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더 이상 삼한사온의 나라도,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도 아니다. 여름은 너무 덥고, 겨울은 너무 추운 존덥존춥의 나라가 됐다. 바야흐로 낮 기온 30도가 우습게 넘어버리는 여름이다. 요즘 내가 자주 찾는 곳은 설빙이다.
달다구리 헤이터로서 단 음식이나 단 음료는 정말 안 마시는 편이지만, 빙수는 예외로 둔다. 달다구리 헤이터의 당 충전 챌린지 같은 개념이랄까. 내 최애 설빙 메뉴는 아주 긴 이름을 자랑하는 'ABC초코쿠키 녹차빙수'다. 이름만 들어서는 아주 달 것 같지만, 생각보다 달지 않다. 내가 설빙을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다.
작년만 해도 너무 달 것 같아서 설빙을 잘 가지 않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올해 몇 번 설빙에 방문할 일이 있었는데 막상 먹어보니 웬걸?! 이거 생각보다 먹을만하잖아?! 먹을만한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맛있었다. 더 달게 먹고 싶은 사람을 위해 연유소스를 따로 준 것만으로도 설빙 사장님은 돈벼락을 맞을 이유가 충분하다.
겉보기엔 그냥 ABC초콜릿 같아 보이는 초코과자는 이 빙수의 차밍포인트다. 심지어 별로 안 단데 식감은 또 매력적이어서 계속 집어먹게 되는 부작용을 초래한다. 문제는 초코과자 뿐만이 아니다. 빙수 위에 얹어진 녹차 아이스크림은 녹차러버인 나의 심금을 울린다. 우유 베이스로 추정되는 빙수에 여러 가지 토핑을 바꿔가며 맛보다 보면, 어느새 한 그릇 뚝딱이다. 사람의 마음을 살살 녹이는 아주 위험한 디저트다.
친히 자기 몸을 녹여 사람의 마음도 살살 녹여버리는 설빙의 빙수를 보고 있자니 사람의 마음도 이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 사람의 얼어버린 마음을 녹이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내 경우엔 기브 앤 테이크보다 기브 앤 스테이 전략이 먹혔다.
철천지 원수까진 아니어도 미묘하게 신경전을 벌이게 되는 상대가 있다고 치자. 주는 거 없이 미운 그런 상대 말이다. 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괜히 관찰하게 되고, 나와 비교하게 된다. 이 마음이 조금 더 깊어지면 질투와 미움의 마음이 블렌딩 되어, 어느새 내 마음은 지저분한 흙탕물을 뒤집어쓰게 된다. 가장 괴로운 건 나다. 어쩌면 나와 그 사람일 수도 있다.
물론 누군가를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내 마음대로 조절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노력하는 건 내 의지다. 내가 먼저 그 사람을 배려하고 양보하면 그 사람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이쪽의 태도에 미묘한 변화가 생겼음을 알게 된다. (상대방의 배려조차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은 논외로 치겠다)
변화를 알아차린 그 사람은 처음엔 의심할 수도 있다. 뭐지? 갑자기 나한테 왜 저러지? 바라는 게 있나? 당연한 수순이다. 하지만, 받기를 기대하지 않고 좋은 것을 흘려보내면 신기하게도 그 좋은 것은 나에게로 흘러온다. 내가 말하는 좋은 것은 금전적 보상이나 우연한 행운 같은 것이 아니다.
내 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 설사 상대방이 알아차리지 못하더라도 내가 그 사람을 진심으로 선대 하면 그 선한 마음의 메아리는 내 마음으로 다시 돌아온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 이젠 네 차례야. 어떻게 갚을 거야?'하는 마음이 아니고, 그저 개울물에 종이배를 띄워 보내듯 내 마음을 흘려보내는 것이다.
만약 상대방에게서 좋은 반응이 오면 이건 화해의 신호다. 흑과 백으로 나뉘어 백색에서 흑색으로 퐁당 넘어오는 것이 아닌, 흑색에서 회색으로 회색에서 백색으로 넘어가는 미묘하지만 확실한 차이다.
누군가가 미워지려 하면 나는 내 마음의 고삐를 잡는다. 내가 저 사람의 입장이었다면 더한 짓도 했을 걸? 합리화가 아니라 나는 누구보다 나를 잘 안다. 이런 나이기에 누군가에게 용서와 사랑의 마음을 흘려보내는 것이 쉽진 않지만, 작심삼일을 매일 하다 보면 습관이 된다는 말이 있듯, 나는 오늘도 작심삼일의 첫째 날을 맞는다. 작심삼일의 습관이 굳은살처럼 박이기를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