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편
교환 학생으로 어학 연수를 중국을 갔을 때 타이타닉 영화 주제곡 "My heart wll go on" 노래가 한국과 중국을 강타하고 있었다.
중국으로 갈 때 타이타닉호처럼 큰 배를 타고 부산에서 산둥 연태를 갔었는데 출발부터 이 노래가 마음을 몹시도 힘들게 했다.
가서도 한동안은 이 노래가 향수병에 걸리도록 만들었다.
향수병을 잊기 위해서 금요일 오후부터 주일까지 여행을 줄 곧 다니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야만 적응도 빨리 하고 중국의 문화와 역사를 몸으로 직접 체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금요일 오전 수업이 끝나면 인근 주변 "위해"로 시작해, 청도, 태산까지 버스를 타고 잘 통하지 않은 언어로 손, 발짓 다해가며 여행을 다니는 재미는 나름 좋었다.
한 번은 노동절 날 공자가 태어났다는 곡부를 해서 태산을 가기로 했었다. 우리를 지도한 교수는 외국인은 표를 예매 안 해도 역에 가면 바로 구입할 수 있다는 얘기를 해주었다.
같이 가기로 한 일행은 교수님의 말만 믿고 역으로 출발했다.
역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인산인해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우리 일행은 겨우 매표소에 들어가 표를 예매할 수 있는지 물었다. 매표소 직원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매이요, "라고 말했다(중국말로 없다.)는 말이다. 분명히 지도 교수는 된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중국은 인구가 많이 이동하는 시기가 있는데 노동절 날이 그중 하나였다.
그러니 표가 있을 리가 만무했다. 우리의 여행은 출발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참으로 난감했다.
바로 그때 어디선가 제남 가는 버스가 있다고 빨리 오라는 신호를 보냈다.(제남은 태산을 가는 관문 도시다.) 우리는 그 버스가 있는 쪽으로 향해 돌진했다. 왜냐면 이 버스도 사람이 많으며 숙소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일행 6명은 무사히 차를 탔는데 차는 만원이었다. 버스는 밤 9시쯤 출발했다. 내가 제일 연장자였기 때문에 같이 간 일행들에게는 좌석을 만들어 주고 난 기사 바로 뒤 엔진을 덮어 놓은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버스 종류는 우리나라 80년대 촌에 가면 볼 수 있는 빨간 버스를 생각하면 된다.
태어나 그렇게 난폭 운전을 하는 기사는 처음이었다. 뒤에서 혹시 사고가 날까 얼마나 불안했는지 좌불안석이었다. 도중에 길도 없는 곳을 가고 심지어 졸음운전까지 했다.
도저히 불안해 기사 보고 조금 쉬었다 가자고 건의를 했는데 다행히 기사는 내 말을 들었다. 30분 정도를 쉬고 버스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5월 초였지만 바깥 날씨는 추웠다. 문을 꼭꼭 닫은 버스 안에서 중국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고 시작했다.
기관지가 안 좋은 나로서는 보통 곤욕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한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광경들을 몸으로 감당해 내기는 무척이나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자리도 불편하고 왜 사서 고생하지, 생각들을 하니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렇게 12시간을 달려 아침 9시 넘어서야 제남이라는 곳에 도착했다.
우리는 제남에서 중국 교수님 한 분을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이 교수님은 한국에 교환 교수님으로 와 있다가 귀국해 제남에 살고 계신 분이셨다.
제남 산동대학교에서 한의학을 가르치시는 분이다. 전화를 하니 자기 집으로 오라고 했다.
다른 일행들은 앉아 갔기 때문에 잠을 좀 잤겠지만 자리가 불편해 한숨도 못 자고 뜬 눈으로 갔다.
그래서 교수님 집에 가서 눈이라도 좀 붙이야겠다는 생각했었다.
교수님 댁에 도착하니 사모님이 제자들이 왔다고 아침을 해 주셨다. 하지만 난 허리도 아프고 잠도 오고 양해를 구해 교수님 서재에서 자려고 누웠지만 잠이 들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일행들이 가자고 날 깨우려 왔는데 몸상태가 안 좋았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과 걱정이 되었다. 교수님이 곡부 숙소를 하나 가르쳐 주셨는데 그 숙소가 가격도 저렴하고 깨끗하다고 하셨다.
주소 하나만 받아 들고 다시 곡부를 향했다. 제남에서 곡부까지는 약 2간 정도 걸렸다. 다행히도 곡부 가는 버스는 그나마 괜찮아 잠깐만이라도 잠을 청할 수 있었다. 곡부에 도착했는데 교수님이 가르쳐 준 숙소를 찾아갔는데 대학교 안에 있는 외국인 숙소인 줄 알았다. 대학 이름은 생각이 안 난다. 어쨌거나 대학교에 들어가 물으니 아니라고 했다. 다시 나와 어떻게 찾지 고민하고 있는데 눈앞에 교수님이 가르쳐준 여관이 눈에 들어왔다. 알고 보니 그 대학 입구에 있는 거였다.
여관에 도착하니 카운터에 젊은 아가씨가 앉아 있었다. 우리는 한국에서 온 유학생이고 태산을 관광하려고 왔다고 했다. 샤오지애 (중국말로 아가씨)는 한국 사람을 처음 본다며 신기한 듯 싱글벙글 미소 띤 얼굴로 웃으며 얘기를 계속했다. 옛날 우리나라 7~80년 때 촌에 가면 순수성이 묻어나는 그런 아가씨였다. 옷소매는 때가 묻어 여관에서 일하는 아가씨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지저분했지만 상냥하게 웃는 모습만큼은 천진난만 그 자체였다.
그런데 문제는 방값이 중국 돈으로 20원이었는데 이 아가씨가 우리 보고 50원을 더 내라고 했다. 왜 그런지 설명을 하는데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얼굴은 수순 하게 생겨가지고 한국에서 왔다고 사기를 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자꾸만 갖게 만들었다. 우리는 계속해서 안된다,라고 말하고 아가씨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방을 줄 수가 없다고 우겼다.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건데 생각하면서 아가씨 하는 말을 유심히 귀담아 들었다. 그렇게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중에 내일 아침에 돌려준다는 말이 귀에 들어왔다. 아~ 그때야 이해가 됐다.
말은 잘 못 알아 들었지만 공탁금 개념이었다. 밤사이에 방안에 물건들이 없었지거나 파손이 되면 그 비용을 이 돈으로 계산하고 나머지만 되돌려준다는 뜻이었다. 밤사이 아무 이상이 없으면 낼 아침에 50원을 그대로 돌려준다는 의미. 우리는 그때야 이해를 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웃지 못할 해프닝이 일어난 거였다.
여관방에 들어가 짐을 두고
곡부 도시를 몇 군데 관광을 하고는 저녁을 먹기 위해서 식당에 갔다.
식당에서도 굉장히 당황스럽고 이해 못 할 일들이 눈앞에서 발생했다.
그 식당에 서비스하는 아가씨들이 한 10명 정도 있었는데 모두 다 오른쪽 다리를 저는 것이었다.
우리는 밥을 먹으면서도 이 식당의 이런 모습들이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지 몰라 다들 의아한 눈으로 식당을 살폈다.
한 명도 아니고 전부 다 다리를 저는 모습을 상상해 보시라.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도무지 신경이 쓰여 도중에 나가자고 해 얼른 값을 지불하고 도망치듯 나왔다.
중국 문화사 시간에 들은 얘기 중 하나가 고용주들이 일하는 아가씨들을 도망을 못 가게 아킬레스건을 끊어버린다는 교수의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우리는 이 광경은 분명히 그런 경우일 거라고 받아들였다.
다음날 태산을 가기 위해서 오후 2시부터 게이블카가 있는 곳에서 줄을 서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줄이 줄어들지가 않았다. 중간에 새치기하는 사람들 때문에 5시가 넘었는데도 참 난감했다. 자기들끼리 새치기한다고 싸우고 공안들이 오고 질서라고 없는 곳이었다. 겨우 케이블카를 타고 태산에 올랐는데 벌써 어둑어둑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한 시간 정도 가야 정상이 나오는데 그때 시간이 밤 9시가 넘었다. 정상에 썼는데 안개가 온 산을 덮어 한 치 앞을 볼 수가 없었다. 너무나 허무했다. ''공자가 태산은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한 말이 무색했다. 정상은 왔는데 ''진태양난''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이 없었다. 우리 일행은 여기서 잘 것인지 아님 내려갈 것이지 의논한 결과 내려가지로 결정을 했다.
불빛만 반짝이는 태산 야경은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 자체를 두고 내려가는 마음에 걸렸다.
일출을 보고 싶었는데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밤이고 언어는 서툴고 내려가는 일행 중에서 좀 괜찮은 중국분을 골라 같이 내려가자고 부탁을 했다. 그분이 친절하게 안내를 해줘 무사히 내려왔지만 숙소가 문제였다.
여섯 명이 탈 수 있는 택시를 타고 괜찮은 숙소를 데려다 달라고 부탁을 했다.
중국 여행 시 제일 중요한 게 물 하고 숙소다. 택시 기사만 믿고 있었는데 가는 곳마다 방이 없었다. 그때가 밤 1시가 넘었다. 아무래도 택시 기사만 믿고 있을 상황이 안 돼서 내려 우리가 찾기로 했는데 기사를 보내고 앞으로 보니 큰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피곤도 하고 지칠 때로 지쳐 아무리 비싼 비용을 달라고 해도 방만 있으면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건물 입구에서 우리는 한국에서 온 유학생들인데 방이 있느냐고 물었다. 근데 서있는 사람들이 웃었다. 영문도 모르고 있는데 우리를 데려다준 택시 기사분이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나 그 사람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는 택시에 다시 타라고 했다. 우리는 어리둥절, 어쩔 수 없이 다시 택시를 타 물었다. 아저씨!! 무슨 일이냐고? 아저씨가 말하기를 거기가 ''깡패우범지역''이라고 절대로 가면 안 되는 곳이라고 말했다. 우리를 내려주고 혹시나 싶어 보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깡패소굴에 가서 방을 구했으니 아저씨가 놀라 달려왔다고 말씀해 주셨다. 내용은 다 못 알아 들었지만 그날 저녁 그 기사분 아니었으면 진짜로 큰일 날 뻔했다.
새벽 2시가 넘어서야 겨우 숙소를 구했다.
다음날 제남에서 연태로 돌아오는 이층 버스를 탔다. 처음으로 티브이에서 본 이층 버스를 타고 연태 학교 숙소에 도착해 ko가 됐다. 2박 3일 동안 못 먹고 못 자고 고생을 얼마나 했던지 살이 3kg가 빠졌다. 25년도 지난 얘기가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나는 건 고생을 엄청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근데 다시 한번 가 보고 싶다.
중국 하면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곳이다.
사실 학교 교실에서 배운 언어보다 여행 다니면서 배운 언어가 지금까지도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
가끔 길에서 중국인들을 만나면 중국말로 얘기를 하면 당신 중국 사람이냐고 묻는다.
아직까지 발음이 괜찮다는 뜻일 것이다.
도전은 늘 흥미롭다. 지금도 어디론가 떠나는 것이 두렵지 않은 이유는 이런 경험들 때문일 거다.
다음은 북경, 그다음은 하얼빈 글이 준비하고 있다. 기대해 주시면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