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유엔은 지구 온난화 시대는 끝이 났고 이젠 지구 열대화 시대가 도래했다는 깊은 우려의 선언을 했다.
평소에는 한낮에나 골짜기를 온통 삶아내듯 지독하게 들끓던 열기가 지난밤에는 밤잠마저도 탈취할 기세로 늦은 밤까지 열어 놓은 창문을 슬금슬금 넘어왔다. 근 백여 년 만에 닥친 모진 열대야라고 부산을 떠는 언론이 아니어도 산골의 밤까지 찾아와 날치는 것만으로도 열대야의 위력을 짐작할 만하다. 한낮의 열기는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밤이면 어김없이 서늘한 바람이 솔솔 창을 넘어와, 열대야에 잠을 설친다는 말은 콘크리트 건물이 경쟁하듯 다닥다닥 들어선 대도시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는데, 늦은 밤까지 열기가 식지 않아 연신 찬물을 끼얹다가는 유례없는 열대야임을 비로소 실감하게 되었다.
시골에 들어온 후로는 산이 가까워서인지 에어컨을 가동하지 않고도 여름 나기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밤의 고약한 열기는, 선풍기 한 대면 약한 더위들은 모기 달아나듯 해서 그저 거실 한편 장승처럼 우두커니 지켜서 있기만 했던 에어컨의 위력을 보고 나서야 슬그머니 연기 사라지듯 꼬리를 감추었다. 그러고 보니 절기상 대서(大暑)를 지나고 있다.
소서와 입추 사이에 있으니 더위의 정점은 분명한데 더위의 감도가 심상치 않다. 한낮의 태양은 가히 맞서기 어려운 위력으로 군림하고 있어 농부들은 땡볕 아래 논밭에 나가서 일하는 것보다 새벽이나 이른 아침의 서늘함을 틈타 참새처럼 짧은 노동을 하고 해가 뜨면 낮은 지붕 아래로 틈입한다.
이즈음의 들녘은 한껏 짙어진 초록으로 만연하다. 논에 벼들은 대가 단단해지며 머잖아 휘어지도록 열리게 될 쌀의 무게를 감당할 준비를 하고 감자를 심었던 밭은 포슬포슬 분이 터지는 감자 알맹이들을 모두 토해 내고는 해산한 산모처럼 나른한 휴지기에 들어갔다. 김장 배추나 무를 심을 때까지는 쉬면서 지력을 회복할 것이다.
들이나 풀숲에서 들리는 풀벌레 소리가 높아지는 때도 대서 무렵이다. 대서와 입추 사이에 들리는 풀벌레 소리는 약간의 차이를 가지고 있다. 입추 이전의 풀벌레 소리는 마치 드라마의 배경음악과 같다. 풍경에 몰입되어 있으면 존재감을 느낄 수 없지만 유희하듯 초록을 타고 흐르며 여름의 풍경을 더욱 짙게 만드는 바탕색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입추를 지나면서 풀벌레 소리는 마치 오페라의 아리아처럼 도드라지며 존재감을 높이 세우고 소리는 더욱 청명 해져 소프라노 가수가 열창하듯 귓속을 가득 메운다. 그때는 부지런히 광합성을 하며 엽록소를 만들던 식물들의 생명 활동이 잦아들며 한 계절의 결실을 준비하는 때이다.
풀벌레 소리는 마치 이제는 결실을 준비해야 할 때임을 알리는 나팔수 같아서 들과 풀숲은 조금씩 숙연 해 지는 것이다. 이때는 왕성히 뻗어가던 고구마 줄기들도 야위어지며 수분과 양분을 땅 아래 구근에 양보한다. 그렇듯 여름의 정점에 언뜻언뜻 가을의 얼굴을 미리 본다는 것은 시골의 환경변화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면 분별하기 어렵다.
더위에 습도까지 더해진 여름날은 우리 몸이 가장 힘겨운 날이다. 열린 모공으로 분출된 땀에 속옷이 질척하게 달라붙는 느낌은 차라리 상의 탈의를 하고 사는 남태평양 폴리네시안들의 생활문화를 동경하게 한다. 그럴 때는 가끔 꺼내 입는 까슬까슬한 모시옷의 불편함도 즐거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쩌다 모시옷을 입고 나설 때면 사람들의 이목이 쏠린다. 보편적인 현대 복식이 아니니 신기하게 보일 터이고 노인들이나 입을 성싶은 옷을 젊은 사람이 입고 다닌다는 데 대한 삐딱한 편견의 눈들도 읽힌다. 그러나 내가 살던 고향은 유교적 관습과 문화가 삶에 깊이 배어 있었던 곳이라 모시옷은 노인들이 보편적으로 여름에 즐겨 입는 옷이었고 젊은 사람들이 입고 다니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어머니는 내가 총각으로 공직 생활을 할 때 지금 입는 모시옷을 장만해 주셨는데 동네에서 바느질 솜씨가 좋기로 이름난 한복집(동네 사람들은 그 집을 아폴로 집이라 불렀는데 그 이유는 알지 못한다)에서 적잖은 대가를 지급하고 장만해 주셨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내가 빳빳이 줄 세운 모시옷을 입고 주일날 나란히 교회에 가는 모습을 무척 흐뭇해하셨다.
모시옷은 특성상 요즘 옷처럼 대량생산이 쉽지 않을뿐더러 풀 먹임을 하고 다리미로 천천히 다려 입혀야 하니 만지는 사람의 정성도 적잖이 들어가야 입을 수 있다. 어머니 생전에는 당신께서 손수 수고를 감당해 주셨고 내가 결혼한 후에는 아내가 어머니께 전수받아 모시옷을 손질을 해 준다. 요즘 같이 맞벌이로 시간이 팍팍한 젊은 세대들에게는 전통 복식이라는 것에 대한 거리감보다 옷 손질에 대한 어려움이 모시옷을 입을 엄두를 내기 어려운 이유가 될 것이다. 다행히 아내는 어머니처럼 기꺼이 모시옷을 만지는 수고를 감수하고 정성껏 손질해 주는 덕분에 여름 나절의 며칠은 모시옷을 입는 호사를 누린다. 그러나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널찍한 씨줄과 날줄 사이로 서늘함이 느껴지고 몸에 달라붙지 않는다는 것을 제외하면 사실 모시옷은 불편하기 이를 데 없는 옷이다. 우선은 까슬까슬한 촉감 때문에 몸과의 일체감이 없고 몸은 몸대로 옷은 옷대로 따로 노는 느낌이다. 그러므로 활동력이 있는 일을 할 때는 적당치 않다. 자연히 모시옷을 입을 때의 몸가짐은 조심스러워진다. 글줄이나 읽는 한가로운 선비들이나 입었을 듯싶은, 실용성보다는 기능성과 맵시에 중점을 둔 옷인 셈이다. 그리고 저고리와 함께 입는 바지는 긴 끈을 허리춤에 질끈 동여매는 것이라 화장실을 다녀와야 할 때는 추스르기 쉽지 않다. 자칫 주르르 흘러내리면 남세스러운 경우도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음식을 먹을 때도 붉은 간이 튈세라 무척 신경을 써야 한다. 흰모시에 밴 붉은 간은 금방 표시가 나므로 아주 조심하지 않으면 옷으로 폴짝 튀어 오른 간 때문에 집에 돌아갈 때까지 찜찜한 기분에 젖어든다. 이러한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모시옷의 시원함을 즐기기에는 요즘 세상이 너무나 바쁘게 돌아간다.
풀 먹인 모시옷은 면이나 폴리에스터처럼 휙휙 다림질을 할 수 있는 소재가 아니니 천천히 정성 들여 다림질할 만한 마음의 여유를 가진 이들이 많지도 않을 것이며, 몸에 착 감기는 기능성 옷을 입고 뛸 준비를 해야 할 요즘의 세대들에게는 모시옷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보다 냉감 소재의 폴리에스터 옷이 훨씬 유용할 것이다. 그러나 모시옷은 입는 사람이 늘 그 옷에 깃든 많은 이들의 수고로움을 안다. 모시풀을 가꾸고 거두어들인 이의 땀과 씨줄 날줄로 엮여 삼베옷 보다 촘촘히 짜낸 사람의 인내와 한 땀 한 땀 정교한 바느질로 옷을 만들어 낸 사람과 풀 먹여 정성스럽게 장만 한 이의 시간이 만들어 낸 아주 느리고도 수고로운 옷이라는 것을……. 이 또한 옛날 선조들이 입을 때처럼 옷과 피부가 닿지 않도록 속옷처럼 입었던 등등거리나 등토시를 하지 않아 얼마간의 개량을 거치기는 하였으나 그나마 여름 거리에서 좀처럼 보기 힘들어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마치 오랜 전통의 끝자락을 잡고 사는 사람처럼 유지하고 전승해야 할 명분 없는 책임감에 쌓인다. 어쩌면 내가 모시옷의 가치와 멋을 사모하는 마지막 세대일지도 모를 일이며 실용과 속도에 밀려 민화 속 도포 자락처럼 홀연히 사라져 그림이나 역사 드라마 속에서나 자취를 남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주말이면 선풍기 바람을 등지고 뜨거운 다림질에 정성을 쏟을 아내의 손이 아름다워 보일 것 같은 여름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