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외심 나의 고통을 희극으로 바꾸는 렌즈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by 은도정신과

대커 켈트너의 저서 『경외심』을 읽으며 나는 문득 찰리 채플린의 명언을 떠올렸습니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이 말은 오랫동안 나에게 삶의 아이러니를 알려주는 경구였지만, 경외심이라는 개념을 통해 비로소 그 작동 원리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켈트너가 말하는 경외심이란, 광활한 자연이나 위대한 예술, 혹은 숭고한 정신 앞에서 ‘나’라는 존재가 작아지는 감각을 의미합니다. 바로 이 ‘자아의 축소’ 경험이 우리를 고통스러운 비극의 무대 한복판에서 잠시 빠져나와, 삶 전체를 조망하는 희극의 관객석으로 옮겨 앉게 하는 심리적 장치인 것입니다. 경외심은 우리에게 채플린이 말한 ‘멀리서 보는 시점’을 선물합니다.


현대 사회는 자존감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강조합니다. ‘너 자신을 사랑하라’, ‘네 안의 무한한 가능성을 믿어라’는 메시지가 넘쳐납니다. 물론 건강한 자존감은 삶의 중요한 동력이지만, 이 ‘자존감 지상주의’는 예기치 않은 함정을 파놓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존감을 키우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하고 타인과 비교하며, 스스로를 ‘크고 대단한 존재’로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립니다. 이러한 ‘자아 팽창’의 부작용은 치명적입니다. 나의 존재가 비대해질수록, 그에 생기는 작은 흠집이나 실패조차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다가옵니다. ‘대단한 나’에게 닥친 시련은 거대한 비극처럼 느껴지며, 우리는 그 문제의 클로즈업에 갇혀 허우적댑니다. 이는 마치 자신의 그림자가 너무 커져 버려 그 어둠에 스스로 짓눌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때 경외심은 가장 효과적인 해독제가 되어줍니다. 밤하늘의 은하수를 마주하는 순간, 거대한 파도가 부서지는 해변에 서 있는 순간, 우리는 필연적으로 겸손해집니다. 나의 성공과 실패, 그리고 나를 괴롭히던 문제들이 광대한 우주 속 먼지처럼 작게 느껴집니다. 이것은 결코 나를 비하하는 패배적인 감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를 짓누르던 자아의 무게에서 벗어나, 더 큰 세상의 일부로서 나를 재발견하는 해방의 경험입니다. 경외심은 ‘나는 얼마나 대단한가’라는 강박적 질문을 ‘이 얼마나 거대한 세상의 일부인가’라는 평온한 깨달음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문제와 나 자신 사이에 건강한 거리를 확보하고, 비극의 주인공에서 벗어날 힘을 얻습니다.


오늘날 세계는 ‘나’와 ‘우리’만을 중요시하는 흐름이 거세지고 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의 자국 우선주의는 비단 한 나라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국가 간의 장벽은 높아지고, 공동체 안에서는 서로를 향한 불신과 혐오가 팽배합니다. 거대해진 개인의 자아가 국가 단위로 확장되어, ‘우리나라가 최고여야 한다’는 집단적 자존감의 함정에 빠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경외심이라는 감정 하나가 이 복잡한 정치적, 사회적 문제들을 단번에 해결해 줄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경외심이 제공하는 시각의 전환은 문제 해결의 중요한 실마리가 될 수 있습니다. 경외심은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치고, 나와 내 집단의 경계를 넘어 우리가 모두 이 거대한 세상의 일부라는 ‘연결의 감각’을 일깨웁니다. 나의 고통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듯, 우리나라의 이익이 인류의 모든 가치에 우선할 수는 없습니다. 경외심은 이러한 아집과 편협함에서 벗어나, 문제에 압도당하지 않고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줍니다. 그리고 그 여유로운 시선 속에서 비로소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더 나은 해결책을 함께 모색할 수 있지 않을까요? 결국 세상을 바꾸는 것은 위대한 사상이나 뛰어난 지도자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시점이 바뀌는 작은 순간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경외심은 바로 그 첫걸음을 떼게 할 가장 조용하고도 위대한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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