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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의 서울은 아직 여름의 기운이 남아 있어 습하고 더웠다. 종로의 변두리 상권은 오래된 건물과 새로 신축한 건물들이 경쟁하듯 서 있었다. 김 원장의 은도 정신건강의학과는 오래된 상가 건물의 2층, 삐걱이는 나무 계단을 올라야만 만날 수 있는 곳이었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자, 은은한 향과 공기청정기의 나직한 소리가 먼저 방문객을 맞았다. 전체적으로 따뜻한 아이보리 톤의 벽지와 원목 가구가 안정감을 주었다. 원장은 올해 쉰둘. 반백이 된 머리카락은 세월의 연륜을 더했지만, 선한 인상과 맑은 눈빛은 환자들에게 안정감과 믿음을 주었다. 그는 창밖의 분주한 도시 풍경을 바라보며, 복잡한 이론 대신 환자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단순하고 명쾌한 조언으로 위안을 주고자 했다.
이윽고 예약된 시간에 맞춰 은채가 진료실로 들어섰다. 그녀는 누가 보아도 ‘모범생’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인상이었다. 단정하게 다림질된 하늘색 셔츠에 발목이 살짝 보이는 슬랙스, 그리고 하얀 스니커즈까지 흠잡을 데 없이 깔끔한 옷차림이었다. 부드럽게 미소 짓는 얼굴은 선한 인상을 주었고, 또렷한 눈매는 지적으로 보였다. 그녀는 김 원장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나직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겉보기에는 아무런 그늘도, 문제도 없어 보이는, 오히려 밝은 스무 살 대학생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녀의 완벽해 보이는 모습 뒤에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이 있었다. 화목한 집안, 언제나 딸의 성공을 위해 아낌없이 지원해 주시는 부모님, 착하고 공부는 물론 대인관계까지 완벽한 언니. 그 속에서 은채는 늘 불안했다. 중고등 때는 학원과 부모의 도움으로 학교 성적을 상위권으로 유지하였으나 자신을 지탱해 주는 이런 외부의 도움들이 사라졌을 때 드러날 ‘진짜 나’의 모습이 들통날까 봐 두려웠다. 그 불안은 중학교 시절, 처음으로 허벅지 안쪽에 상처를 내는 것으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수시로 대학에 들어온 뒤에도 정시로 들어온 애들에 비해 뭔가 뒤떨어지는 느낌이 들어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옷차림이나 외모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어서 오세요, 은채님." 김 원장은 평소처럼 부드러운 미소로 그녀를 맞았다.
"네, 원장님. 안녕하세요." 은채는 맞은편 소파에 익숙하게 앉으며 무릎 위에 가방을 단정히 올려놓았다.
"지난 한 주는 어떠셨어요?" 김 원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은채는 잠시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가, 이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지만, 단어 하나하나에 힘겹게 눌러온 무게가 실려 있었다.
"그냥… 모든 게 버거웠어요. 부모님도, 언니도 다 좋은 사람들이고 저를 정말 사랑해 주시는데… 저는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인 것 같아요. 제가 무너지면 다들 실망하실까 봐, 그게 너무 무서워요. 그래서 또… 제 몸에 상처를 냈어요."
김 원장은 은채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었다. 그녀의 완벽한 겉모습과 내면의 깊은 균열 사이에서 얼마나 홀로 고통스러웠을지 가늠하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요. 또다시 힘든 순간이 찾아왔었네요.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까요? 어떤 이야기든 괜찮아요."
김 원장의 말에 은채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이런 제가 너무 싫어요. 왜 저는 이렇게 나약할까요."
"은채 님, " 김 원장은 나지막이 말했다. "스스로에게 상처를 내는 행동은 결코 은채 님이 나약해서가 아니에요. 거기에는 아주 복합적인 심리적 이유가 있어요. 때로는 자해가 스스로를 향한 처벌의 의미를 갖기도 해요. 부모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나, 완벽하지 않은 나에게 벌을 줌으로써 역설적으로 죄책감을 더는 거죠."
그는 말을 이었다. "또 다른 이유는 통제감 때문일 수 있어요. 학업 성적, 미래, 인간관계처럼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들 투성이인 세상에서, 내 몸에 상처를 내는 행위만큼은 온전히 나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처럼 느껴지거든요. 그 순간만큼은 무력하지 않다고 느끼게 해주는 거죠. 그리고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스트레스 해소의 목적이에요. 감당하기 힘든 불안이나 슬픔 같은 마음의 고통을, 더 즉각적이고 강렬한 신체의 고통으로 덮어버리는 거예요."
은채는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게 있어요." 김 원장은 은채의 눈을 부드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자해는 마약처럼 중독될 수 있다는 거예요. ‘스트레스 → 자해 → 일시적 해소’ 이 과정이 반복되면, 우리 뇌는 힘든 감정이 들 때마다 자해를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해결책으로 인식하게 돼요. 그래서 단순히 ‘자해하지 말아야지’ 하고 의지만으로 참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에요. 마치 마약 중독자에게 의지만으로 끊으라고 하는 것과 같죠."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하죠?" 은채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렸다.
"그래서 우리는 ‘하지 말자’는 다짐 대신, 그 에너지를 다른 곳으로 흘려보낼 건강한 방법들을 찾아야 해요.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운동이나 취미 활동을 꾸준히 하는 게 장기적으로 도움이 될 거예요. 그리고 자해 충동이 도저히 견딜 수 없이 강하게 밀려올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땐 그 순간을 넘길 응급 처치 방법들이 있어요. 찬물로 샤워를 하거나, 얼음을 양손에 꽉 쥐고 녹을 때까지 버티는 것처럼요. 강렬한 다른 감각이 자해 충동을 분산시켜 줄 수 있거든요."
김 원장은 잠시 말을 멈추고,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은채 님, 절대로 왜 내가 이런 행동에 빠지게 됐을까 하고 자책하지 마세요. 사람마다 타고난 기질이 다 달라요. 어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위가 약해서 소화가 잘 안 되고 위장병에 쉽게 걸리죠? 그것처럼, 어떤 사람들은 신경계가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예민하게 타고나요. 외부의 자극이나 스트레스에 더 크게 반응하는 거예요. 이건 약하거나 잘못된 게 아니라, 그냥 타고난 특성이에요. 이런 사람들이 우울이나 불안 같은 감정을 더 쉽게 느끼곤 해요."
그는 따뜻한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언제나 모든 걸 잘 해내는 언니처럼 되어야 하고, 완벽한 딸이 되어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 그건 정말 누구에게나 버겁고 힘든 짐이었을 거예요. 은채 님은 그 힘든 짐을 오랫동안 혼자 짊어지고 있었던 거고요. 이제 그 짐을 조금씩 내려놓는 연습을 저와 함께 시작해 봐요."
김 원장의 마지막 말에, 은채는 처음으로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그것은 자책이나 절망의 눈물이 아니었다. 자신의 고통이 처음으로 온전히 이해받고, 비난이 아닌 위로를 받은 데서 오는 안도의 눈물이었다. 고요한 진료실 안에서, 그녀의 완벽했던 가면 위로 비로소 따뜻한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 질병관리청 ‘응급실 손상환자심층조사’ 결과를 보면, 2014년부터 2024년까지 10년 동안 응급실에 온 전체 손상 환자 중 자해·자살 환자의 비율이 약 3.6배나 늘었다고 합니다. 특히 10~20대 자해·자살 시도자의 비율은 2012년 30.8%에서 2022년 46.2%로 15.4% 포인트나 뛰어올라, 다른 연령대와 비교해도 증가 폭이 훨씬 두드러집니다. ‘불안 세대’의 저자 조너선 하이트 역시 미국에서도 자해와 자살 시도가 크게 늘고 있다며, 그 원인으로 SNS를 지목했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개업한 지 얼마 안 되었던 20년 전만 해도 자해로 진료실을 찾는 청소년은 정말 드물었는데, 요즘은 너무 흔해졌다는 게 체감됩니다. 청소년과 청년 세대가 비교지옥인 이 세상에서 큰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얘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세상이 발전할수록 오히려 정신건강은 더 나빠지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워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