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하늘에 하얀 크레파스를 뿌려놓은 오후 다섯 시의 초가을 하늘을 나는 좋아한다.
거리는 파스텔처럼 서늘하고 바람은 상쾌하여.
어릴 적 이런 날이면 동네 어귀 낮은 언덕에 누워 일렁이는 강아지풀 사이로 흘러가는 하늘과 계절을 보며 까무룩 잠이 왔다.
낡은 구멍가게에 이른 네온사인이 하나둘 켜지면 서늘한 저녁 바람이 미루나무 가지 끝에 까치집을 흔들었다.
밥 짓는 굴뚝에 하얀 연기가 오르고 철수네 엄마가 제일 먼저 대문을 열고
철수를 불렀다.
우리 엄마가 대문밖에 나오면 내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날아가 안겼다.
밤은 길었고 잉잉대는 라디오 소리가 백열등 아래로 흔들리면 엄마 다리를 베고 누웠다.
가을은 그렇게 어린 내게도 슬며시 어깨를 밀치고 지나갔다.
20대에는 가을이 아팠다.
하필 가슴 시린 유치한 사랑은 무심코 왔다가 그때쯤 끝이 났으니.
그게 사랑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만남은 짧았고 이별은 길었다.
남들은 몰랐지만 난 정말 죽을 만큼 아팠다.
나는 생각한다.
가을에는 가급적 이별하지 않기를.
쓸데없이 상처가 생각보다 클 수 있으니.
헤어짐은 여름이나 봄이면 차라리 빨리 잊지 않겠나.
또 나는 생각하거니와,
가을에 그 흔한 이별 한번 해보지 않은 사람과는 인생이나 사랑 따위를 논할 가치가 있겠느냐고.
더 나이를 먹고 보니 슬쩍 약간 단풍이 들어가는 잎새 하나라도 한참을 보게 된다.
당연하게 느껴지던 것이 이제는 귀하고 신기하기까지 하니.
길을 가다 문득 보니 내가 서있다.
무엇을 입어도 화려하지 않고 화장을 해도 추레해 보이는.
고집스러운 주름에 지나는 사람을 무심한 척 힐끔거리는 누런 눈동자.
별로 상종하고 싶지 않다.
오래 산들 더는 세상에 줄 것이 없는.
언제까지 살아야 하나.
밥만 축내는 잉여인간 아닌지.
가급적 빨리 죽으리라.
계절도 젊은 청춘도 나를 지나쳐 거침없이 가시도록.
가을에 났으니 가을에 가고 싶다.
눈 덮인 차가운 들판보다 코스모스가 만발한 언덕에 뿌려진다면 그 또한 감격스러운 결말 아닌가.
가을,
쓸데없는 생각들에 밤은 깊어가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