다. 이것은 나에게 넘어온 것이니, 내가 주고 싶은 사람에게 준다. 그러므로 네가 내 앞에 엎드려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너에게 주겠다.’ . . . 악마는 예수를 예루살렘으로 이끌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그에게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 . .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자기 천사들에게 명해서, 너를 지키게 하실 것이다, . . . ’” (누가복음서 4:1-13)



그때 거기 에덴(Eden), 옛 창조의 시작이었던 ‘하나님의 아들’* 아담이 받았던 유혹은 지금 여기 광야(曠野), 이제 새로운 창조의 시작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유혹으로 이어진다. 


The Temptation in the Wilderness, Briton Rivière, 1898, Guildhall Art Gallery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는 너를 좋아한다.” 


네가 정말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라는 것을 나에게 증명하라, 이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아라, 불가능이 없다 하신 그 능력의 하나님, 그분의 아들임을 내게 보여라, 네가 누구인지를 증명하라. 

유혹 앞에 선 광야의 예수. 


그리고 우리, 

네가 누구인지 증명하라, 너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보여라, 그래야 네가 너라는 것을 비로소 인정 받을 수 있다, 적어도 돌을 빵으로 만들 능력 정도는 있어야 한다, 저기 구르는 돌들을 빵으로 만들어라, 저 돌무더기를 썩지 않을 빵무더기로 쌓아라, 그 필요는 이미 넘었고 그 충분함 역시 훨씬 지났지만 아직 부족하고 너의 빵이 되길 기다리는 돌들은 네 주변에 널려 있다, 정작 변해야 하는 것은 나인데 저기 돌들을 변하게 만들라는 그 목소리를 따라 가고 있다면 그것을 향해 팔을 뻗고 있다면, 지금 여기를 광야로 사는 것은 아닐까? 애쓴다 애써도 여전히 돌은 돌일 뿐이어서 전전긍긍한다면, 그건 광야로 사는 것이 아닐까? 




세상 높은 곳 그 위에서 바라본 아래는 다 내 것인 세상이고, 내 뜻대로 움직이는 세상이고,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나만의 세상이고, 고개 한 번 숙인다고 없어질 세상이 아닌 외려 확실한 내 것이 되는 그 꿈 같은 세상을 받을 자격이 너에게 있는지 증명하라. 

유혹 앞에 선 광야의 예수. 


그리고 우리, 

그 가지의 끝에 금지된 열매를 달고 있는 보기에도 멋지고 근사한 저 높은 언덕 위에 선 나무의 높음의 매력, 그리고 저 꼭대기, 저 높은 곳 거기까지 높아지고 싶고, 높이 오르고 싶고, 높이 들어 올려지고 싶고, 저 높은 곳에 있고 싶어, 그래서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다고 주문처럼 외우며 끝 모를 높이가 주는 흥분, 그 상승(上昇)과 고지(高地)의 아찔한 유혹 앞에 흔들리며 오른다. 그러나 광야의 높은 산도 여전히 광야에 있고, 거기 높은 산도 덜 광야가 아닌 더 광야인 것을 알지 못한다면, 지금 여기를 광야로 사는 것은 아닐까? 거기에 오르지 못해 서지 못해 안절부절못한다면, 남 오르는 모습 남 거기 산 위에 있는 모습 보며 또 안절부절못한다면, 그건 광야로 사는 것이 아닐까?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인지, 너를 정말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지, 솔직히 너도 궁금하고 알고 싶고 확인하고 싶지 않은가? 정말 알고 싶다면 확인하고 싶다면 그리고 너 역시 그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한 발만 앞으로 와라, 너의 믿음이 충분한지 자 뛰어내려 보아라.

유혹 앞에 선 광야의 예수.  


그리고 우리, 

한 없는 높음이 한 발 앞 끝 없는 낮음으로 떨어질 가능성은 상상으로도 이미 충분한 두려움이고 공포이고, 그 하강(下降), 추락(墜落), 그 두려움과 공포를 피할 수 있다는, 영원한 안녕과 안전 보장의 희망, 믿음, 장미빛 미래라는 가면을 쓴 채 앞에 놓여 있는 유혹에 혹시나 . . . 한다면, 지금 여기를 광야로 사는 것은 아닐까? 매일을 배척간두 줄타기를 하듯 저 아래를 미리 상상한 하강의 두려움과 추락의 공포, 까닭 모를 걱정과 근심과 불안을 둘도 없는 애인마냥 끌어안고 산다면, 그건 또한 광야로 사는 것이 아닐까? 




그때 거기 에덴의 아담은 실패했고, 아담은 광야를 살았다. 


그리고 

지금 여기 광야의 예수, 


“사람은 빵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그리고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라.” 


버리고 비우고 가장 힘없는 자로 오신 예수, 높은 곳이 아닌 낮은 곳으로 향하는 예수, 십자가 그 끝 모를 나락을 택하신 예수, 자신을 증명할 이유도 필요도 없는 그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 유혹의 힘을 무력화시킨다. 그 유혹을 무화(無化)시킨다. 

아담과 함께 죽음은 왔고, 예수와 함께 부활은 왔다. 아담과 함께 광야는 왔고, 예수와 함께 하나님 나라는 왔다.*** 


그리고 광야의 예수는 광야를 살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산다.   


Saint Catherine's Monastery on the Sinai Peninsula in Egypt.


우리가 광야를 살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사는 것,

내가 누구다 하시는 이,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이, 내가 누구인지 물을 수 있는 이, 내가 누구인지 확인하고 증명할 수 있는 그이는 ‘나는 곧 나다 (I am who I am)’ 하신 이, 나에게 ‘너는 내 사랑하는 나의 아들이요 나의 딸이다, 나는 너를 좋아하고 기뻐한다’ 하신 이, 그리고 나를 너무도 사랑하셔서 그 사랑하는 외아들을 내어주신 이,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시다, 그것이면 나에게 충분하다,**** 그렇게 광야로 살지 않고 하나님 나라로 사는 것이다. 


우리가 광야를 살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사는 것,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고, 나는 그 하나님의 사랑받는 귀한 아들이고 딸이고, 거기에 이유를 찾을 필요도 없고, 그 누구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그것을 증명할 필요도 없고, 내가 사랑을 받을 내가 사랑을 할 이러저러 이유를 구실을 변명을 애써 찾을 필요도 없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사람으로 오신 이유인 나의 존재를 인정받으려 애쓸 필요도 없이,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하늘에 계신 한 아버지의 한 형제와 자매로 함께 산다, 그렇게 지금 여기를 광야로 살지 않고 하나님 나라로 사는 것이다. 


예수께서 광야에 서신 이유이고, 우리가 광야로 살지 않을 이유다. 

우리가 ‘나’를 증명하기 위해 살지 않고, 증명이 된 ‘나’로 사는 이유다. 



* 누가복음서 3:38 

** 누가복음서 3:22 

*** 로마서 5:12-21, 고린도 전서 15:21-22, 

**** 출애굽기 3:14, 누가복음서 3:22, 요한복음서 3:16


작가의 이전글 너무 멀지 않고 너무 가깝지 않은, 둘이 아닌 하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