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이 자오, 2025
*스포일러 포함.
극의 공기가 바뀌는 순간은 그의 이름이 불릴 때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누구라도 알 법한 이 대문호의 이름에게 어떻게 하면 영화가 잡아먹히지 않도록 만들 것인가, 이것이 <햄넷>의 가장 중요한 고민거리였으리라.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은 영화의 후반까지 직접적으로 불리지 않는다. 그 존재감을 의도적으로 숨긴 것이다. 이 영화는 역사적 인물의 위인전이 아니라, 기구하고 초라한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는 다음과 같은 글귀와 함께 시작한다.
"사실 햄넷과 햄릿은 같은 이름이다. 16세기 말과 17세기 초 스트랫퍼드의 기록을 보면 이 두 이름은 완전히 혼용되어 사용되었다." - <햄넷의 죽음과 햄릿의 탄생>
'햄넷'이 죽고 '햄릿'이 태어난다. 즉 둘은 같은 존재다. 카메라가 켜지면 두 그루의 나무를 비추는데, 화면이 밑으로 내려가면 사실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기둥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햄넷과 햄릿의 관계를 시각적으로 재진술한 쇼트다. 오프닝에 영화의 모든 내용이 담겨 있다. 햄넷이 죽고 햄릿이 태어난다.
<햄넷>의 출발점은 복잡하다. 최초에 실존 인물 햄넷이 죽은 사건이 있었고, 그로 인해 셰익스피어가 연극 <햄릿>을 창작했으며, 이 일련의 사건을 토대로 <햄닛>이라는 소설이 나왔고, 그 소설을 각색한 영화가 <햄넷>이다. 따지고 보면 스스로의 기원에 대해 설명하는 셈인 이 영화는 현실과 허구의 경계에 절묘하게 서있다.
극의 후반에 들어 연극 <햄릿>이 시작되면 이 메타적인 성격은 한 층 더 복잡해진다. 영화는 연극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연극을 스크린에 그대로 보여준다면 그건 그냥 연극이지, 영화가 아니다. 실제로 이 연극 시퀀스에는 연극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대신 연극에는 없는 것, 즉 카메라의 시선을 강조한다. 이 시선은 다름 아닌 아녜스(제시 버클리)를 향한다.
연극 시퀀스는 연극 장면과 아녜스를 비추는 장면이 교차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 시퀀스에서 중요한 것은 연극 자체가 아니라, 연극을 바라보는 아녜스의 시선이다. 그 시선에는 전반부에서 들려준 비극적인 이야기가 담겼다. 관객은 일종의 필터를 쓰고 <햄릿>을 관람하는 셈이다.
영화 초반 아녜스는 숲속에서 첫째 아이를 출산한다. 기쁨도 잠시, 윌리엄(폴 메스칼)은 나무 옆 칠흑 같이 어두운 구덩이를 보고 낯빛이 어두워진다. 이 이미지는 영화 후반의 연극과 연결되는데, 연극 무대 위의 배경은 나무 그림이고 그 중앙에는 백스테이지로 향하는 구멍이 있다. 똑같이 칠흑처럼 어둡다. 즉 나무는 가짜지만 구멍은 진짜다. 아녜스의 심정도 마찬가지다. 무대 위에서 일어나는 연극은 허구에 불과하지만, 아녜스가 느끼는 감정은 현실이다.
아녜스는 햄넷 역의 배우가 쓰러지자 그를 향해 손을 내민다. 허구의 연극에 현실의 손길이 닿는 순간,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의 구분은 무의미해진다. <햄넷>은 그 발상부터 현실과 허구 사이에서 출발해 그 경계를 직접 허물며 끝맺는다.
4.5 / 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