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에서 느낌으로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때는 저의 아이디어를 그림 속에 숨겨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치 제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퀴즈 풀듯 맞춰보길 바랐습니다.
그것은 말이나 글로 하기엔 민망하지만 꼭 표현하고 싶은 욕망이었으며, 꼭 이해 받고 싶지만 괜히 쿨해보이고 싶은 마음이었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 그림을 정확히 해독해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것일텐데도 그때 당시에는 오독한 사람을 바보라고 생각할 정도로 어리석었습니다.
그러한 과정이 몇 년 반복되다보니 저는 조금씩 그림에 담은 퀴즈가 해석되기를 포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그림을 그리면서 그냥 그리고 싶은 것, 별 의미가 없어 보이는 것('의미가 없어 보이는 것'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저의 이성적 사유의 층위에서는 그것이 의미가 없어 보이더라도 저의 무의식적 혹은 감각적인 층위에서는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들로 화면을 구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몇 년이 지나
저는 재료의 변화 때문인지, 제 실력의 부족인지, 아니면 제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의 변화 때문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추상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추상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애초에 추상이라는 것이 이해를 통해 표현자로 부터 감상자에게도 전해지는 걸까요?
개인적인 경험에서, 저는 이우환 작가님의 그림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무슨 그림이며, 도대체 뭔지에 대해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추상을 계속 그려서 인지, 아니면 그림에 대한 저의 생각이 변해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최근 이우환 작가님의 [점으로부터]를 봤을 때는 정말 좋았습니다.
이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전엔 그 점들이 뭘 의미하는 건지, 이우환 작가님이 어떤 의미를 담으려고 했는지 생각하며 그림을 '이해'하려 했다면, 이번엔 그저 그 점들을 '느끼려고' 했고 그렇게 느낀 것들이 좋았습니다. 규칙적이지만 점점 사라지다가 다시 진해지는 그 점들 속에서 잘 정돈된 운율감을 느꼈고, 뭔가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물론 당연하게도 어떤 소리가 들렸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직도 그림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어쩌면, 그림이라는 것 자체가 말이나 글이 주를 이루는 우리의 사고 세상 속에서 정확히 규정되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