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간 부수기 여행
가르치는 학생들의 기말고사가 다가와서 주말 없이 교재 편집, 수업을 했다. 내가 호감을 가지고 있던 여자인 친구는 7시간의 시차만큼 떨어져 있었고 나는 그 거리를 좁히려고 늦게 잠들었다. 심지어 잘 때에도 비몽사몽 답장을 하곤 했다. 배려하는 마음에 나의 오후에서 ‘좋은 아침’, 나의 밤에서 ‘좋은 오후’라는 문자들을 보내곤 했다(그런데 김빠지게 차였다). 거기에 멀게만 느껴지던 리트 시험도 한 달 안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할 일은 많아지는데 시간이 점점 없어지고, 현재가 아닌 7시간 뒤의 시간을 살아가는 것 같고, 매섭게 달려오는 미래는 불안하고 촉박하다. 어떤 시인의 말대로 과거와 미래에 아첨하면서 살고 있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이 사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그냥 ‘스트레스가 너무 많아...’라고 생각했다.
남해로 여행을 떠나자는 친구는 갓 교양 프로그램 PD로 입봉 했는데, 본인의 마음과 몸을 갈아 넣은 첫 작품에 대해, 앞으로의 작품들에 대해 바닷가 마을 카페에 앉아 생각하고 싶다고 했다. 친구의 제안에 망설였다. 몇 년 전 가본 남해는 구름 모양 나무로 둘러 쌓인 계단식 논, 그와 마주한 바다 위로 맑은 햇살이 쏟아지는 곳이었고 나는 남해를 사랑했다. 너무나도 가고 싶었지만 출근 때문에, 왕복 10시간 이상이 걸리는 이동 시간에 비해 주어진 여행 시간이 너무 짧았다. 그렇지만 나를 괴롭히던 고마운 스트레스들 덕분에 나는 정말 ‘유쾌하게 미쳐버리고 싶은’ 상태였고 월요일 밤 마지막 수업을 마친 후에 바로 남해로 달려가기로 결정했다. 미쳐!!
미쳐버리고 싶은 나를 도와주듯이 고마운 학생들은 자습 시간이 너무 필요하다고 찡찡댔다. 마지막 수업이 끝나려면 밤 10시였지만 아이들에게 자습 시간을 주고 원장님 몰래 9시에 빠져나왔다. 첫 시간 부수기, 수업 Time Table을 부셔!!! 서울로 달려간 나는 10시 경에 DMC 역에서 친구를 만나 남해로 달리기 시작했다. 사실 마음처럼 잘 달리지는 못했다. 밤중에도 홍제동 다리 밑을 빠져나오는 곳은 꽉꽉 막혔고, 고속도로 곳곳의 공사 현장과 사고 현장은 우리를 거북이처럼 만들어서 기대하고 틀어놓은 ‘고속도로 로맨스’ 노래를 김빠지게 만들었다. 네비게이션은 도착 예정 시간을 3시라고 알려줬다가, 우리가 휴게소에서 핫도그 하나 먹고 기름 한 번 넣는 사이 4시로 슬그머니 말을 바꿨다. 준비했던 신나는 음악 플레이 리스트를 다 써버린 우리는 지치기 시작했다.
이미 두 시간 이상 달린 12시 30분 경, 우리는 급격히 피곤해졌다. 같은 고속도로를 타고 남해를 가더라도 우리가 자발적이고 기쁜 마음으로 갈 때에는 여행이고, 지친 몸과 마음으로 의무감에 갈 때에는 수송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옆 차선을 달리는 운송 트럭 운전자 아저씨랑 똑같이 의무감에 수송을 하고 있었다. 우리 몸뚱이를 남해로 옮기는 수송. 근데 자꾸만, 대전으로 빠지는 길을 알려주는 표지판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 두 번도 아니고 자꾸만, 운명처럼. 일전에 같이 대전 유성 온천의 맛을 봤던 우리는 대전에 끌리기 시작했다. 둘 다 MBTI J 성향이라서 계획을 어기는 것이 죄처럼 느껴졌는데, 자꾸 우리를 반겨주는 것 같고 안내해주는 것 같은 대전의 표지판을 6번째 본 우리는 그냥 서로 외쳤다. 대전 가자!! 우리가 계획한 시간도 뿌셔!!! 이 때 우리의 수송의 시간이 여행의 시간으로 바뀌었다. 이 때부터 나는 타자의 시간이 아닌 내 시간을 살기 시작했다.
우연히 저번에 묵은 숙소와 같은 숙소로 예약을 해버렸다. 대전 이안 레지던스. 왜 이렇게 우연이 많은 거지? 고마웠다 우연에게도. 막상 숙소에 들어오니 조금 아쉬운 느낌이 들어서 둔산동 어느 포차에 가서 국물 닭발과 주먹밥에 대전 소주 ‘린’을 마셨다. 나는 닭발이 그렇게 맛있는 음식인 줄을 그 때 처음 알았다. 맛있게 매운맛, 주먹밥에 매운 국물을 적셔서 꾸덕하게 먹는 맛...... 그 매운맛은 달콤한 아이스크림 한 입에 부드럽게 사라졌다. 그리고 나서는 꿀맛 같은 잠. 자고 일어나서 먹은 낙지 전골. 맛, 맛, 맛, 대전은 정말 맛있는 도시다. 다들 대전이 노잼 도시라고 하는데 우리는 정말 공감이 안 된다. 대전 정말 재밌다. 정말 맛있는 것도 많다. 온천에서 계란 먹는 것도 진짜 맛있고, 대전 개잼!!!
대전을 떠나 남해로! 친구와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면서 기나긴 고속도로를 지나왔다. 나는 이 친구를 사랑한다. 남해에 가까워지면 많은 풍경들이 보인다. 일단 길가 나무의 모양도 구름이나 솜사탕처럼 뭔가 동글동글하게 변한다. 너무 잘 어울려 남해랑. 그리고 사천 즈음을 지날 때에는 사천 훈련 비행장에서 이륙한 훈련 전투기들이 웨에엥 날아다닌다. 몇 년 전 군 훈련소에 있을 때 행군으로 걸어간 곳... 남해에 같이 놀러왔던 전 애인이랑, 남해에서 싸운 일도 기억난다.
남해에서의 여행은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워 넣었다. 남해 시장에 가서 꽃게와 갯가재 사기, 그 옆에 자전거 상점에 들러서 사장님에게 양해를 구한 후에 가져간 농구공과 축구공 바람 넣기. 해수욕에 대비해서 슬리퍼 사기 등등. 그 후에 남해의 사촌 해수욕장에 도착했다. 몇 시간을 달려 도착한 사촌해수욕장은 진짜 오랜만에 만난 사촌보다 반가워. 사촌 해수욕장에서 축구공 가지고 놀고, 해수욕 하고, 바다 바라보고 으와아악!! 기합도 지른다. 멀리 바라보며 생각하는 시간도 가져본다.
몇 백 미터 옆 바위에서 낚시하는 아저씨를 보며, 강태공 선생님이 미끼 없이 낚시를 하며 세월을 낚고 있다고 말한 걸 생각했다. 세월은 흘러가는 시간. 미래에서 과거로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현재를 사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현재를 미래에 양보하는 사람들, 과거의 영광에 집착하는 사람들. 아까 그 시인은 과거와 미래에 아첨하지 않을 것을 청혼의 상대방에게 굳게 ‘다짐’했다. 나는 바다에서 달리고 수영하고 축구공 차고 바다에 소리 지르며 세월을 낚고 있었다. 과거와 미래에 아첨 않고 현재를 살고 있었다. 얼마 만에 잡은 월척이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과거와 미래의 시간을 부수고 현재를 낚기 성공^^
이른 저녁의 해수욕을 하고 난 이후에는 바비큐 타임을 가졌다. 꽃게와 갯가재는 찜기에 찌고, 소고기 갈메기살과 스테이크는 숯불에 직화로. 갑자기 비가 엄청나게 와서 처마 밑의 우리도 비를 홀딱 맞았지만 고기와 쌈장에 섞인 빗물마저 너무 맛있었다. 빗물 섞인 그 맛의 추억 잊을 수 없어! 바비큐 타임 후에 자려고 누워서 보고 있던 영화 밀양(이창동)의 결말 부분을 이어봤다. 정말 입을 딱 벌리고 봤다. 밀양이라는 도시, 한 공간과 그 속의 인생은 수 만 가지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도. 그런 생각을 하며 잠든 이후에 시간 부수기를 이어나간다.
다음 시간 부수기는 자의가 아닌 타의였다. 그 날이 마침 남해대교 개통 50주년 기념일이었다(그리고 그날부터 꽃게 금어기여서 우리는 꽃게 막차탐ㅎㅎ). 50주년 기념 행사로 남해대교는 통제된 상태였고 노량대교를 이용해야하는데, 빙 둘러가다 시간이 늦어져 서울로 올라가는 차를 놓쳤다. 그 날은 출근해야하는 날이었는데, 그 날의 수업 Time Table도 부숴... 갑자기 부숴진 시간에서 우리는 남해 공설 운동장을 전세 내서 축구 연습을 하고, 사우나를 전세 내서 목욕을 했다. 어릴 때 수업시간에 어쩌다 조퇴하고 나 밖에 없는 운동장을 걸어 나오는 기분. 나만 이 시간을 살아가는 기분. 그걸 계속 느꼈다. 이 다음부터의 행적은 생략해도 좋겠다. 기쁜 마음을 가지고 무사히 서울로,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한 가지를 결심했다. 과거와 미래에 아첨하지 않고 시간을 부숴서 현재를 사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나는 용기를 내고 행복한 인생을 사는 것에 도전하기로!
재생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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