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첫 풀코스 도전 성공

20년 전의 나를 뛰어넘다.

by 노정희

드디어 11월 8일, 해남마라톤의 날이 밝았다. 새벽 5시, 어둠이 채 걷히기도 전에 눈을 떴다. 오늘은 우리 가족이 각자의 거리로 도전하는 날이다. 나는 생애 첫 풀코스, 중2 첫째는 하프, 초4 둘째는 5km. 그리고 남편은 운전과 모두의 짐을 챙기고 지원하는 ‘우리 집 로드매니저’ 역할을 맡았다. 새벽 5시 반에 전주에서 설렘과 기대를 안고 우리는 해남을 향해 출발했다.


이번에 참여한 대회는 '해남땅끝전국마라톤대회'이다. 해남은 전주에서 차로 2시간 반정도 걸린다. 꽤 거리가 있기 때문에 이왕 가는 거 남편이 마라톤 이후 해남 주변을 가볍게 여행하면 좋을 것 같다고 제안했다. 최근에 'F1 더무비'를 재밌게 본 터라 해남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영암 F1 경기장에서 F1 체험을 해보자고 한다. 아직 키가 160cm가 안 되는 둘째 현수는 혼자서 운전을 할 수 없다는 말에 시큰둥했지만 나와 첫째 민제는 재밌을 것 같다고 좋아했다. 마라톤 끝나고 여행하는 거 이왕이면 1박 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해남주변 숙소를 알아보자고 했다. 남편이 역시 즉흥적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한다. 하지만 이러한 계획이 다 부질없음을 나중에 마라톤이 끝나고 알게 된다.


'해남땅끝전국마라톤'의 출발지는 우슬경기장이다. 주차를 하고 경기장을 향하는 데 경기장이 언덕 위에 있다. 넓은 경기장에서 아이들과 스트레칭을 하고 무릎 테이핑을 하면서 출발신호를 기다렸다. 20년 전에 너무 추워서 풀코스를 포기했던 경험이 있었던 지라 혹여 날씨가 추우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렇게 춥진 않았다. 다만 바람이 좀 강했다. 뛰다 보면 열이 오를 것이고 풀코스는 4~5시간 걸리니 낮 온도는 상당히 높았기에 안심했다. 하지만 워낙 옷을 가볍게 입었던 지라 남편이 일회용 우비를 챙겨준다. 역시 우리의 로드 매니저!! 세심하게 챙겨주는 남편이 늘 고맙다. 그리고 카운트다운과 함께 출발했다.


우슬 경기장을 벗어나니 아까 올라온 언덕을 내려간다. 생각보다 경사가 심하다. 차로 와서 몰랐는데 내리막 길이 한참 이어진다. 나중에 이걸 올라와야 한다고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난다. 나는 힘들고 심각한 상황을 즐기는 변태적(?) 성향이 있다.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오늘 마라톤은 그 성격을 다시 확인한 날이기도 했다.


오늘 나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


"풀코스 전체 구간을 걷지 않고 완주하기!"


이를 위해서는 초반에 페이스 조절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초반에 내리막길이 한참 이어진다. 여기서 속도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사실 나는 평소에도 무릎에 부담을 줄이기 위해 내리막길은 가능한 천천히, 오르막에서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달린다. 예전에 황영조 선수님이 하신 말이 떠오른다.


마라톤에서는 처음에 뛰고 나중에 걷는 것보다, 처음에 걷고 나중에 뛰는 게 낫다.


레이스 초반 몸에 열을 올리기 위해 일회용 우비를 입고 띤 것이 페이스조절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불편해서 빨리 뛰지 못한다. 심지어 부스럭 대는 소리가 생각보다 시끄럽다. 우슬경기장 언덕을 벗어나 고가 도로 같은 곳을 다시 올라간다. 곳곳에 일회용 우비가 버려진 게 보인다. 평소에도 기지제에 쓰레기를 주으면서 다니는 지라 저곳에 버려진 쓰레기를 나중에 어떻게 치울 수 있을까 싶다. 더욱이 차가 다니는 도로에 바람이 불어 저 큰 비닐이 날아다니면 위험하지 않을까 온갖 생각과 함께 어느덧 첫 번째 급수대다. 급수대에서 우비를 벗으니 한결 가볍고 편안해진다.


오래 달리기의 매력은 달리면서 나를 관찰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자신을 관찰하는 것, 즉 '명상'이다. 달리기를 하면서 내 몸에 집중한다. 지면에 닿는 내 발의 촉감을 느껴본다. 팔 스윙을 바꾸었을 때 추진력이 달라지는 것도 느껴본다. 뛰다가 무릎에 약간 무리가 간다고 느껴지면 포어풋(Forefoot strike)을, 발목에 무리가 간다고 느껴지면 리어풋(Rearfoot strike)으로 착지방법도 바꾸어 본다. 그동안 몸으로 익힌 노하우를 길 위에서 하나씩 꺼내 써본다.


달리기는 생각을 비우는 데 좋다고 하지만, 달리는 시간이 길어지면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된다. 오늘의 대회는 내가 20년 전에 포기했던 풀코스에 대한 재도전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20년 전에 포기한 '25세의 나'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때 '25세의 내'가 20년 후인 '45세의 나'와 함께 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좀 더 힘이 나지 않았을까? 그러면서 동시에 20년 후인 '65세의 내'가 지금 함께 달리고 있다는 강한 느낌이 들었다. 왜냐하면 나는 20년 후에 달리기 위해서 지금 달리기 때문이다.


갑자기 25세, 45세, 65세, 세 명의 '나'들이 함께 달린다. 셋 중에 '25세의 나'가 가장 허접이다. 그리고 '65세의 나'는 흰머리에 복근을 드러내며 크롭탑을 입고 달린다. 셋 중에 가장 간지 난다. 그 멋진 모습을 상상하니 힘들지 않다. 그리고 어서 늙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그때가 지금보다 더 멋질 것 같다.


하프지점을 통과했을 때 시간을 보니 2시간이 좀 넘는다. 하프기록이 1시간 51분이었던 걸 감안한다면 초반 페이스 조절에 나름 성공한 듯하다.


대회날은 유독 바람이 강한 날이었다. 바람소리에 귀가 먹먹할 정도다. 해남의 드넓은 들판에서 부는 맞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달렸다. 이 바람소리는 한동안 귓가에 맴돌 것 같다. 20km 이후부터는 주변에 사람이 별로 없어서 워치로 음악을 들으면서 달렸는데 음악 소리가 안 들릴 정도로 바람이 강했다. 비가 많이 내리는 날에 달린 적은 있어도 바람이 강한 날에 이렇게 오래 달려본 적이 없었다. 바람도 러너에게는 극복해야 하는 장벽이라는 것을.. 나는 오늘도 배운다. 한여름 나는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날도 야외 러닝을 했다. 오히려 한여름에는 비 오는 날의 러닝을 더 즐기는 편이다. 다음에는 바람이 강한 날도,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날도 달려봐야겠다.


25km 정도 달리니.. 갑자기 피로감이 확 몰려온다. 피로감이 올 때마다 착지법과 스윙법을 바꿔 뛰니 뛸만하다. 30km 지나고 나서는 내가 한 명씩 한 명씩 천천히 추월해 가는 것을 느꼈다. 30km가 넘어가면 많은 사람들이 걷기 때문이다. 초반 페이스 조절이 이렇게 힘을 발휘하다니..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페이스가 있다. 처음에 느리다고 결코 좌절할 필요도 실망할 필요도 없다. 멈추지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완주한다. 마라톤과 삶은 많이 닮았다.


어느덧 남은 거리 10km라는 푯말이 보인다. 집 근처 기지제 공원을 한 바퀴 돌면 약 5km 정도다. 그걸 2번만 돌면 된다는 생각을 하니,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오르막이 나타났다. 무릎 아래가 무거워진지 꽤 되었다. 그런데 오르막과 함께 워치에서 젝스키스의 '로드파이터'가 나온다. 평소에도 이 노래를 들으면 나는 전투력이 올라가서 달리고 싶다는 기분을 종종 느꼈었다. 이 극한의 힘든 상황에서 듣는 로드파이터는 아니나 다를까 나에게 드래곤볼의 '선두'(?)와 같았다. '지금 나는 로드파이터다.' 갑자기 힘이 샘솟는다. 갑자기 속도가 올라간다. 미친 듯이 팔 스윙을 하며 달렸다.


그러다가 또 내리막이 나온다. 내리막은 다리가 풀려서 넘어지면 안 되니 속도를 확 줄였다. 나는 아직까지 마라톤 참가 경험이 많지 않지만 해남마라톤이 결코 편한 코스가 아니라는 걸 느꼈다. 그리고 마지막 언덕은 그야말로 최고였다. 웃음이 절로 나는. 나는 느렸지만 끝까지 걷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너무 기뻐서 손뼉을 치면서 들어왔다. 나의 생애 첫 풀코스 완주다. 들어오는 데 누가 여자 6등이라고 한다. 처음에 나보고 하는 소리인지도 몰랐다. 완주의 기쁨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남편이 놀란다. 첫 출전인데 넘 잘 뛰었다고 남편도 덩달아 좋아한다. 총 걸린 시간은 4시간 8분. 그런데 그 여자 6등이 진짜 나란다. 이럴 수가! (해남대회에서는 여자 풀코스 출전자가 매우 적었기 때문에 가능한 등수다.)


돌이켜보면 오늘의 풀코스 완주는 철저한 준비와 페이스 조절 덕분에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초반 10km는 6분대의 페이스로 천천히 달렸다. 최대한 에너지를 아끼며, 나는 빨리 가는 게 목표가 아니라 오늘 걷지 않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이다. 전날 사우나에서 근육을 풀었던 것도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번 해남마라톤은 곳곳에서 이름을 불러주며 응원해 준 해남 주민분들의 따뜻한 마음을 흠뻑 느끼며 레이스를 즐길 수 있는 대회였다. 직접 바나나 껍질을 까서 건네며, 파스 스프레이를 뿌려주시며, 낯선 러너들을 진심으로 챙겨주셨다.


풀코스 마라톤의 완주는 흡사 자연분만을 성공했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다. 나는 두 아들을 조산원에서 자연주의 분만으로 출산했다. 무통주사나 유도분만 등을 하지 않고 오로지 자연스럽게 출산하기 위해 나는 임신 전 기간동안 준비를 했다. 그리고 자연주의 분만에 성공했을 떼 그 기쁨과 성취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뒤로 나는 '애도 낳았는데, 이것을 못하랴'는 생각으로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는 데 주저하지 않게 되었다. 당시 우리 아이들을 받아주신 조산사 선생님이 첫 자연 분만은 마라톤을 완주하는 정도의 에너지가 소모된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마라톤을 뛸 때마다 그 생각이 난다. 그리고 첫 풀코스 완주에서 나는 자연주의 분만에 성공했을 때의 성취감과 쾌감을 다시 한번 더 느꼈다.


삶은 절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취업이나 임용과 같이 누군가의 선택을 받아야 하는 것은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마라톤은 오롯이 내 의지로 선택한 도전이다. 어느 누군가에 의해 성공과 실패가 결정되는 도전이 아닌 과거의 나를 뛰어넘는 도전이다.


그래서 마라톤을 통해 과거의 나를 넘어서는 경험은 내 삶의 한 부분을 스스로 통제하고 있다는 확신을 준다. 이는 가슴 벅차오를 정도로 짜릿한 쾌감이다. 그리고 그 확신은 다시 새로운 도전을 향한 용기가 된다.


오늘 해남마라톤은 첫째 민제의 두 번째 하프 도전이다. 최근 민제는 달리기가 재미없고 흥미가 많이 떨어졌다는 말을 하곤 했다. 그러면서 오늘 힘들면 10km만 뛰고 들어온다고 했었는데, 민제가 하프를 완주했다. 지난번에 아이는 2시간 58분에 완주를 했었는데, 오늘은 이전보다 20분 빨리 2시간 34분에 들어왔다. 마지막 언덕을 걷지 않고 뛰어 올라왔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덩달아 아이의 자존감도 부쩍 성장하는 게 보인다.


오늘 현수도 5km를 29분에 들어왔다. 해남 초반 5km는 오르막 내리막이 연속되는 데 열심히 잘 뛰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빠와 형이 현수를 '긁'었단다. 하프를 2번이나 완주한 민제는 현수를 놀리고 아빠는 5km를 5번이나 뛰었으며 다음에는 10km를 뛰어야지 않겠냐며 이야기한다. 현수가 다음에는 10km를 도전하겠다고 주먹을 불끈 쥔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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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마라톤 피니쉬 라인을 통과하는 나와 현수

사실 나의 본격적인 마라톤 도전은 민제의 사춘기를 좀 더 건강하게 보내고 싶은 의도로 시작한 것이다. 일명 '육아마라톤'이다. 아이 덕에 시작한 마라톤이지만 이제는 내가 누구보다 달리기에 진심이다. 사춘기를 운동으로 보내고 있는 민제는 공격적이고 극단적인 말이나 행동이 극적으로 많이 줄었다. 변화된 민제에게도 달리기에도 진심으로 감사하다.


마라톤이 끝나자 다들 지쳤다. F1 체험은 무슨.. 집에 가서 다들 쉬고 싶다고 아우성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얼른 샤워하고 눕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풀코스 후 몸 상태는 대박이다. 온몸이 근육통이다. 이런 건 거의 처음인 듯하다. 종아리, 허벅지, 골반, 엉덩이근육, 허리, 등, 어깨에 근육통이다. 심지어 복근운동을 심하게 한 것처럼 복근도 당긴다. 달리기가 전신운동이라는 걸 몸으로 제대로 알게 되었다. 운동 후 근육통은 일종에 내가 운동을 제대로 했다는 증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운동 후 근육통이 있을 때마다 묘한 쾌감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풀코스 완주 후의 전신근육통은 나에게 엄청난 쾌감으로 다가왔다. 와.. 죽이는데..ㅎㅎㅎ.. 너무 좋았다. 나는 변태임이 틀림없다.


우리의 로드매니저 남편의 권유로 마라톤 다음날인 일요일에는 사우나에 가서 전신마사지를 받았다. 거기다 냉온탕을 번갈아가며 탕 속에서 계속 걸었다. 뭉친 근육을 풀기 위해서다. 그러고 나서 자고 일어났더니 다음날 아침 몸이 멀쩡하다. 몸에 힘이 좀 없긴 하지만 대부분의 근육통이 사라졌다. 출근했더니 동료가 주말에 풀코스 뛴 사람 맞냐고 놀란다. 나도 신기하다. 회복이 이렇게 빠르다니.. 기억해야겠다. 앞으로 풀코스 마라톤 후에는 전신마사지+냉온탕 걷기를 마라톤의 마지막 코스로 잡아야겠다.


해남마라톤을 끝으로 올해는 더 이상 마라톤을 나가지 않을 생각이다. 올초 새해 계획을 보니 하프마라톤 완주가 목표로 있다. 나는 목표를 초과달성한 셈이다. 내년에는 다른 지역의 풀코스와 더불어 아이들과 함께 부산에서 하는 철인 3종 가족릴레이에 도전할 생각이다. 마라톤은 아이와 함께 도전하는 철인 3종을 위한 여정 중 하나이다. 2026년에는 아이와 함께 더 많은 도전이 기다리고 있다. 벌써부터 설렌다.


* 풀코스 마라톤 완주와 회복 팁*


1. 초반에 걸을 정도로 느리게 시작하기. 빨리 달리는 것보다 걷지 않는 것이 더 중요

2, 무릎 테이핑이나 발목 테이핑 도움 받기

3. 마라톤 후 사우나에서 냉온탕을 번갈아가며 계속 걷기 + 전신마사지

4. 마라톤 전 최소 3일은 탄수화물 위주로 잘 챙겨 먹기 (달릴 때 피로도가 줄며 체력 관리에 도움 됨)

5. 나만의 달리기 플레이리스트 갖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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