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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제 Jul 26. 2024

하고 싶은 건 다 해봤던 그때

열심히 한다고 뭐 더 주는 것도 없었는데


아 청소 용품을 안 샀네!


한창 신규 매장을 공격적으로 늘리고 있던 때였다. 매장 오픈하기 직전 몇 주는 정말 바빴다. 필요한 물품을 미리 구비해 두고, 사이니지나 디자인물도 미리 제작해놔야 하고, 부피가 큰 경우 오픈 일정에 맞춰서 매장에 배송되도록 해두어야 했다. 대부분의 일은 가장 오래된 직원이었던 메뉴개발팀장인 제이가 담당했는데, 그녀는 지독한 P에 건망증이 심했다. 종종 물품을 빼먹어서 오픈 당일날 가까운 마트에 다녀오기 일쑤였다.



오픈 디자인물 제작만 담당했었지만, 옆에서 이 상황을 보며 이 문제를 바꾸고 싶었다. 참 단순한 일이었다. 시트에 필요한 물품을 다 적은 후에 카테고리대로 나누고, 인터넷에서 구매가 가능하다면 각 물품별로 가장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는 곳에서 구매하면 끝날 일이었다. 인터넷 구매가 불가능한 것만 따로 추려서 가까운 마트에서 한 번에 사 오면 빼먹을 일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행여나 이런 얘기를 하면 제이가 기분이 상할까 싶어, 혼자 구글 시트로 초안을 만들어 제이에게 공유했다. 역시나 너무 쿨한 그녀였기에, "오 제이든 너무 좋아"라고 하며 건넨 이런저런 칭찬에 기분이 좋은 것도 잠시. 왠 걸, 오픈을 위한 물품 준비 일이 어느새 자연스레 내 업무로 넘어와 버렸다. 그때는 쇼핑몰 적립금이 쌓인다고 좋아했던 것 같은데. 사실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제안을 통해 무언가 바꿔가는 것에 재미를 들른 나는, 그 후로도 계산대에 붙이는 형태의 신규 사인물, 냉기 때문에 훼손이 잦은 가격표의 재질 개선, 디자인물을 턴키로 제작할 업체의 선정, 객단가 상승을 위한 카운터 스낵바의 신설 등 꽤 많은 것들을 신나게 바꿔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하지 말아야 할 말까지 꺼내고야 말았으니.




제가 마케팅을 해봐도 될까요?


회사는 계속해서 성장해 나갔지만 대표가 직접 운영하던 인스타그램은 젊은 이미지의 브랜드와 너무나도 결이 맞지 않았고, 마침 대행하던 업체와의 계약도 끝이 나고 있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조심스레 SNS 운영을 제안한 것이다. 대답은 역시나 "Sure, Why not Jayden! 나야 너무 고맙지"라는 쿨한 대표. 그렇게 디자인에 오픈 물품 준비에 마케팅까지. 그야말로 못 하는 거 빼고는 다 맡고야 만 초년생의 패기였다.  


마침 본사도 이전을 하며 명함을 새로 만들게 됐고, 혼자 밖에 없던 디자인팀은 디자인마케팅팀이 되어 직급도 대리를 달게 됐다. 아주 파격 승진이었지만 "대표님 제이든 대리 달아줘도 돼요?"라는 경리 멜리사의 말에 "Sure, Why not!"이라는 대표의 대답이 만든 다소 어이없는 비하인드에, 사실 외부에 나갈 일이 거의 없던 터라, 문자에 불과한 직급일 뿐이었다.




제이든, 3개월 정도 여의도점 점장을 해줘야겠어



그렇게 시키지도 않은 일을 자꾸 벌려가며 일의 즐거움을 만끽하던 그때, 갑작스레 대표에게 점장대행직을 제안받게 됐다. 당시 일하던 점장이 출산휴가를 가게 된 터라 점장 자리가 공석인데, 대행을 할만한 직원이 없어 본사에서 지원을 가야 한다는 거였다. 당시 다른 팀장들은 주방 지원을 나가 사실상 나밖에 갈 사람이 없기도 했다. 그때 깨달았다. 다른 일을 제안하고 원하는 일을 하는 것도 좋지만, 잘못하다가는 그저 뭐든 시키기 좋은 쉬운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래도 3개월간의 점장 생활은 나름 재밌었다. 11시 출근에 10시 퇴근, 점심 피크가 다 지나 밥을 먹게 되어 꼬인 생활 패턴과, 장기간 서 있어서 생긴 만성 다리통증을 제외하면 말이다. 비슷한 또래들과 매장에서 웃고 떠드는 것도 재밌고, 매일 점심 메뉴를 고민하며 직접 셰프가 만들어준 직원식도 잊지 못할 거다.


그렇게 첫 직장은 나에게 정말 많은 경험과 교훈을 남겨주었다. 그 교훈의 마침표는 퇴사면담에서 찍게 됐는데, 마이크로 매니징을 하던 대표에게 '전문가도 아닌데 하나하나 다 지적하셔서 너무 일하기 힘들었다'며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하고야 말았다. 너무나 당돌한 그 모습에 놀란 대표는 눈이 똥그레지며 그날부터 어색한 기류를 풍겼으며, 나도 괜히 미안한 마음이 생겨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게 되었다.


6개월을 생각한 인턴은 그렇게 1년 3개월이 되어버렸고, 덕분에 스물아홉이 되어서야 졸업을 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여러모로 철이 없고, 그래서 용감했던 첫 사회생활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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