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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회사이 Feb 22. 2022

아는 사이, 그 아는 선(線)을 넘어

노는(遊)신부의 더 드라마, 길 잃은 양을 찾아 길 떠난 예수 (19)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그 은혜로운 말씀에 놀라서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내게다 끌어대면서, ‘우리가 들은 대로 당신이 가버나움에서 했다는 모든 일을, 여기 당신의 고향에서도 해보시오’ 하고 말하려고 한다. . . .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무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 . .”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서, 모두 화가 잔뜩 났다.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를 동네 밖으로 내쫓았다. 그들의 동네가 산 위로 있으므로, 그들은 예수를 산 벼랑까지 끌고 가서, 거기에서 밀쳐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떠나가셨다.” (누가복음서 4:21-30)


photo by noneunshinboo


달라고 하는 것, 해보라 하는 것, 그러나 요구도 부탁도 될 수 없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 잘 아는 예수에게서 거부되었다. 예수를 아는 것, 예수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 그리고 예수에 대한 기대와 바램, 그것들과 눈 앞에 있는 예수 사이에 불일치가 발생했다. 


그 불일치의 이유를 곰곰히 찾을 사이도 없이 실망은 순식간에 모멸감과 배신감으로 차오르고, 그 한계치는 금방 훌쩍 넘어 분노와 증오로 터져 치솟는다. 그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불일치에 몸서리치며 달려드는, 야수 같은 이들에게 끌려 산 벼랑에 이른 예수는 그러나 아직은 그 때가 아니기에 막 떨어뜨리려는 저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거기를 떠나가신다.


꽃가루와 고적대와 카퍼레이드의 금의환향은 아니어도 동네 어귀 자그마한 환영 현수막 하나 정도는 설마 . . . , 동네방네 환영 인파와 박수와 환호는 아니어도 앞집 옆집 작은 잔치 정도는 설마 . . . , 나를 잘 알텐데 나의 소식 들었을 텐데 누구는 내가 한 그 일들을 보기도 했을 텐데 설마 . . . , 했는데, 그러나 예수께서는 오시자 바로 떠나가신다.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나를 안다는데, 나를 잘 안다는데, 그래서 나를 더 알 필요 없다는데, 내가 더 있을 필요 없다는데, 내가 필요 없다는데, 그러니 떠날 밖에 없다.


저들은 예수와 더도 덜도 아닌 그냥 아는 사이, 기껏해야 잘 아는 사이로 있다. 그건 모르는 사이와 다르지 않다. 저들이 아는 예수는 내가 아는 누구 누구의 아들이고 누구 누구의 형이고 오빠이고. 어릴적부터 함께 자랐고, 그 자라는 모습을 지켜 보았고, 그래서 잘 아는 이 동네 사람들 중의 한 명, 덧붙일 것도 뺄 것도 없는 내가 아는 사람들 중의 한 명, 딱히 아쉬울 것도 딱히 아쉽지도 않은,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그나마 목수(carpenter) 일을 하는 그래서 그 일로 찾게 되는 그래서 조금은 더 알고 조금은 잘 아는, 사람들이 생각하기로는 요셉의 아들인 예수일 뿐이다. (누가복음서 3:23; 마가복음서 6:3)


요셉의 아들 예수는 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모른다. 하나는 아는데 다른 하나는 모르고,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고, 그 둘이 하나인데 그것을 모르고, 모른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무지(無知). 

선(先)지식과 선(先)이해는 예수께 갈 수 있는 기회를 주지만 예수를 옳게 이해하는데 장애가 되었다. 


아는 사이, 잘 아는 사이, 그 아는 게 문제가 될 줄은 저들은 미처 몰랐을 것이다. 아는 사이로 머문 사람들에게도 예수가 다른 마을들에서 했다는 일들은 당연히 놀랍고 지금 회당에서 들은 그의 말도 당연히 놀랍다. 그러나 놀랍기만 할 뿐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게 다인 여전한 놀라움과 경탄만 있을뿐. 




그러나, 

우린 아는 사이다. 아브라함을 한 조상으로 둔 유대인이고, 하나님의 선택받은 사람들이고,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총은 당연하고 구원도 자연스럽고, 게다가 우린 같은 고향, 같은 동네에 사는 너무 잘 아는 사이고, 우린 같은 회당에 다니고, 예루살렘 성전도 때때로 같이 찾고, 그러니 온 김에 이참에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그 했다는 이적들을 보여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냐?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은총을 구원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우리가 바라고 원하고 기대하는 것, 그리고 그 보다 더한 것도 우린 받아야 한다, 그게 당연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당연한 것은 없다. 감사함은 있어도 당연함은 없다. 당연한 곳에 감사함은 머물 수 없고, 당연하다 하는 사람들에게 감사한 일은 일어날 수 없다.  


photo by noneunshinboo


“참 빛이 있었다. 그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 그는 세상에 계셨다.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요한복음서 1:9-11)


감사한 빛은 있어도, 당연한 빛은 없다. 

창문의 커튼을 닫은 채 있는 방 안에 당연히 머무는 빛은 없고, 그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근 채 있는 방 안에 당연히 부는 바람은 없다. 나를 열고 비우고 그럴 때 빛은 내 안에 머물고 바람은 나에게 분다. 


안다 잘 안다, 그 아는 것에서 한 발도 더 나아가지 못한 동네 사람들, 아는 사람으로 충분하다, 그 아는 사이에 머문 고향 사람들에게 빛은 머물지 못하고 바람은 불지 않는다. 왠지모를 그저 호기(豪氣)로운 저들이 잘 안다 생각하는, 실은 저들이 정말은 너무도 모르는 예수, 그래서 더욱 쓸쓸하고 슬프고, 그래서 고민도 생각도 깊어 가는, 저들을 향한 아픈 사랑으로 속상한 예수는 떠나가는 마음도 발걸음도 무겁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이 일을 지혜 있는 사람들과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 어린 아이들에게 드러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의 은혜로우신 뜻입니다.” (누가복음서 10:21-23)


철부지 어린 아이들이 되길 거부하는 저들이 예수는 속상하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떠나가셨다. 그러나 떠나가는 이는 예수가 아니라 저들이다. 외로워해야 할 사람들은 저들이다. 그런데 지금 홀로 외로운 이는 예수다. 저들은 저들로 함께 있어 외롭지 않다. 외롭다 느끼지 않는다. 저들이 영영 외롭지 않아야 할 텐데, . . . 그 생각에 예수는 더 외롭다. 


저들, 

철부지 어린 아이들이 되기를 기다리기 보다는 

나 홀로 외로운 길 

가기로 작정하신 예수. 


그래서, 


더 외로운 길 위의    

예수는 

저들을 외롭게 내버려둘 수 없어 

그 길 

떠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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