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시간을 내어 아내와 함께 단 둘이 처가댁으로 간다.
장인어른이 건강이 많이 좋지 않아 지셔서 바람도 쐴 겸.
운전을 하고 가는 자동차 창밖으로 강원도의 높은 산 능선들이 스치듯 지나간다.
30여 년 전,
20대 중반의 어린 나이에 나는 결혼을 약속한 여인의 손을 잡고 그녀의 집으로 갔다.
덜컹거리는 기차를 타고 청량리 역에서 긴 시간을 달려 태백 역에 도착했다.
기차를 타고 가는 동안 오늘처럼 차창 밖으로 스치듯 지나가는 산들을 바라보며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볼품없는 외모, 부모가 이혼한 결손가정, 사춘기 시절 많은 방황으로 좋지 않은 과거를 가졌고 직장도 변변치 않았으며 단돈 10원도 가진 것이 없던 내게 과연 귀하게 키우신 딸을 허락하실까?
주위의 친한 사람들마저도 아내에게 나와의 교제를 말렸다.
결혼은 현실이니 장래를 생각하라고.
“뭐라고 말씀을 드리나? 만약 거절하시면?”
기차에 앉아서도 마음은 분주히 뛰고 있었다.
태백 역에 내려 다시 버스를 타고 마을 어귀에 도착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방에 들어섰다.
머릿속이 빙빙 돌고 가슴이 콩닥거리며 정신이 아찔했다.
그녀의 부모님이 어색한 표정으로 나를 맞아주셨다.
나는 대뜸 큰절부터 올렸다.
무릎을 꿇고 앉은 내게 그녀의 부모님은 말씀하셨다.
“편히 앉게.”
하지만 무릎을 꿇은 나는 자세를 고쳐 앉는 대신 누가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저는 가진 것도 좋은 배경도 없지만 결혼을 허락해 주시면 호강은 못 시켜도 평생 마음고생은 시키지 않겠습니다.”
자랑할 만한 배경도 가진 것도 없는 내가 더 무슨 말을 할 게 있었겠나.
머뭇거리던 장인어른이 뒤에 앉아계신 장모님을 바라보았다.
“여기 술상 좀...”
아무런 말씀도 없이 장인어른은 내게 소주잔을 권하셨다.
체질상 평소 술을 그렇게 잘 마시지 못하는 나였지만 마다하지 못했다.
매일 소주 서너 병을 입가심으로 드실 정도의 주당이셨던 장인어른의 주량에 나는 금방 취기를 느꼈다.
“만약 이 술을 못 견디면 나는 끝이다.”
죽을 각오로 주시는 대로 한숨에 다 들이켰다.
몇 시간의 긴 술자리가 지나도록 그녀의 부모님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집안은 어떤지, 대학은 어디를 나왔는지, 직장은 어디인지, 돈은 좀 모아 놓았는지...
하룻밤 사랑방에서 기절하듯 잠을 얻어 자고 다음날 서울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2년이 채 못 되어 우리는 결혼을 했다.
결혼은 상상보다도 더욱 힘겨웠다.
열 여덜평 비좁은 아파트에서 시작된 아내의 가난한 시집살이.
결혼하고 임신을 한 아내는 얼마 후 잘 다니던 회사도 그만둬야 했다.
가로 2m, 세로 3m가 체 안 되는 작은 방이 우리의 유일한 보금자리였다.
어린 딸을 등에 업고 마을 어귀까지 나와 퇴근하는 남편을 마중 나왔다.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고 했을 때 당장 그만두라고 지지해 주던 아내.
내가 회사를 실직하고 몇 달을 놀자 쌀이 떨어졌다.
빚을 내어 살림을 해야 했던 아내였지만 단 한 번도 내게 돈을 달라고 조르지 않았다.
일이 잘 되지 않아 늦은 밤 내가 혼자 깨어 술잔을 비우면 자다 말고 일어나 빈속에 술 먹지 말라며 김치찌개를 끓여주고는 졸린 눈으로 내 등을 토닥여 주었다.
부모보다도 자식보다도 늘 남편이 첫 번째였던 아내.
나는 아내와 결혼했지만 사실은 장인, 장모님과도 결혼했다.
돌아보니 지난 30여 년은 내가 했던 [약속] “마음고생은 시키지 않겠다던”을 지키려고 노력한 시간이었다.
순결한 남편으로 정직한 아버지로 효도하는 사위로...
아내에게 했던 [약속], 장인, 장모님께 했던 그 [약속]이 오늘의 나를 만들고 오늘의 우리 집을 만들었다.
[약속], 작지만 소중하고 고귀한 이름.
누구나 살아가면서 남과 혹은 자기 자신과 수많은 약속을 한다.
마음이 흔들리고 길이 어지러울 때 약속은 등대가 된다.
지나온 30년,
“내가 약속을 지킨 것이 아니라 약속이 나를 지켰나 보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어도,
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어도,
사랑받을 아무런 조건이 없어도,
그저 바라만 보아도 좋은 사람.
그대가 오기를 기다리며 식어버린 김칫국을 몇 번이나 다시 데우고
가로등 등불아래 그림자가 한없이 길어지고
손발이 시리도록 대문 앞을 서성거려도
그대를 생각하면 미소가 번지는 그런 사랑.
동화 속 아름다운 궁전이 아닌
비가 새는 천정과
검푸른 곰팡내 얼룩이 번진 벽지의
지하 단칸방이래도
그대와 함께 밥을 먹고
그대와 함께 앉으며
그대와 함께 눕고
그대와 함께 아침을 깰 수 있다면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런 영화도 필요치 않은.
진정한 사랑, 진정한 행복이란 바로 그런 것.
이 밤,
영하의 차갑고도 칠흑 같은 겨울 밤하늘에서
꺼질 듯 꺼질 듯 꺼지지 않고
흔들리며 빛나는 시리우스처럼
나는 영원히 꺼지지 않고
당신을 향하여 빛나며
당신의 밤길을 비추는 별이 되기를.
늘 함께 있어도 늘 보고 싶은
사랑하는 아내여,
이제는 내가 당신을 향하여 빛나는 별이 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