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오던 날

[안돼야,아니야!] 하얀 괴물의 습격

by 파스카

"폭설로 한계령 도로 진입을 통제..."

"재미없게 모두 재난 뉴스잖아. 애들 데리고 가서 산책도 시키고 맛난 라면도 사 와!"

소파에 누워있던 '분신'이 벌떡 일어나 되물었다.

"아니, 여보. 방금 뉴스에서 폭설이라 위험하다고... 그런데 산책을 하고 라면을 사 오라고?"

'미친'이 리모컨으로 TV를 홱 끄며 말했다.

"한계령이 위험하다는 거지, 우리 동네가 위험하대? 이런 날 뜨끈한 라면 국물에 파 송송 썰어 넣고 먹어줘야 진짜지. 우리 애들도 눈 구경하면 얼마나 좋아하겠어! 당신 추울까 봐 특별히 시키는 거잖아. 얼른 다녀와."

나는 이 대화의 결말을 이미 알고 있었다. '분신'의 저항은 1분을 넘기지 못할 것이고, 나와 저 하수 '아니'는 곧 끔찍한 피난길에 오르게 될 것이라는 것을.

역시나, '분신'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분신'이 현관에서 외투를 입는 동안, '미친'은 창고 깊숙한 곳에서 먼지 쌓인 상자를 하나 꺼내 왔다. 상자에는 매직으로 '우주최강 귀요미'라고 적혀 있었다. 불길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다.

"우리 애기들~ 엄마가 춥지 말라고 꼬까옷 사놨지~"

'미친'이 상자에서 꺼낸 것은 짱짱한 빨간색 네발 우주복이었다. 그녀는 '우리 아니~ 춥지~'하며 하수 '아니'에게 그 옷을 입히려 했다. '아니'는 버둥거렸지만, 결국 앞다리와 뒷다리가 기괴하게 얽힌 채로 우주복 안에 갇혔다. 펭귄처럼 뒤뚱거리는 모습이 가관이었다.

다음은 내 차례였다. 내게 주어진 것은 토끼 귀가 달린 털모자.

나는 서열 2위의 모든 자존심을 걸고 고개를 흔들며 저항했다. '안돼야~ 우리 안돼 이거 쓰면 더 이쁘지~' 하는 대장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속지 않는다. 저런 굴욕적인 걸 쓸 순 없으니까.

내 격렬한 저항을 보던 '분신'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여보, 안돼는... 모자는 싫은가 봐. 그냥 목도리만 해주자."

결국 나는 핑크색 토끼 모자는 피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굴욕적인 땡땡이 목도리를 목에 두르게 되었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분신'은 결심한 듯 심호흡을 한 번 하고 현관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는 순간, 차가운 공기와 함께 눈부신 하얀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어제까지 있던 익숙한 복도의 풍경은 온데간데없고, 모든 것이 두꺼운 솜이불을 뒤집어쓴 것처럼 보였다. 세상은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다. '아니' 녀석의 낑낑거리는 소리만이 유일하게 들려왔다.

'분신'은 다시 한번 한숨을 쉬더니, 펭귄처럼 뒤뚱거리는 '아니'를 품에 안고, 굴욕의 목도리를 한 나를 가방에 넣어 어깨에 둘러멨다. 드디어, 우리가 사진에서 봤던 바로 그 모습이 완성된 것이다.

나는 가방 속에서 고개만 내민 채, 이 어리석은 원정의 시작을 지켜보았다. 우리의 목표는 단지 길 건너편 편의점에서 파는 라면. 하지만 '분신'의 표정은 마치 에베레스트라도 등반하는 산악인처럼 비장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분신'은 쌓인 눈을 밟으며 조심스럽게 나아갔다. 나는 가방 안에서 흔들리는 세상을 구경했다. 하얀 눈에 반사된 햇빛이 눈부셨고, 공기는 칼날처럼 차가웠다.

그때였다. '분신'이 보도블록 위에 얇게 얼어붙은 빙판을 미처 보지 못했다.

"으악!"

'분신'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그는 넘어지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렸고, 그 와중에도 품에 안은 '아니'와 어깨에 맨 나를 보호하려는 몸짓은 처절했다.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마침, 맞은편에서 장바구니를 끌고 오던 할머니 한 분이 이 광경을 목격했다. 우리 집 1층에 사는 할머니다. 그녀는 우리를 향해 혀를 쯧쯧 차며 다가왔다.

'분신'이 겨우 균형을 잡고 숨을 고르자, 할머니가 매서운 눈초리로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

"아이고, 총각! 이 눈보라에 애들을 왜 이렇게 고생시켜! 짐승도 추운 건 똑같아! 당장 애들 데리고 들어가!"

'분신'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그는 "아니, 그게 아니라... 재난이라... 비상식량이..." 하고 횡설수설했지만, 할머니의 기세에 눌려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결국 그는 "네..." 하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한 뒤, 할머니의 따가운 시선을 뒤로하고 다시 편의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나는 생각했다. '분신 저 인간, 서열 4위가 확실하군.'

마침내 우리의 목적지, 편의점 자동문 앞에 섰다. '분신'의 이마에는 식은땀인지 녹은 눈인지 모를 물기가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는 세상을 구한 용사처럼 비장하게 자동문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피곤한 목소리의 아르바이트생이 우리를 맞았다. '분신'이 다급하게 물었다.

"저기... 라면... 라면 어디 있어요?"

아르바이트생이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아, 라면이요? 눈 와서 그런지 방금 다 떨어졌어요. 죄송합니다."

'분신'은 망연자실했다. 그의 어깨가 축 처졌다. 이 모든 고난과 오해를 견디고 도착한 목적지에서 듣게 된 소식이 '품절'이라니.

바로 그때, 그의 주머니에서 '카톡' 하는 소리가 울렸다. '미친'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분신'은 힘겹게 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 그의 눈이 두 배로 커졌다.

나는 가방 속에서 고개를 쭉 빼 그의 폰 화면을 훔쳐보았다. 거기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생각해 보니 이런 날엔 뜨끈한 라면보다 바삭한 치킨이지! 오는 길에 치킨 시켜놔~♥"

'분신'은 아무 말 없이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는 우리를 안고 든 채, 왔던 길을 터벅터벅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의 등 뒤로 편의점의 '딩동' 하는 소리가 공허하게 울렸다.

재난은... 끝났다. 적어도 대장의 머릿속에선.

눈길 피난.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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