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득 찬, 빈 의자

영화 '법정스님의 의자'를 보고

by ㅇㅈㅇ

“‘혹자가 스님이 이렇게 산중에서 혼자 사는데 도대체 세상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라고 말하면 많이 반성을 하게 됩니다. 그래도 내가 혼자 살며 자연에서 얻은 지식을 글, 책으로 써서 알리고, 또 중이 이렇게 사는 모습을 보고 감동하고 기뻐하는 사람이 있기에 내가 밥값의 일부를 하고 있다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의자’를 보고 가장 감명 받은 장면/말씀이다. 물론 그 말씀의 내용도 훌륭하지만, 마지막 대목에서의 법정스님의 화법이 당신을 아주 잘 보여준다. 스님은 “내가 밥값의 일부를 하고 있다고, 이렇게 생각합니다.”처럼 일반인들의 통상적이고 습관적인 발화 방식으로 말씀하시지 않는다. 대신에 그는 “내가 밥값의 일부를 하고 있다고, 이렇게 말합니다.”라고 이야기하신다. 이 대목은 스님의 사소한 화법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 스님의 인생을 함축하고 있다. 사소한 이야기부터 불가의 진리에 이르기까지, 법정스님은 그저 ‘생각함’을 넘어서 ‘말하고, 행동하는’ 삶을 사셨다. 진리를 구하는 사람, 깊은 공부나 생각을 하는 사람을 넘어서 진정한 실천적 수행(遂行)자의 삶을 사셨다.

연기를 알아 ‘행위’의 재생을 조절하고 삼매와 새김을 통해 감정과 직접 연결된 ‘신체’를 조절하라는 초기불교의 가르침처럼, 법정스님은 항상 수행(遂行)을 하셨다. 그런 스님의 이야기가 담긴 영화 ‘의자’에는 당신께서 ‘자비’와 ‘무소유’를 수행하시는 모습도 있다. 다음 두 장면을 통해 그 구체적인 수행의 모습을 짚어보고자 한다.


어느 날, 한 무리의 손님들이 스님을 방문한다. 손님들은 ‘노스님을 만나면 삼배를 한다’는 불가의 관습에 따라 절을 드리려하지만, 법정스님은 거부하신다. 자기를 낮추는 하심의 자세 그 자체를 보여주신다. 평소에 동료나 나보다 어린 동생들이 지나가며 한 번만 인사를 빼먹어도 내심 기분이 나쁘고 서운해 하는 나는 이 장면을 보고 감명을 받았고 너무 부끄러웠다. 아니 사실 감명을 받을 새도 없이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고통스러울 지경이었다. 또한 스님의 이 행동에서 자칫 상관이 없어 보이는 ‘자비’를 떠올렸다.

자비란, 연기적으로 연결돼있는 모든 중생의 불성을 존중하고 그를 발현시켜 중생의 해탈을 도우려는 어머니의 아들을 향한 그것과도 같은 마음이다. 그렇지만 동자승의 깨달음을 위해 그 어린 손가락을 잘라버린 스님의 행동마저 자비로 불릴 만큼, 세간 사람들이 생각하는 무조건적으로 ‘친절한’ 행위와는 거리가 있다. 핵심은 그것이 다른 중생의 해탈을 돕는 행동이라는 점이다. 그를 위해선 모든 사람이 어떤 성격을 가지고 어떤 행동을 하던, 어떤 연기적 상황에 처해있던지 간에 그 사람 속의 불성을 발견하고, 존중하는 것이 필요하다.

속세의 옷과 헤어스타일 그대로, 한껏 멋을 부리고 불가의 큰스님을 찾아뵌 손님들의 행색이 자칫 스님에게 실례가 아닐까 걱정하던 나의 어리석음이 무색하게, 스님은 속세 중생을 똑같이 존중하셨고 삼배를 거부해 스스로를 낮추셨다. 이런 존중과, 스님이 내게 부끄러움의 형태로 안겨주신 사소한 깨달음. 그것이 스님의 자비 아닌가.


마지막으로 스님이 항상 직설적으로 강조하시던 무소유의 경우, “중이 하나만 있으면 됐지, 왜 두 개가 필요한가? 넘치는 물량은 결코 맑고 향기로울 수 없다.”라는 대사에서 그 수행 모습이 잘 나타난다. 물건을 소유할수록 그 물건에 얽매이게 된다는 가르침. 연기에 의한 집착과 윤회의 반복에 관련된 이야기일 것이다. 물건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연기에서 벗어나는 것, 그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고 스님은 그것을 일생 바쳐 수행하셨다. 43년 간 사용하신 양은 대야가 그 치열한 수행의 흔적을 보여주는 듯하다.

마지막 입적에 드는 길에서까지, 스님은 수행자의 회향을 강조하시며 허례허식을 경계하고 모든 것을 비우고 가셨다. 이에 사람들은 법정스님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의자’의 제목을 ‘빈 의자’로 착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영화의 원 제목처럼 그 의자는 비어있지 않다. 죽어서는 무언가를 나눠줄 수 없다는 스님의 말씀과는 달리 가르침으로 가득찬 스님의 의자가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침과 감동을 주고, 중생들에게 자비를 베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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