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존재의 바탕에는 삶이 있다
회사를 다니며 음악 작업을 꾸준히 하는 형이 내게 물었다. "민효씨가 뭐랄까, 모든 걸 다 버리고 그림에 전념하게 하는, 이유가 뭘까요?"
나는 답했다. "모든 걸 다 버리지 않았어요 저는. 저는 모든 걸 얻기 위해서 그림을 그리는 거죠."
그 형이 다시 물었다. "그럼 민효씨가 생각하는 모든 건 무엇인가요?"
나는 답했다. "제 건강, 가족, 친구, 연인, 시간(여유), 돈이죠."
나는 모든 걸 다 버리고 그림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하)기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남들처럼 직장 생활을 해내는 데에 큰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었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내는 것이야 말로 나를 살리는 방법이라고, 수없이 스스로 물은 후에 알게 됐기 때문에 그렇게 결정했다.
나에게 있어서 그림보다 중요한 것은 정말 많다. 나의 건강,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렇다. 근데 이건 항상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누군가의 부고가 들리거나 내가 반사회적인 언행을 일삼게 되어 그들 중 누군가가 혹은 대다수가 내 곁을 떠날 수도 있지만.) 그러니 나에게는 '현재 상태의 존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림을 그리는 것, 혹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림을 그리는 '행위' 안에서도 적용되는 것이다. 나는 누군가의 명령대로 그림을 그릴 수가 없다. 누군가의 의견을 통해 그림을 그릴 수가 없다. 누군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그림을 그릴 수가 없다. 나는 그냥 내가 원하는 대로 그림을 그릴 수 있을 뿐이다. 다만, 내가 원하는 것이 누군가를 기쁘게 하는 것이거나, 누군가의 의뢰를 받는다는 것이라면, 우연히 공교롭게도 그런 일치가 발생한다면, 나는 그걸 그릴 수 있을 뿐이다.
나에게 그림보다 더 하고 싶은 무언가가 생긴다면, 내 꿈은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한국인 최초, 최연소로 개인전을 하고, 미술계의 슈퍼 스타가 되는 것에서, 그 길 위의 무언가로 바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계속해서 그림을 그릴 것이다. 그림은 단순히 나를 성공으로 이끌어줄 수단이나 나의 생계 수단이 아니다. 나에게 있어서 그림은 그것들을 포함해서 훨씬 더 단순하고도 고귀한 가치를 가진다. 그것은, 매일 밥을 먹고, 일기를 쓰고,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처럼 그저 나의 생활 양식 속에 꼭 할 수 밖에 없는, 일상으로써의 역할이다. 꿈은 바뀌더라도, 그래서 설령 하나의 그림을 그리는 데에 지금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나는 아마 계속 그림을 그릴 것이다. 나에게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욕구는 생리적 욕구 바로 다음에 붙은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코가 가려울 때 코를 파는 것 다음으로 그림을 그리고 싶다.
나의 삶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이 당연히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우선한다. 나는 그림을 그린다고 밥을 굶거나 잠을 자지 않는 등의 선택은 하지 않는다. 물론 식사 때를 조금 늦추거나, 잠을 조금 덜 잘 수는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림이 일상적인 욕구와 비슷한 수준이라고 느끼는 걸 보니, '삶이 그림에 우선한다'는 내 말에도 약간의 모순이 있는 것 같다. 그림이 삶에 붙어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