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왕 탄생 설화와 지명의 비밀
제 목 : 익산, 용의 도시
- 무왕 탄생 설화와 지명의 비밀
강승구(원광대학교 경영학부 초빙교수)
익산은 미륵 신앙과 백제 무왕의 역사가 깃든 도시다. 이곳에는 유독 ‘용(龍)’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용화산(龍華山), 용안(龍安), 용머리(龍頭), 용연리, 오룡리, 구룡리, 용순마을, 용샘(龍泉)뿐만 아니라, 무왕의 탄생 신화와 연결되는 마룡지(馬龍池)까지, 익산은 그야말로 ‘용의 도시’라 할 수 있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지명들이 특정한 지형과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삼기면의 오룡리와 용연리, 팔봉면의 용제리, 낭산면의 용기리 등 익산 곳곳에 자리한 ‘용’ 관련 지명들은 대부분 하천, 저수지, 습지와 같은 물가 근처에 있다. 이는 동아시아에서 용이 물을 관장하는 신성한 존재로 여겨졌음을 떠올리게 하며, 익산의 자연환경과 신앙적 요소가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삼국유사’의 ‘서동요’ 설화에 따르면, 무왕은 젊은 시절 ‘서동(薯童)’이라 불렸으며, 그의 어머니가 수도의 남쪽(금마저)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다가 연못 속의 용과 교접하여 잉태했다고 전해진다. 물이 깊고 신비로운 연못에서 태어났다는 점은, 그가 용의 기운을 타고난 존재임을 암시한다.
이와 관련된 대표적인 지명이 바로 마룡지(馬龍池, 말룡지)다. 마룡지는 ‘말(馬)과 용(龍)의 연못’이라는 뜻으로, 무왕 탄생 설화와 연결된다. 백제 왕실에서 말은 신성한 동물로 여겨졌으며, 용은 하늘의 기운을 지닌 존재로 신격화되었다. 말과 용이 함께 등장하는 마룡지는 단순한 연못이 아니라, 왕권의 정당성을 상징하는 공간이었을 것이다.
무왕 탄생 설화에서 마룡지는 미륵 신앙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마룡지의 용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무왕의 탄생 설화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
용은 미륵 신앙의 수호자다. 미륵경전에서는 미륵이 하생하여 세 차례 설법으로 중생을 구제하는 미륵 정토, 시두말성(翅頭末城, Ketuma, 鷄頭城)을 설명하는데, 그곳을 지키는 존재가 바로 용이다. 증일아함경 제44권에서는 이를 ‘수광용왕(水光龍王)’이라고 이름까지 밝히고 있다.
미륵이 하생하는 땅을 수호하는 존재가 용이며, 이는 곧 용이 미륵신앙 자체의 수호신임을 의미한다. 또한, 무왕이 용의 아들이라고 밝힌 마룡지 설화를 통해 무왕 역시 미륵하생의 땅과 미륵신앙을 지켜주는 제사장적 군주임을 알 수 있다.
용이 지켜주는 땅, 익산이야말로 미륵이 내려와 세 차례의 설법으로 중생을 구제한다는 시두말성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무왕은 여기로 수도를 옮기고, 미륵사를 창건한 것이다. 시두말성 익산은 이제 정치의 중심에 그치지 않고 세계의 중생을 구제하는 미륵 정토가 된다. 이처럼 무왕의 탄생 설화는 불교의 미륵 신앙과 익산의 민간 신앙인 용 신앙이 문화적, 언어적, 과학적으로 습합(習合)되어 만들어진 이야기라 볼 수 있다.
더 흥미로운 점은 시두말성의 통치자인 전륜성왕(37종의 미륵경전 가운데 미륵육부경 안에 있는 미륵성불경에 등장)의 이름이 ‘용(龍)’이라는 사실이다. 이에 따라 전륜성왕이 곧 무왕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따라서 마룡지에서 태어났다는 탄생 설화는 우연이 아니라, 그가 용의 기운을 이어받아 전륜성왕이 될 운명을 타고났음을 강조하는 장치였다. 미륵사는 용이 깃든 익산에 세워졌으며, 이곳에서 용화삼회의 설법이 펼쳐진다.
용의 아들 무왕은 단순한 군주가 아니라, 자신을 하늘이 내린 용의 왕, 즉 전륜성왕이라 믿었다. 무왕의 익산 천도에 대해서는 시두말성이 수미산 남쪽 염부제의 수도라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미륵이 하생하여 용화삼회를 여는 곳이 익산이라면, 무왕은 바로 그 시대를 준비하는 존재였다.
오늘날 미륵사지와 왕궁리 유적은 백제 무왕의 비전과 신념이 깃든 공간이다. 마룡지의 전설, 그리고 하천과 저수지 주변에 남아 있는 ‘용’ 관련 지명들을 떠올려 보면, 익산은 단순한 도시가 아니라 백제 왕권과 불교 신앙이 맞물린 ‘용의 도시’였음을 실감하게 된다.
미륵사가 자리한 위치를 보면 그 상징성이 더욱 뚜렷해진다. 앞에는 옥룡천이 흐르고, 뒤에는 용화산이 자리한 이곳은 용이 미륵을 수호한다는 믿음이 서린 곳이다. 무왕이 익산을 교두보로 삼고 미륵사를 건립한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다. 용이 미륵을 지키는 신성한 공간에서, 그는 백제의 미래를 꿈꾸었다.
익산에 많이 분포하는 ‘용’이 들어간 지명이 언제부터 존재했는지는 사료가 남아 있지 않아 정확히 고증할 수 없다. 그러나 불교가 전래하기 전부터 존재했을 것이라는 추정은 매우 타당하다.
왜냐하면 미륵사가 익산에 건립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 지역에 용과 관련된 지명, 다시 말해 토착 용 신앙이 일찍부터 자리 잡고 있었음을 방증하기 때문이다. 이는 익산이 단순한 왕도의 후보지가 아니라, 종교적·신화적 의미까지 품은 장소였음을 보여준다.
익산의 용 관련 지명 정리
마룡지(馬龍池): 무왕이 태어난 신비로운 연못, 용과 말의 기운이 깃든 장소
미륵산(彌勒山): 미륵이 하생하여 법회를 여는 성스러운 산
용화산(龍華山): 미륵이 하생하여 법회를 여는 성지
옥룡천(玉龍川): 익산을 감싸는 물줄기, 용의 기운을 담은 하천
용안(龍安), 용머리(龍頭), 용셈(龍泉): 용의 기운이 머무르는 땅
오룡리(五龍里), 용제리(龍堤里), 용기리(龍起里), 용연리(龍淵里): 하천과 저수지 근처에 있는 용 관련 지명, 익산의 자연환경과 신앙적 요소를 반영
2025.3 소통신문 기고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