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06 마을카페에서
호모사피엔스의 강력한 속성 중 하나가 무리를 짓고, 위계를 만들고, 정치를 한다는 점이다. 이건 개인이 호불호로 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다행히 우리 종은 개개인에게 천부적인 권리, 즉 인권이 있다는 개념을 발달시켜서 동물보다 위계를 정하는 방식이 복잡하고 전반적으로 덜 폭력적이다. 방식이 어떠하든 간에 이 위계는 우리가 무리를 짓는 순간 자연스럽게 발생하고, 곧이어 정치가 시작된다.
사회적협동조합(이하 '사협')의 타이틀을 건 주거공동체라고 해서 다를 건 없다. 사협이건 주거공동체건 사람들이 일정공간에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집단을 이루었으니 리더그룹이 발생한다. 우리 아파트의 리더그룹은 조합 이사회다. 일반 분양아파트의 입주자대표회의(이하 '입대위')와 비슷한 위상이라 할 수 있겠다.
나는 여러 우여곡절 끝에 이 아파트에 흘러들어왔다. 최초에 커뮤니티 메이커 활동(커뮤니티 시설 설계와 사용목적에 대해 논의하는 일종의 활동가)도 잠깐 했으나, 입주가 불확실해 빠졌었다. 그 후 완공이 되어 어쩌다보니 입주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때의 나는 마을의 위계나 정치(혹은 거버넌스:지배구조, 통치방식, 행정기구의 배치, 관리체제)에 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먹고 살기도 빠듯한데 아파트 공동체의 속사정까지 알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이런 마음을 무관심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그 근본은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다.
신뢰의 근본은 이 아파트 최초기획단계부터 사회적가치(소셜밸류)와 관련된 사람들이 발기인이 되어 조합을 설립했다는 사실때문이다. 사회적기업, 사회적협동조합을 비롯해 각종 공동체와 사회운동단체에 몸담았던 사람들이 앞장서 마을을 잘 꾸려갈 것이니, 나같은 일반인은 곁에서 응원이나 하면 된다고 여겼다. 오히려 일말의 부채의식마저 있었다. 조합 임원진들 모두 무보수거나 실비지원 정도일텐데, 공동체를 위해 내 몫의 일까지 대신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미안함 말이다. 이 미안함에는 나의 편견도 작용했다. '사회적'이란 수식어가 붙은 단체나 회사 사람들은 평균의 대한민국 사람들보다 더 민주적이고 수평적 관계를 지향할 거라는 편견 말이다. 그래서 작은 일 하나 결정하고 추진하는데도 일반 아파트 입대위보다 더 많은 토론과 간담회, 공청회를 열면서 어렵게 어렵게 마을을 운영할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당시 나의 지레짐작은 맞았을까? 우리 아파트는 주민간의 수많은 만남과 토론으로 공개적으로, 수평적으로, 민주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을까? 아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런 짐작은 나의 편견이 만든 환상일 뿐이었다. 그 때의 나는 무심한 응원보다 적극적인 참여와 견제를 했어야 했다....
22년 여름 경, 임시 사무국장 SI가 퇴사하고 상임이사 JW가 사무국에 근무하게 되었다. 참고로 상임이사란 조합에서 급여를 받고 상시적으로 근무하는 이사란 뜻이다. 나는 당시 조합의 구조나 역할, 종사하는 사람들 개개인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어쨌거나 사무국은 이사회와의 중요한 연결통로이다. 임시 사무국장 SI가 내가 봄에 건의한 마을카페 반려견 동반허용 문제를 이사회와 새 사무국에 잘 넘겼다길래 답이 오기를 얌전히 기다렸다.
더위가 한풀 꺾인 9월이 되었지만 사무국으로부터 아무런 답이 오지 않았다. 답답했다. 퇴사한 SI는 여전히 마을에 살고 있어서 마주쳤을 때 물어보면 퇴사 전 인수인계를 확실히 했다고 했다. 대체 어찌 된 일일까? 다른 일이 많아서 논의가 미뤄지고 있다면, 그렇다고 말을 해줘도 좋을텐데.... 혹은 그런 상황을 전달할만한 여력이 없을 정도로 마을일이 많은 걸까? 그렇지만 5월에 문의했고, 3개월도 더 지났다. 기다림이 너무 길다. 결국 나는 9월 말경, 상임이사 JW와 통화를 하고 정식으로 만남을 갖기로 했다.
22년 10월 6일에 마을카페에서 상임이사 JW와 사무국 팀장 HC, 나와 멍냥의 임원인 HK, SB, 이렇게 다섯이 만나 회의를 했다. 우리의 물음은 단순했다. 마을카페에 강아지를 동반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될까? 당장 어렵다면 어떤 논의를 거쳐 언제쯤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하지만 우리는 대답 대신 '역민원'을 들었다. 상임이사 JW는 안그래도 개들때문에 고민이 많다고 운을 뗐다.
첫번째는 배변문제다. 특히나 그 무렵엔 단지 내에 치우지 않은 개똥이 많았다. 보통의 반려견 보호자들, 특히 멍냥의 회원들은 이 개똥이 반려인에 대한 혐오를 만들까봐 노심초사하며 남의 개 똥도 자주 줍는 상황이었다.
두번째는 근처 떠돌이개 혹은 유기견들에게 먹이를 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게 온라인카페에 회자되며 마을 내에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세번째는 강아지들이 잔디광장에 출입하는 문제였다. (누구나 자유롭게 오가는 잔디광장 출입이 왜 문제인지는 당시도, 지금도 모른다...) 동의하던 동의하지 않던 반려인이 아니라면 그런 생각이 들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에도 공동체 생활에서 늘 문제로 떠오르는 반려견 산책예절이나 헛짖음 등도 거론되었다. 그런데 좀 애매한 상황이다 싶었다. 멍냥토크회는 일개 동아리지 마을 내 반려동물을 대표하는 단체가 아니다. 따라서 이런 민원을 우리에게 제기하는 건 그리 합당하지 않아 보였다.
나는 멍냥토크회는 상임이사 JW가 제기하는 문제를 다룰 권한이나 능력이 없다고 했다. 500세대가 넘는 아파트인데 당시 우리 동아리 회원은 20세대 남짓이었다. 가입하지 않은 반려동물가정이 훨씬 많다. 멍냥토크회에 대표성이 있을리 없다. 하지만 상임이사 JW는 우리의 영향력을 높이(?) 산 모양인지 거침이 없었다. 내가 느끼기에 이것은 정치적 딜을 제안하는 것이었다. 이러저러한 민원이 우려스러운데, 너희가 이것을 해결하는데 앞장서 우릴 돕는다면, 우리도 너희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할게, 로 느껴졌다. 나만 느낀 것이 아니라 같이 있던 HK, SB도 그렇게 받아들였다. 혹 떼러 갔다 혹 붙인 격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동아리차원이든 개인차원이든 여태 공동체에 별로 기여한 것도 없고, 상임이사 JW의 역민원 중 일부는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문제들을 멍냥토크회가 나서서 당장 해결하거나 주장할 순 없다, 하지만 반려인들이 모이는 행사를 만들어 단지내 반려인들의 관계망을 만들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렇게 관계망이 형성되면 개똥수거 캠페인이든 뭐든 진행이 훨씬 쉬울 것이기 때문이다. 상임이사 JW는 알았다고 했고, 나는 전폭적인 행사지원을 요청했다. 나는 조합의 '전폭적인 지원'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일개 동아리가 주최하는 모임이 아니라 조합이 후원하는 마을의 공식적인 행사라는 타이틀을 가져야 많은 주민이 관심을 가지고 참여할 거라고 봤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무국과의 공식적인 만남 후 임원 SB의 집에서 행사기획 모임을 가졌다. 그야말로 번개불에 콩구워먹듯 후다닥 달별로 세 개의 행사를 기획했다.
10월, 마을상가 미술학원 선생님을 초빙해 '반려동물 초상화 그리기 원데이 클래스'
11월, 동네 유일의 동물병원 수의사선생님을 초빙해 '강아지 생애주기별 건강관리법 강의'
12월, 크리스마스를 맞아 공유주방에서 '멍냥 케이크 만들기 원데이 클래스'
임원들끼리 행사를 기획하며 저 행사는 '미끼'이고 본래 목적은 저 행사 앞에 1시간 가량 단지 내 반려인들이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을 갖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래서 행사 앞에 인사를 나누는 그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지에 관해 매우 치밀한 계획을 짰다.
아아, 돌이켜보면 어찌나 열정이 넘쳤던지.... 내 (강아지) 새끼와 마을카페에서 차 한잔 할 그 날을 위해 우리는 참으로 열심히 달렸었다. 비록 정치적 딜로 결정된 행사지만 모두에게 좋은 일 아닌가? 단지 내 반려인들이 관계성을 만들어 반려동물로 발생하는 각종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잡으려 한 것이니까. 드디어 우리 멍냥토크회도 공동체에 뭔가 기여한다는 느낌이 좋았다.
우리는 사무국에 행사를 알리고 다시 한번 전폭적인 지원을 부탁했다. 특히나 10월 행사는 시간이 빠듯했다. 기록관 역할의 임원 HK가 주축이 되어 급히 여러 문제들을 조율했고, 멍냥토크회의 여러 사람들이 나서서 '반려동물 초상화 그리기 원데이 클래스'진행을 도왔다.
다음 번에는 개별행사들이 어떻게 치루어졌는지 얘기해보겠다. 이 이야기의 결과는 행사들이 하나하나 치뤄지는 과정에서 기묘한 반전과 예상치 못한 배신, 강한 의견대립과 깊은 상처 같은 것이 발생하며 뜻밖의 파국과 국면전환으로 이어진다. 글을 쓰며 돌이켜보니 단조의 음악이 바닥에 깔려 머잖아 위기가 닥칠 서스펜스 영화의 한토막같다. 등장인물들은 행복한 미래를 그리느라 머잖아 발생할 배신과 냉대는 꿈에도 모르고 있다. 아아, 안됐어라.... 인생이 가혹하고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는 건 알았지만, 주거공동체살이도 그럴 줄은, 나도 우리 멍냥의 임원들도 그 땐 전혀 몰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