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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년만에 다시 찍은 가족사진

국가무형유산 각자장 (전통판화가) 정찬민 작가님이 다시 찍어주신 가족사진

by 무무

2024년 11월 11일 오후 8시 59분 페이스북 메시지가 도착했다.


보통 교류가 있는 사람들과는 카톡으로 연락을 하는데 페이스북 메시지는 교류가 없는 사람이거나 서로 연락처를 모를 때 연락하는 수단으로 사용한다. "누굴까?"하고 메시지를 확인했더니 국가무형유산 각자장 전통판화가이신 정찬민 작가님이셨다. 메시지를 본 내 첫마디는 "헐~"이었다. 내가 페이스북 커버 사진으로 올린 걸 보시고 판화로 제작했는데 선물로 보내주시겠다고 하시는 게 아닌가?


< 뽀샵을 상당히 거친 사진입니다. 거의 사기 수준. 그러나 접니다. 실물이라면 좋겠네요~ >

< 판화로 제작된 작품. 사진이랑 똑같죠? >


"아~이래서 이분이 국가무형유산 각자장 이수자, 전통판화가, 한국전통판화 인출장이시구나!"


원래는 작가님 작업실에 직접 가지러 가려고 했는데 일이 생겨서 가지 못했다. 바쁘신 분께 "죄송하지만 택배로 보내주실 수 있으세요?"라고 했더니 기꺼이 그렇게 해주시겠다고... 감사하고 참으로 송구한 순간이었다. 선물 받는 사람이 주는 사람에게 택배로 보내달라니... 지금 생각하니 더 죄송하다. 3일 후 택배가 도착했다. 가슴이 쿵쾅쿵쾅 심장이 벌렁벌렁... 택배를 뜯었더니 어머나 정말 실물 작품이 더 훌륭한 것이 아닌가? 붓이 아닌 조각칼로 그림보다 더 세심하게 표현한 것을 보니 너무나 신기했다. "아~이래서 이분이 국가무형유산 각자장 이수자, 전통판화가, 한국전통판화 인출장이 시구나!"하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런데 내 것보다 조금 더 작은 판화 하나가 더 있는 것이 아닌가? "이건 뭐지?"하고 뜯어보고 나는 "어머! 어머!" 소리를 지르며 박수를 쳤다. 내가 좋아하는 정치인 지금은 대통령이 되신 당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님 얼굴 판화를 하나 더 보내 주신 거다. 작가님과는 페이스북 친구로 교류했고 인사조차 나눈 적이 없었는데 나한테 이런 귀한 작품을 선물해 주시다니 의아하면서도 정말 감사했다. 사실 나는 내 얼굴 판화보다 이재명 대통령 얼굴 판화가 더 좋았다.


< 정찬민 작가님이 보내주신 이재명 대통령 얼굴 판화 >


시민언론 민들레 시민기자로 일하기 전에 리포액트에서 먼저 시민기자를 할 때 시민언론 민들레가 시청 집회에 부스를 만드는 매월 셋째 주에 항상 민들레 부스에 가서 자원봉사를 했다. 민들레를 알리는 전단지와 소식지도 시민들께 나눠드리고 민들레 부스에서 후원회원 홍보와 가입 절차를 알려 주는 일도 했다. 거의 1년을 자원봉사를 하고 거의 매주 토요일 집회에 개인적으로 참석을 하면서 정찬민 작가님을 자주 뵀지만 인사할 기회도 없었고 무슨 일을 하시는 분인지도 몰랐다. 그저 늘 토요일 집회에 열심히 참여하시는 언론인이신가 정도로 추측할 뿐. 이렇게 아무런 인연도 없는 내게 선뜻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들인 작품을 그냥 내어 주신 거다.


< 택배를 받자마자 뜯어서 소파 위에 올려놓고 사진을 찍었다. 감동감동 >


" 휘윤이가 교통사고로 죽었다..."


나에겐 아픈 가족사가 있다. 나는 남동생과 함께 자랐다. 남동생은 나보다 두 살이 어렸다. 부모님 두 분 다 어릴 적 배를 곯으며 고생을 하셨기 때문에 자식은 둘만 낳아서 잘 먹이고 잘 입히고 대학까지 보내고 싶었다고 하셨다. 내가 대학 3학년 겨울방학 남동생이 대학 1학년 겨울방학을 앞둔 1997년 12월 12일이었다. 자취방에서 룸메이트와 대화를 하고 있는데 작은 아버지께서 전화를 하셨다. 평소에 전화 연락을 거의 안 하는데 이상하다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 휘윤이가 교통사고로 죽었다..." 흐느끼는 작은 아버지의 울음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렸다. 나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서 작은아버지께 재차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휘윤이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라는 말뿐이었다. 당시 나는 룸메이트가 소개해 준 룸메이트 같은 과선배와 사귀고 있었는데 룸메이트가 남자친구집에 전화를 걸어 이 소식을 알렸고 평소에 남자친구 집에도 왕래를 했었기 때문에 남자친구와 남자친구 부모님께서 한걸음에 자취방으로 달려와 나를 안아주며 같이 우셨다. 남자친구는 내 손을 꼭 잡으며 "어떡해"만 되뇔 뿐 모두 할 말을 잃은 채 울고 있는 나를 바라보며 함께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가 정말 행복하길 바란다.


남자친구 부모님은 나를 진정시키시고 버스터미널까지 데려다주시고 강릉 가는 고속버스표를 손에 쥐어 주시며 같이 못 가서 미안하다며 버스에 태워 보내 주셨다. 남동생의 죽음으로 죽을 만큼 힘들 때 남자친구는 중국 기업에 취업을 했고 나는 중국에 가면 헤어지겠다고 가지 말라고 했지만 남자친구는 결국 중국으로 떠났다. 중국에 가서도 매일 전화를 했지만 나는 받지 않았다. 나를 버리고 떠난 남자친구가 너무 미웠고 그리웠기 때문이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저절로 눈물이 난다. 전화를 받지 않는 나 대신 우리 부모님께 매일 안부 전화를 했고 부모님은 전화를 받으라며 설득했지만 나는 한 번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가 나를 버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남자친구는 연상의 중국 유학생과 결혼을 했고 지금도 중국에 살고 있다.


그런데 7년 전 초등학교 동창회 모임을 하고 있는데 낯선 번호로 전화가 왔다. 낯선 번호는 원래 잘 안 받는데 그날은 이상하게 받고 싶은 생각이 들어 술을 마시다가 밖에 나와서 전화를 받았다. "나 상엽이야...". 중국에 있는 남자친구였다. 나는 너무 놀랬다.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라고 물었더니 룸메이트와 계속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고 룸에이트를 통해 내 소식을 늘 듣고 있다고 했다. 참 이상했다. 나를 버린 사람이라고 원망하며 헤어진 사람인데 너무 반가웠다. 그 뒤로 종종 남자친구는 전화를 했고 어떤 날은 만취 상태로 전화를 해서 우리가 사귀던 때가 그립다며 보고 싶다고 했다. 종교에 미쳐 교회에 돈을 다 갖다 바치는 와이프와 사이가 좋지 않다고도 했고 와이프가 자신의 부모님과 쌍욕을 하며 싸워서 자신도 부모님을 못 뵌 지 오래됐다며 한숨을 쉬기도 했고 큰 아들이 엇나가 속상하다며 한국에 가고 싶다고 했다. 잘 살기를 바랐는데 착한 사람인데 불행한 그가 안쓰럽고 가슴이 아팠다. 자주 하던 연락이 뜸해지더니 어느 순간 그의 전화는 오지 않았다. 나는 룸메이트에게 그의 소식을 묻지 않았다. 이젠 안 좋은 일들이 해결됐으니 연락이 없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그가 정말 행복하길 바란다. 그는 정말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다. 그의 가족들도 객지에서 고생한다며 늘 나를 집으로 불러서 맛있는 음식도 먹여주시고 용돈도 주시고 챙겨 준 사람들이다. 그와 그의 가족들이 행복하길 기도한다.


남동생이 죽은 후 아빠, 엄마 그리고 나는 정말 지옥 속에 살았다. 엄마는 매일 울며 식음을 전폐했고 아빠는 엄마를 달래느라 줄담배만 피우셨다. 가족을 잃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다. 그렇게 우리 셋은 힘든 시간을 버티며 살고 있었다. 부모님은 그 허전함을 채웠으면 좋겠다며 결혼을 하라고 재촉하셨다. 선도 10번은 본 것 같다. 하지만 그들과는 인연이 닿지 않았고 지금의 남편과 우연히 만나 결혼을 하게 됐다. (남편과의 러브스토리는 브런치스토리에 있습니다.) 남동생의 자리를 사위와 손자가 채우니 부모님은 정말 좋아하셨다. 손자 보는 재미에 남동생을 잃은 고통을 잠시 잊고 즐겁게 살고 있었다.


"아버님이 심장마비로 사망하셨습니다. 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어머님께서 너무 놀래셔서 대신 전해드립니다."


아빠 생일이 평일이라 주말에 친정에 다녀왔다. 엄마가 챙겨준 마늘을 까고 있는데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숙아, 아빠가 죽었다. 아빠가 죽었어." 통곡하는 엄마의 울음소리. 이게 무슨 일인가?" 아빠가 왜? 지난주에 봤는데 무슨 말이야." 병원 관계자가 전화를 넘겨받아 "아버님이 심장마비로 사망하셨습니다. 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어머님께서 너무 놀래셔서 대신 전해드립니다." 아빠는 어릴 때 결핵을 앓았는데 너무 가난해서 치료를 받지 못해 평소에 기침을 많이 했다. 그런데다가 담배를 많이 피웠는데 남동생 죽음 이후 더 많이 담배를 피워서 기침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잘 정도였다. 엄마도 나도 담배 좀 끊고 병원에 가보자고 잔소리를 계속했지만 소용없었다. 술도 안 마시고 평소 근검 절약하는 분이라 담배가 아빠에겐 유일한 낙이자 위로였기 때문이다. 병원에서는 사인이 심장마비라고 했지만 아마도 담배가 원인이 됐을 거라 추측한다. 장례를 치르고 집안을 정리하다가 쓰레기통을 봤는데 피 묻은 휴지가 발견됐다. 아빠는 아마도 자신의 병을 알고 있지 않았을까? 자신의 병 치료를 하려면 많은 돈을 써야 하고 딱히 오래 살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다. 평소에 남동생을 많이 아꼈는데 그런 아들을 잃고 밖에 나가면 다들 아들 자랑에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으셨기 때문에 나는 아빠가 그런 마음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불쌍한 우리 아빠. 보고 싶은 우리 아빠. 2015년 12월 12일. 아빠는 우리만 남겨 두고 그렇게 남동생 곁으로 떠났다.


< 엄마말에 의하면 내가 5살쯤 영월 장릉에서 찍은 유일한 어릴 적 가족사진이라고 한다.>


벌써 10년.


아빠가 우리 곁을 떠난 지 올해가 벌써 10년이 됐다. 어버이날 엄마한테 무슨 선물을 할까 고민을 하다가 어릴 적 가족사진 색이 자꾸 흐려지니까 판화로 남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 정찬민 작가님께 제작을 부탁드렸다. 사진만 봐도 판화로 제작하기엔 힘들 것 같아서 부탁드리기도 죄송하고 예술가에게 제작비를 물어보는 것조차 민망했다. 친정엄마께 어버이날 선물로 가족사진을 판화로 제작해서 선물해 드리고 싶다고 말씀드리고 혹시나 바쁘신데 폐를 끼치는 건 아닌가도 싶어서 힘들면 거절하셔도 된다고 말했다. 작가님께서는 뭐냐고 물으셨고 사진을 보냈는데 "옛 필름 사진이라 더 이상 좋게 나오지 않아요"라며 뽀샵 사진을 보내주셨다. 나는 "저는 그 상태도 좋은데 힘들면 다른 사진을 찾아볼게요."라고 했다. 작가님은 "원하시면 해드리죠"라고 허락하셨다. 국가무형문화재이신 분이 가족사진을 판화로 제작해 주신다니 너무나도 기뻤다.


< 판화로 복원 가능한 상태의 사진이라며 정찬민 작가님이 보내 주신 사진 >


< 작업 중간 과정을 사진으로 보내 주셨다 >


"도로 가져가"


4월 17일에 제작을 부탁을 드렸고 4월 30일에 판화가 도착했다. 어버이날 연휴에 판화를 가지고 아들과 친정에 갔다. 그런데 걱정이 앞섰다. 엄마가 먼저 떠난 아들과 남편의 사진을 오롯이 마주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됐다. 엄마는 아직도 남동생과 아빠 사진을 보면 눈물을 흘리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엄마도 현실을 마주해 조금이라도 고통이 흐려지길 바랐다. 친정에 도착해 밥을 먹고 가족사진을 판화로 만들었다며 슬며시 꺼내 엄마에게 내밀었다. 엄마는 판화를 보자마자 "둘이나 여기 없다."라며 울먹이셨다. 나는 엄마의 눈물 줄기가 더 굵어지기 전에 그 판화를 제작한 분이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무형문화재라고 했고 그럼 이거 비싼 거 아니냐며 왜 돈을 썼냐고 잔소리를 하시길래 그분이 직접 제작 하는 작품은 몇 백만 원 몇 천만 원인데 특별히 나만 10만 원에 재작해 주신 거라며 거짓말을 했다. 그런데 엄마가 판화를 한참을 들여다보더니 "이거 도로 가져가. 나는 못 보겠다."라고 하시는 게 아닌가? 역시나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알았어. 그럼 가져가서 우리 집에 걸어 놓지 뭐."라며 판화를 가방에 도로 넣었다.


<34년간 친정 거실에 걸려 있던 고1때 만든 자수 액자. 지금은 우리집 벽에 걸어뒀다.>


다음 날 아들과 엄마를 모시고 드라이브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집에 들어왔다. 친정 거실 벽에는 내가 고등학교 1학년 가정 시간에 실습한 수를 놓은 액자가 34년째 걸려 있었다. 나는 그 액자를 보며 "엄마 이 액자 34년이나 걸어두는 이유가 뭐야?" 엄마는 "잘 만들었잖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엉망이다. 실이 모자라 바탕색이 두 가지로 되어 있는데 잘 만들었다니... 역시 자식은 내리사랑이다. "이제 저 액자 내가 가져가서 우리 집에 걸을게. 여기다 판화 걸면 되겠다."라고 하니 엄마는 "그럼 걸던가..."라고 했다. 그래서 34년간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액자를 떼고 그 자리에 가족사진 판화를 걸었다. 액자를 거는 내 옆으로 아들이 오더니 나를 쳐다봤다. 나는 아들에게 윙크를 했고 아들은 웃었다.


< 정찬민 작가님께서 완성해 주신 어릴 적 유일한 가족사진 판화. 이런 가족사진 가진 사람이 있을까? >


"정찬민 작가님 정말 감사합니다".


어려운 작업인 것도 알고

가격도 터무니없다는 거 다 압니다.

그래서 죄송하고 송구합니다.

그리고 낡아서 빛바래가는 유일한 가족사진을 이렇게 다시 살려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작가님 덕분에 46년 만에 다시 가족사진을 찍을 수 있게 돼서 정말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하늘에서 남동생도 아빠도 좋아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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