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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회사이 Feb 25. 2022

악(惡)은 우리를 잘 안다

노는(遊)신부의 더 드라마, 길 잃은 양을 찾아 길 떠난 예수 (20)


“. . . 그 때에 그 회당에 악한 귀신의 영이 들린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가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아, 나사렛 예수님, 왜 우리를 간섭하십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입니다.’ 예수께서 그를 꾸짖어 말씀하셨다. ‘입을 닥치고,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그러자 귀신이 그를 사람들 한가운데다가 쓰러뜨려 놓고 그에게서 떠나갔는데, 그에게 상처는 입히지 않았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서로 말하였다. ‘이 말이 대체 무엇이냐? 그가 권위와 능력을 가지고 악한 귀신들에게 명하니, 그들이 떠나가는구나.’ . . .” (누가복음서 4:31-37)


photo by noneunshinboo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악(惡)은 선(善)을 안다. 

아이러니다. 정작 고향 사람들은 모른다. 그런데 귀신은 안다. 귀신 같이 안다. 슬픈 현실이다. 그 회당에 있던 귀신은 무덤 사이에도 있다. 먼 발치서도 바로 알아보고 냅다 소리친다. 


“더없이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제발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누가복음서 8:28)


알아도 제대로 잘 안다.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제발 우리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악(惡)은 선(善)이 왜 왔는지를 안다. 그 선(善)으로 인해 앞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를 안다. 악(惡)은 앞으로 자기가 어떻게 될지를,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를 너무 잘 안다. 그리고 그 악(惡)은 우리를 또한 잘 안다. 그런데 우리는 악(惡)을 잘 모른다. 그렇다고 선(善)을 잘 아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비극은 사실 거기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그 비극은 여전하다. 그러나 이젠 그 비극을 끝낼 때가 되어도 벌써 되었다.   




악(惡)은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그 시간을 늦추겠다고 피하겠다고 그 숨을 곳, 피할 곳을 찾는다. 그리고 그 악(惡)은 제 살 길을 찾아, 그리고 우리가 죽을 길을 찾아 우리에게 온다. 


악(惡)은 평범하다. 악(惡)은 우리의 일상처럼 평범하여 모르고 지나치는 그 틈 사이에 있다. 너무도 평범한 얼굴을 한 악(惡)은 특별하지 않은 곳에 있고, 특별하지 않은 일로 있고, 특별하지 않은 것으로 있고, 특별하지 않은 사람으로 있고, 특별하지 않은 사람 안에 있다. 단지 우리가 그리고 내가 나중에 그 일들이 있고 난 후에 그것들을 특별하게 보는 것일 뿐이다. 


백주대낮 드러난 대놓은 악(惡)은 예외적이고 특별하여 오히려 낯설다. 그래서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다양하고 평범하여 스며드는 악(惡)에 우리는 시나브로 젖어 들고, 우리는 점차로 악(惡)에 무감하게 되고 눈 감게 되고 관대하게 된다. 우리가 사는 어디나 있고 언제든 있고 우리가 누구든 평범하게 있는 악(惡)을 우리는 그래서 잘 모른다. 모르고 싶은 것인지 정말 모르는 것인지, 너무 평범하고 낯익고 익숙하게 되고, 악(惡)을 보는데 악(惡)을 듣는데 악(惡)을 당하고 또 하는데 그것이 악(惡)인줄 우리는 모르게 된다. 




악(惡)은 풀숲에 그 발톱을 숨긴 사자처럼* 웅크리고 그 움직임을 최소로 한 채로, 아주 조용히 은밀히 다가와 우리를 부드럽게 덮치고, 다정하고 다감하게 다독이며 어둔 숲으로 우리를 친절하게 천천히 이끈다. 전혀 그 티가 나지 않아 우리는 제발로 걷는 듯 걸어 그 안으로 들어간다. 그렇게 어둠이 조금씩 영혼을 잠식한다. 


거리에도 있고 시장에도 있고, 학교에도 있고 일터에도 그리고 집에도 있고, 그렇게 우리 안에 있고 내 안에는 더 있는 악(惡)은 평범하다. 악이 옆집에 살고 있다는 것, 내 집에 그리고 내 안에 살고 있다는 것은 소름끼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악(惡)은 심지어 여기 회당에도 있고 성전에도 있고, 그리스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도 알고 있고, 성경 구절도 잘 인용한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 성경에 기록하기를, . . .”


악(惡)은 때로 선(善)으로 보이기까지 해서 우리를 너무 헷갈리고 혼란스럽게 한다. 그래서 더 무섭다. 그리고 불안하다. 우리의 그런 혼란과 당혹과 두려움과 불안을 악(惡)은 너무 잘 알고 있다. 

악(惡)은 그 들어갈 자리를 안다. 어둠은 그 머물 자리를 금방 찾아낸다. 그 누울 때와 그 누울 자리를 알아 그 다리를 편다. 우리가 욕망하는 것과 불안해 하는 것과 두려워 하는 것, 우리의 약한 것과 우리의 약한 곳, 무엇보다 우리의 어둠을 잘 안다. 


“아직 너는 배고프니 돌로 빵을 만들어라, 세상을 다 줄 것이니 나에게 절을 해라, 두렵고 무섭지만 구해주실 것이니 믿고 뛰어내려라.”*


photo by noneunshinboo


악(惡)은 우리가 선(善)으로, 빛으로 나가는 것을, 그 빛 안에 머무는 것을 그래서 빛의 자녀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 누울 자리를 알아 그 다리를 펴는 악(惡), 그 악(惡)의 힘, 그리고 그 악(惡)이 드리우는 어둠을 우리는 잘 알아야 한다. 그래야 한다. 그리고 거기서 나와야 한다. 


“입을 닥치고,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그 악(惡)의 힘에 우리는 쓰러질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그 한가운데서 넘어지고 자빠지고 무너질 수도 있다. 그러나 악(惡)은 영원한 죽음의 상처를 우리에게 남기지는 못할 것이고, 우리를 영영 떠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일어설 것이다..


악(惡)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의 죽고 사는 것을 가를 분이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안다. 그래서 악(惡)은 분주하다. 그런데 우리는 조금 한가한 것이 아닌지, 우리의 영원한 생사(生死) 역시 그 분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닌지.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이기든 지든 할 텐데, 적을 잘 알아도 부족할 텐데. 적도 모르고 나도 잘 모른다면, 게다가 나의 피할 곳 나의 도움이 오는 곳도 모른다면, 그렇다면 걱정은 걱정이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 . . . 그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 (요한복음서 1:5,9)


빛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 빛을 받아야 한다. 그 큰 빛을 받아 서로에게 그 빛을 내고 빛으로 살아야 한다.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대 아래에다 놓지 않고, 등경 위에다가 올려 놓아서, 들어오는 사람들이 그 빛을 보게 한다. 숨겨 둔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 둔 것은 알려져서 환히 나타나기 마련이다.” (누가복음서 8:16-17)


그 빛을 내 안과 밖에 켜 두어야 한다. 나의 안과 밖을 비추도록 높은 곳에 올려두어야 한다. 그 빛에 잠시 동안 우리 눈이 부시고 아프고 뜰 수 없어 힘이 들어도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 빛,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하게 할 것이고, 대낮 밝은 빛이 쏟아지는 푸른 들로 우리를 이끌 것이다. 



*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는 예수 (누가복음서 4: 1-13)

** “마을의 길목을 지켰다가 죄없는 자 쳐죽이고, 두 눈을 부릅뜨고 가엾은 사람을 노립니다. 숲 속에 숨은 사자처럼, 불쌍한 놈 덮치려 불쌍한 놈 기다리다가, 그물 씌워 끌고 가서, 죄없는 자를 치고 때리며, 가엾게도 거꾸러뜨리고는 하는 말이, ‘하느님은 상관없지. 영영 보지 않으려고 얼굴마저 돌렸다.’ 일어나소서, 야훼 나의 하느님, 저들을 내리치소서. 가련한 자들을 잊지 마소서.” (시편 10:8-12, 공동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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