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집착

운명 같은 사랑 따위 개나 줘버려?

by 박철

20대 젊은 날,

결혼이라는 것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굳이 서두르고 싶지도 않았다.

더욱이 두어 번의 아픈 이별을 경험한 뒤로는 더더욱 그랬다.

가끔은 혼자도 너무 편하고 좋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첫 번째, 두 번째에 비해 가장 별로였던 세 번째 여자를 만나 사귀던 어느 날 겨울밤.


창밖에는 눈이 내리고 밤 12시가 다 되어가는 데도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애써 잠을 청하려 이불을 감싸고 침대에 돌아누웠건만 오른쪽 옆구리가 이상하리 만치 시렸다.


이상했다.

아무리 이불을 감싸 안아도 너무 추웠다.


갑자기 벌떡 일어나 잠옷에 긴 야상 점퍼를 대충 걸치고 늦은 심야 좌석버스에 올랐다.

집에서 신촌까지 한 시간,

다시 시외버스를 갈아타고 30분.

그녀가 사는 경기도 변두리 마을 어귀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는 데 발이 아팠다.

내려다보니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꽁꽁 언 발가락 위로 눈이 덮여 있었다.

무슨 정신인지...


신촌 길가 리어카에서 산 싸구려 손 인형을 손에 끼고 창문을 두르렸다.

추운 겨울밤 동네 개들이 컹컹 짖었다.

조심스레 창문이 열리고 놀란 그녀가 대문 밖으로 나왔다.

별 말없이 인형을 건네고 서둘러 돌아왔다.

심야버스조차 끊어질까 두려워.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나는 결심했다.

"그래, 이 사람이구나."


그 겨울밤 싸구려 손인형이 나의 프러포즈 반지를 대신할 줄이야.

집도, 돈도, 아무런 준비도 없었지만 결혼을 했다.

부모님도 친구들도 다들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미쳤구나..."


준비 없는 결혼은 오래도록 지하 단칸방을 전전하게 했고 고단했지만 한 번도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무슨 하늘이 내려준 운명 같은 사랑 따위 나는 믿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믿는다.

그리고 지난 두 번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시간이 지나고서야 알았다.




사랑은 믿음 위에 서고 집착은 의심 위에 선다.

사랑은 자유를 주지만 집착은 통제하려 한다.

사랑은 기다릴 줄 알지만 집착은 오늘이 아니면 견디지 못한다.

사랑은 상대의 행복을 바라고 집착은 나의 행복을 기대한다.

사랑은 들으려 하고 집착은 말하려 한다.

사랑은 주는 것에 만족하고 집착은 받는 것에 만족한다.


결국, 사랑은 상대를 위한 감정이고, 집착은 나를 위한 감정이다.



사랑은 칼과 같아서 맛있는 요리를 만들기도 하고 상대방과 자신을 베기도 한다.

사랑은 사과를 따먹는 것이 아니라 사과나무를 심는 것이다.


참된 사랑을 하려거든 자주 만나려 애쓰지 말고 떨어져 있는 훈련이 필요하다.

멀리 있을 때 비로소 그 사람 전체를 볼 수 있다.

몸이 멀리 있는데 늘 그리운 사람이라면 그와 결혼해라.


조건을 따진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다.

사람보다 조건이 보이면 헤어져라.

사랑이라는 정원에는 늘 집착이라는 잡초가 올라오게 마련이다.

정원으로 시작해서 잡초 밭이 되기도 하고 잡초 밭으로 시작해서 정원이 되기도 한다.

사랑은 명품과 같아서 오래되어도 변형이 없고 길이 들지만 집착은 짝퉁 같아서 처음 보기에는 그럴듯해도 금방 낡고 티가나게 마련이다.


"하늘이 내려준 운명 같은 사랑 따위 개나 줘버려?"

아니, 조건을 따지는 사랑 따위 개나 줘버려.

작가의 이전글눌려있는 사람은 말이 거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