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내를 안 받았는데 어떻게 알아서 하죠?
기대되는 첫 출근날. 자취방이던 홍대에서 강남까지는 거의 1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그래도 2호선으로 한 번에 갈 수 있어서 다행히 앉아서 갈 수 있었다. 회사는 처음 면접을 본 매장과 같은 건물 9층에 위치한 복층 오피스텔. 닉네임을 사용한다고 해 한글 이름과 유사한 제이든이라는 영어 닉네임도 새롭게 만들어 전달해 두었다.
제이든, 반바지 입고 왔어?
7월 중순이었던가. 30도가 넘는 한 여름 날씨였기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반바지를 입고 첫 출근을 한 모습을 보고 대표는 인사대신 놀람인지, 핀잔인지 모를 말로 나를 맞았다. 일반적인 회사 예절을 알리 없는 사회 초년생이었기에, 복장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고, 회사 입장에서도 너무 당연했던 터라 따로 안내를 할 생각을 못했다고 했다.
제이든, 대표님은 반바지 입고 있는 거 싫어하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할 말은 하는 스타일의 재무 담당 멜리사가 귓속말로 알려주었다. 출근하자마자 당황한 마음이 조금 진정되자 사무실이 눈에 들어왔다. 인원은 대표와 메뉴개발팀장, 미국에서 온 총괄팀장, 경리에 나, 그리고 대표님의 하얀 고양이까지 5명+1마리였다. 주거용 오피스텔인지라 인덕션, 싱크대 등 주방이었던 자리에는 각종 서류와 짐들이 쌓여 있었고, 신발도 벗어야 했다.
복층 공간에는 스시용 트레이와 박스, 쇼핑백들이 어지럽게 쌓여있었고, 화장실도 일반 자취방 같이 구성되어 있어 대부분 바깥 화장실을 이용하고 있었다. 미국회사라더니, 그저 작디작은 여느 스타트업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게다가 고양이 대문인지 검은색 양말은 금세 흰색 털로 뒤덮여버린 터였다.
나에게 맡겨진 업무는 매장에 필요한 각종 디자인물을 만드는 일. 각종 디자인물을 제작하는 인쇄업체에서 디자인도 같이 진행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인쇄 전문 회사다 보니 디자인이 많이 아쉽다고 생각하던 중이랬다. 멜리사와 함께 매장을 돌며 각종 디자인물을 익히고 어설프게 디자인도 하던 메뉴개발팀장 제이에게 디자인 파일을 인계받으며 정신없는 하루를 보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자료정리. 디자이너가 없다 보니, 로고나 이미지, 제작물이 제대로 정리가 되어 있지 않았다. 필요할 때마다 그때그때 업체에 맡겨온 터라 오히려 인쇄업체에 전화해 기초 자료를 받아야 했다. 로고 매뉴얼도 정리되어 있지 않아서 시그니처인 보라색도 각기 달랐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매뉴얼을 채 정리하기도 전에, 신메뉴 출시를 준비해야 했다. 요식업업계에서 굵직한 경력을 가진 메뉴개발팀장 제이는, 디자인일을 떨치자마자 본업에 충실했고, 그동안 아이디어에 그치던 신메뉴를 물 만난 듯이 출시하기 시작했다. 신메뉴 출시에 맞춰 포스터를 만들고, 메뉴 사인물을 만들고, 원산지 안내표 등 꽤 많은 것을 바꿔야 했다. 게다가 신메뉴 촬영도 내 몫이었다. 대학교에서는 카메라 한 번 제대로 잡아본 적 없던 나였다.
이때 알았어야 했다. 내 직무가 디자인에서 그치지 않을 거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